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3
박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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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샘에서 길어올린 꽃말
[시를 노래하는 시 51] 박지웅,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 책이름 :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 글 : 박지웅
- 펴낸곳 : 문학동네 (2012.12.10.)
- 책값 : 8000원

 


  해는 지고 달이 뜨며 밤이 깊은데, 아이들은 잘 낌새가 없습니다. 얼마나 더 놀면 너희들은 스르르 곯아떨어지겠니, 하고 마음으로 묻습니다. 두 아이는 빙그레 웃으며 이리저리 뛰고 구를 뿐입니다. 작은 아이들은 작은 다리로 작은 집 작은 방에서 이리저리 뛰기만 해도 웃음보가 터집니다. 까르르 꺄하하.


  시골마을 작은 보금자리에 무슨 웃음샘이 있다고 웃음꽃이 피어날까 싶지만, 아이들은 저희 마음샘에서 웃음꽃을 길어올리겠지요.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읍내에서도, 기차에서도, 이웃 도시에서도, 어디에서도 아이들은 저희 깜냥껏 웃음꽃을 터뜨려요.


  하아, 길게 한숨을 쉬다가 혼자 옆방으로 건너갑니다. 옆방이라 하지만 문이 트인 방이요, 이부자리만 깐 곳입니다. 내 조그마한 빈책을 꺼내고 볼펜을 손에 쥡니다. 끝없이 뛰노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 아이들과 살아가는 내 마음을 글 몇 줄로 적바림합니다. “달은 / 꽃내음 먹으며 살아요 / 꽃빛 닮고 / 꽃무늬 아로새기며 / 까맣고 까만 / 깊은 밤하늘에서 / 맑게 빛나요. // 별은 / 풀내음 마시며 자라요 / 풀빛 물려받고 / 풀무늬 콕콕 새기며 / 캄캄하고 캄캄한 / 너른 밤하늘에서 / 밝게 웃지요.”


  고개를 들어 옆방을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뜁니다. 쉬지 않고 구릅니다. 두 아이가 서로 부딪히고 서로 넘어지며 웃습니다. 놀이가 따로 없습니다. 일어서도 놀이요, 앉아도 놀이입니다. 누워도 놀이요, 기어도 놀이입니다.


.. 나비는 꽃이 쓴 글씨 ..  (나비를 읽는 법)


  내 어린 날, 나도 이 아이들처럼 낮 없고 밤 없이 놀았습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도 나를 바라보면서 어쩜 너는 잠 없이 이렇게 놀 수 있니, 하고 바라보았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내 어린 날은 우리 두 아이하고 사뭇 다릅니다. 나는 우리 두 아이처럼 더 깊게 더 늦게 더 오래 놀지 못했어요. 어른이 불을 끄면 우리도 누워야 하고, 어른이 잠자리에 들면 우리도 목소리를 죽여야 하며, 어른이 조용히 하라면 참말 조용히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큰소리와 함께 꾸지람, 또는 회초리가 날아오지요.


  우리 아이들이 어쩌면 이렇게 신나게 밤까지 잊으며 놀까 하고 생각하다가는, 아무래도 이 아이들 어버이인 내가 이 아이들만 하던 어린 나날, 그야말로 까무라칠 만큼 실컷 개구지게 놀지 못한 탓 아닌가 하고 돌아봅니다. 어버이 내 가슴에 어떤 아쉬움이 씨앗으로 남아 아이들한테 이어질 수 있으며, 이 아이들은 아쉬움 하나 없이 홀가분하게 뛰어노는구나 싶어요.


.. 체육 선생은 밀대자루를 휘두를 때마다 외쳤다 / 새끼들, 그게, 질문, 이 새끼, 말이면, 다, 말 / 세상에는, 물으면, 안 되는, / 숨이 차자 조사를 빼고 때렸다 / 엉덩이에 뜨끈하게 붙어 있는 책을 깔고 앉아 / 아이들은 숨죽여 침묵을 자습했다 / 물으면 안 되는 것들을 조용히 뒤적였다 / 그림자들만 천장에 술렁이고 있었다 ..  (물으면 안 되는 것들)


  고흥 시골마을은 조용합니다. 고흥 시골마을은 따스합니다. 12월 들어 동짓날 지날 무렵 처음으로 마당에 얼음이 업니다. 그래도 물꼭지까지 얼지는 않습니다. 겨울비 내려 마당 한쪽에 물이 고인 뒤 살짝 얼었을 뿐입니다. 아침 되어 햇볕 비추면 얼음은 녹고, 밤이 되어 서늘해지면 이 물이 다시 얼 수 있고 그냥 안 얼 수 있어요.


  두 아이는 얼음조각 슬며시 집어서 우걱우걱 먹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이 꼴을 보면, 두 아이는 헤헤헤 웃으며 나머지 얼음조각을 입에 쑤셔넣습니다. 얼음이 그리 좋니. 얼음이 그리 맛나니. 먹고프면 먹어. 너희 마음이지.


  자전거를 타고 면내 우체국으로 가는 길에 들판을 바라봅니다. 빈들에는 유채씨를 뿌렸다 하는데, 유채씨 뿌리며 낸 고랑에 고인 겨울빗물이 살짝 얼었습니다. 고흥 웃쪽 구례나 임실쯤 되면, 겨울에 꽁꽁 얼어붙을 테니, 논자락에 물을 대기만 해도 얼음판이 될 테지요. 오늘날 시골에는 아이들이 거의 사라져 논자락에 얼음판을 만든달지라도 얼음을 지치며 놀 아이들이 없다 하겠지만, 참말 얼마 앞서까지만 해도, 겨울이면 모두 논자락 얼음판에서 뒹굴며 놀았지 싶어요.


  얼음판에서는 쇳날 박은 신을 안 신어도 됩니다. 그냥 신을 신어도 얼음을 지치며 놀 수 있습니다. 신으로 얼음을 지치지 못하겠으면 궁둥이로 얼음을 지쳐도 됩니다. 궁둥이가 젖어 시리다면, 나무판이나 나무막대기를 주워 구르면 돼요.


  논자락 얼음판에서는 넘어져도 무릎이 깨지지 않습니다. 논자락 얼음판에서 고꾸라진들 머리가 터지지 않습니다. 쿵 소리 나며 머리가 좀 아플 뿐입니다. 살얼음이 언 데가 폭 빠지더라도 걱정할 일 없어요. 논물은 얕으니까요.


.. 골목 속에 햇빛의 골목이 따로 생기던 아침도 / 골목 속에 달빛의 골목이 따로 생기던 / 자녁도 발길을 끊은 저 골목 ..  (북아현동 후기시대)


  우리 집 작은아이가 칭얼거릴라치면 어깻죽지에 두 손을 폭 집어넣고는, 자, 날아 볼까, 하면서 하늘로 붕 던지면, 칭얼거리며 울먹이던 아이가 어느새 울음을 똑 그쳐요. 하늘을 날다가 다시 아버지 품으로 내려오며 꺄르르 웃습니다. 또, 한 번 날까, 하면서 붕 던지면, 아주 함박웃음 됩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큰아이가, 나도 하늘 날래, 하며 달라붙습니다. 음, 너는 이제 좀 힘든걸. 몇 밤 자면 여섯 살 될 큰아이를 집안에서 천장까지 붕 던지기에는 좀 버거워요. 그래, 큰아이는 어깻죽지에 손을 끼워 척 들어서 한 바퀴 돕니다. 자, 너는 이만큼만 즐겨, 괜찮지?


  이동안 작은아이는 응, 응, 하면서 다시 저를 날려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습니다. 몇 차례 하늘날기를 시키다가는, 아이구 힘드네, 하고 드러눕습니다. 그러면 두 아이는 서로 콧소리 내며, 더, 더, 하고 외칩니다. 슬쩍 엎드립니다. 엎드려서 책 하나 집습니다. 두 아이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버지 등을 타려고 합니다. 작은아이는 키가 작아 등판을 잘 못 기어오르고, 큰아이는 썩썩 올라탑니다. 나는 아이들한테 말이 되어 책을 읽습니다. 아이는 말을 타며 놀고, 나는 아이들이 저희 몸무게로 내 허리를 눌러 주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책을 읽습니다.


  무릎걸음으로 옆방으로 건너갑니다. 이부자리에서 옆으로 픽 쓰러집니다. 말타기를 하던 큰아이는 이부자리로 폭 엎어집니다. 엎어지면서 깔깔깔 웃습니다. 웃음소리를 들은 작은아이가 뭔가 하고 달려옵니다. 작은아이는 누나 곁에서 부러 폭 엎어지면서 따라 웃습니다. 서로 이부자리에서 쓰러졌다가 섰다가 되풀이하면서 웃고 떠듭니다.


.. 한때 누구보다 이 골목을 잘 알던 개와 고양이 / 그림자도 얼씬하지 못한다 다리 달린 것들은 모두 쫓겨났다 / 까치와 라일락과 천 개의 구름, 날개 있는 것들은 모두 쫓겨났다 ..  (천 개의 빈집)

 

  우리들 보금자리는 시골이기에, 웃층 아래층 따로 없습니다. 집안에서 아이들이 떠든들 이웃집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큰소리로 소리를 질러도 되고, 방바닥을 쿵쿵 굴러도 됩니다. 한밤에 피아노를 두들기든 북을 두들기든 피리를 불든 하모니카를 불든 다 좋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 겨레는 층집은 안 짓고 살았어요. 그리 멀지 않은 지난날까지도, 달동네 작은 집이라 하더라도 모두 ‘마당집’이었지, ‘땅밑집’이나 ‘옥탑집’이 아니었어요. 일제강점기 언저리에 일본사람이 지은 나무집이 아니라면, 2층짜리 집이 없었어요. 도시에서 제법 살 만한 이들이 지은 새마을주택이 아니라면, 2층이나 다락방이 따로 없었어요.


  다닥다닥 붙은 도시 골목집에서는 아이들이 밤늦도록 놀 적에, 얇은 흙벽이나 나무벽을 타고 이웃집 사람이 좀 시끄럽다 느낄 만한 소리가 퍼졌겠지요. 그러나 이웃집에도 으레 아이들이 있으니, 이쪽에서 떠들든 저쪽에서 떠들든, 어느 집에서나 왁자지껄한 노랫소리가 울렸어요. 누구나 방바닥을 쿵쿵 울리는 놀이를 즐기고, 언제나 방바닥 콩콩 뛰고 구르며 살았어요.


  이제 5층 10층 20층 30층 층층층층 올라서는 집들이 수없이 들어섭니다. 시골 읍내에도 층층집이 들어섭니다. 마당집 아닌 층층집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아이들은 집안으로 들어오면 홀가분하게 뛰지 못합니다. 달리지 못합니다. 노래하지 못하고 구르지 못해요.


  아이들은 낮이고 밤이고 놀고파요. 아이들은 밥을 먹다가도 슬그머니 밥상 앞에서 엉덩걸음으로 뒤로 빼다가는 까르르 웃으며 놀고파요. 이 아이들과 살아가는 우리 어버이들은 어떤 집에서 어떤 사랑을 꽃피울 때에 서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울까 헤아려 봅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없다면, 아이들이 실컷 노래하거나 구를 수 없다면, 이런 곳을 ‘아이와 함께 살 보금자리’로 삼아도 될까 궁금합니다.


.. 직장만 바라보고 살던 이들은 모두 눈이 어두워졌다 ..  (합성사진)


  박지웅 님 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문학동네,2012)를 읽습니다. 박지웅 님은 시집 첫머리에 “라일락을 쏟았다 / 올겨울, 눈과 나비가 뒤섞여 내리겠다” 하고 노래합니다. 노래하는 이야기는 조그마한 책에 조그마한 사랑으로 담깁니다.


  어쩌다 라일락을 쏟았을까요. 무슨 일이 있기에 라일락을 쏟고 말았을까요. 그러나 라일락을 쏟았으니 눈도 내리고 나비도 내리겠지요. 라일락을 쏟고 보니 눈이랑 나비가 서로 얼크러지며 어여쁜 빛을 베풀겠지요.


.. 웅아, 아버지 돌아가셨다 / 기차가 고향역 들어설 때 누이는 연하고 붉은 말을 전했네 ..  (홍시)


  마음샘에서 꽃말을 길어올립니다. 마음에 깃든 샘이요, 꽃다운 말입니다. 마음을 싱그러이 밝히는 샘이며, 꽃처럼 곱고 환한 말입니다. 우리 집 큰아이는 큰아이대로 가장 이쁜 소리를 뽑아 한 마디 두 마디 또박또박 말합니다. 우리 집 작은아이는 작은아이대로 가장 고운 소리를 뽑아 한 마디 두 마디 웅얼웅얼 말합니다.


  햇살이 드리우는 시골집 마당은 밝습니다. 마당에 넌 빨래가 천천히 마릅니다. 햇살 머금는 겨울바람이 보드랍게 마을을 감돕니다. 멧새가 먹이를 찾아 우리 집 후박나무와 초피나무에 앉았다 갑니다. 작은 멧새는 작은 초피나무 가지에 살포시 앉아 초피나무 열매를 몇 알 따서 먹습니다. 겨울 가고 봄이 와서 후박꽃이 피고 나면, 멧새는 후박꽃 따먹으러 오겠지요. 후박꽃 지면서 후박열매 검붉게 맺히면 멧새는 또 후박열매 따먹으러 오겠지요.


  내 살가운 이웃 누구나 마당집에서 나무 한 그루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나날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4345.12.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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