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 이야기 한겨레 낮은학년동화 1
이현주 지음, 이태수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이책 읽는 삶 26

 


너랑 서로 무엇을 누리면 즐거울까
― 옹달샘 이야기
 이현주 글,이태수 그림,
 한겨레아이들 펴냄,2001.11.7./7000원

 


  내 어릴 적 우리 집에 냉장고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헤아려 봅니다. 내 어버이가 형이랑 나를 낳으면서 냉장고를 집에 들이셨을까요. 두 분이 사실 적에는 냉장고가 있었을까요. 셋방살이를 할 적에는 냉장고 없었을 테고, 내 어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지내던 예전에는 냉장고라는 기계가 있을 턱 없었겠지요.


  이제 어느 집에나 냉장고가 있어요. 냉장고 없는 살림은 생각할 수 없는 오늘날이라 할 만해요. 그런데 나는 ‘우리한테 냉장고 없던 때’ 모습을 자꾸자꾸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집집마다 따로 전기를 쓰지 않고 살던 때 모습을 곰곰이 돌이켜봅니다. 집에서 꼭지를 돌려 물을 쓰지 않던 때 살림살이를 가만히 떠올립니다.


  냉장고 없어도 누구나 밥을 잘 지어 먹고 살았어요. 냉장고 없어도 누구나 먹을거리를 잘 건사해서 살았어요. 전기 없대서 더 힘들거나 어렵게 살지 않았어요. 기름보일러나 가스보일러나 순간온수기 없대서 더 고되거나 빠듯하게 살지 않았어요.


  그런데 냉장고 있고, 물꼭지 있고, 보일러 있고, 자가용 있고, 전기 있고, 또 무엇무엇 끝없이 있고 또 있고 또 있는데, 오늘날 사람들이 활짝 웃거나 까르르 웃음노래 나누면서 살아간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이것저것 잔뜩 누리지만, 막상 오늘날 사람들 얼굴에서 웃음꽃이나 웃음빛을 찾기는 매우 힘들어요.


.. 여름에는 얼음보다도 차게, 겨울에는 숭늉처럼 더운 김을 모락모락 내며, 옹달샘은 솟구쳐 흘러내리다가 다시 땅 속으로 스며들었지 ..  (8쪽)


  시골에서 시골 어린이하고 눈이 마주치면, 시골 어린이는 으레 “안녕하셔요.” 하고 인사합니다. 나도 아이들한테 “안녕하셔요.” 하고 인사를 건넵니다. 마을 아이들 인사를 받다가, 나도 인천에서 자라며 ‘낯 모르는 어른’이라 하더라도 눈이 마주치면 꾸뻑 인사를 했다고 떠올립니다. 요즈음 서울이나 도시는 어떠한지 모르겠는데, 도시에서는 ‘낯 모르는 어른’하고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홱 돌린다든지 그저 멀거니 쳐다본다든지, 아니면 어딘가 나쁜 사람은 아닌가 하고 여기지 않겠느냐 싶어요. 도시에서는 낯선 어른하고 말을 섞지 말라고 가르치잖아요.


  지난날에는 우리가 어떤 삶을 누렸을까 곱씹어 봅니다. 참말 언제부터 ‘낯선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궁금합니다. 지난날에는 ‘낯선 사람’이라는 이름에 앞서, ‘길손’이나 ‘나그네’ 같은 이름을 붙였으리라 싶은데, 이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북적거리면서, 서로서로 낯선 사람이 되어 서로서로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는 삶이 되어요. 스스로 내 옆사람한테 낯선 사람이 되고, 스스로 이웃집을 낯선 사람으로 여기며, 스스로 마을에서 낯선 사람으로 지내요.


  낯설다 해서 무뚝뚝하게 지낼 까닭은 없지만, 낯설다는 생각으로 울타리를 차츰차츰 높게 세우는구나 싶습니다. 낯선 사람 앞이니 굳이 웃을 일이 없어요. 장사를 해야 한다면 억지로 웃습니다. 장사할 일이 아니면 눈길이건 손길이건 마주할 까닭이 없습니다. 물건을 팔려는 뜻으로 겉치레 같은 상냥한 말씨가 됩니다. 마음을 나누어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생각을 나누어 어여쁜 삶을 함께 일구지는 않아요.


.. 숲 속에 소문이 퍼졌어. 누구든지 옹달샘에 가면 하느님을 만나볼 수 있다는 소문이었지 ..  (18쪽)


  이현주 님 글과 이태수 님 그림이 어우러진 《옹달샘 이야기》(한겨레아이들,2001)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한겨레는 예부터 샘물을 마셨습니다. 냇물이나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빗물을 마시고 골짝물을 마셨습니다. 이제 한겨레는 두멧자락 시골마을에서조차 샘물 마실 일이 아주 드뭅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시골마을에까지 땅을 파고 물관 묻어 수도물을 넣으려고 해요. 댐을 더 지으려고 해요. 댐을 더 지으려고 시골마을을 더 없애고, 숲을 더 없애요. 사람들 스스로 숲에 깃들어 ‘숲물’ 마시던 삶이 사라져요. 도시를 떠나 시골숲에 깃들며 숲물을 마시려는 사람들한테까지 억지로 수도물을 먹이려 하는 문명이에요. 이래서야 어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겠어요. “누구든지 옹달샘에 가면 하느님을 만나볼 수 있다(19쪽)”고 하는데, 이 땅 곳곳에 자그맣게 있던 수많은 옹달샘이 말라서 사라지고, 삽질로 사라지거든요.


  지난날에는 거울이 없어도 시냇물에 가만히 고개를 디밀어 맑게 비치는 내 모습을 보았다고 했어요. 이제 오늘날 살림집에는 집집마다 거울이 있어 겉모양 뽐내거나 꾸미기에 바빠요. 서로가 서로를 맑게 비쳐 보여주는 시냇물이 되지 못해요.


.. “백합아, 난 너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 내 곁에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  (24쪽)


  나와 네가 서로 무엇을 누리면 즐거울까요. 우리는 서로 어떤 꿈으로 하루를 빚을 때에 즐거울까요. 사랑은 어디에서 샘솟을까요.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교에 어느 아이가 붙는 일이 즐거움일까요. 무슨 고시에 붙는 일이 즐거움일까요. 회사에서 신분이나 계급이 올라가면 즐거움일까요. 어떤 상을 받아야 즐거움일까요. 어떤 운동경기 대회에서 등수에 들어야 즐거움일까요.


  나를 오늘까지 이끈 즐거움은 무엇일까 하고 되새겨 봅니다. 어머니가 차려 주는 밥 한 그릇이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불 덮고 따숩게 자던 저녁이 즐거움이었습니다. 잠자리에 들며 어머니가 이불자락 여미는 손길이 즐거움이었습니다. 추운 겨울 유리창에 낀 성에를 바라보며 어쩜 넌 날마다 다른 모양으로 빛나니, 하고 말을 걸며 즐거웠습니다. 빗소리를 듣고 빗방울에 온몸이 젖으면서 동무들과 신나게 뛰놀던 나날이 즐거움이었습니다. 손발 꽁꽁 얼어붙지만 눈밭에서 뒹굴며 눈놀이 할 적에 즐거웠습니다. 어머니 심부름을 하며 즐거웠습니다. 온갖 구름이 즐거움이었습니다. 무지개를 본 날, 헐레벌떡 동무한테 찾아가 저기 무지개 보라고 소리지르며 즐거웠습니다. 동네 할머니 짐을 들어 댁까지 갈 적에 즐거웠습니다. 나무를 타면서 나뭇잎이 볼을 스칠 때 즐거웠습니다.

  나는 내 어버이한테 돈이 얼마나 있는지 몰랐고, 돈도 잘 몰랐어요. 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나는 신문도 방송도 책조차도 몰랐어요. 나는 연예인도 가수도 뭐도 몰랐어요.

  우리 아이도 나하고 같겠지요. 우리 아이도 스스로 즐거울 삶을 찾을 뿐, 스스로 즐거울 놀이를 할 뿐, 스스로 즐거울 밥을 먹을 뿐, 달리 어떤 겉치레나 겉껍데기가 있을 턱이 없겠지요.


.. “맞았어, 아름다운 것은 뻐꾸기도 상수리나무도 할미꽃도 옹달샘도 아니야. 우리 모두가 나누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아름다운 거지. 살아 있다는 건 서로 나눈다는 거야. 너희들 덕분에 나도 이렇게 살아 있지 않느냐?” ..  (56∼57쪽)


  조그마한 과자 한 점이든 떡 한 점이든, 곁에 있는 누군가와 나누어 먹으면 한결 맛나고 배부릅니다. 옆사람은 모르는 척 혼자 먹을 적에는 참말 맛없고 배 안 불러요. 그렇잖아요. 우리는 영양소를 먹지 않아요. 목숨을 먹어요. 마음이 깃든 목숨을 먹어요. 풀을 먹든 고기를 먹든, 모두 목숨이에요. 풀은 풀목숨이고, 고기는 고기목숨이에요.


  언제나 목숨이 내 몸으로 들어와요. 물을 마시거나 바람을 마실 적에도 그냥 물이나 바람이 아니라, 물이라 하는 목숨이요 바람이라 하는 목숨이에요.


  서울에서는 서울바람을 마셔요. 시골에서는 시골바람을 마셔요. 공장 곁에서는 공장바람을 마셔요. 숲에서는 숲바람을 마셔요. 자동차 지나가는 자동차바람을 마셔요. 바다에서는 바닷바람을 마셔요.


  그래서, 아이들은 늘 목숨을 먹어요. 어버이가 차리는 밥에 깃든 목숨도 먹고, 어버이가 일구는 보금자리 있는 마을을 흐르는 바람도 먹으며, 어버이가 늘 들려주는 이야기가 서린 말빛도 먹어요. 즐거움은 바로 여기에 있겠지요. 밥에, 집에, 말에. 바람에, 숨에, 물에.


  집 바깥은 찬바람이 흐르지만, 집 안쪽에는 따순바람 감돌아요. 보일러를 돌리기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보일러보다 나와 옆지기와 아이들 있어, 서로가 서로를 따사로이 보듬는 마음이 얼크러지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은 어버이가 살포시 쓰다듬거나 품는 손길이 좋아 새근새근 잠듭니다. 어버이는 아이들을 살포시 쓰다듬거나 품으며 내 손이 스스로 좋아 달콤하게 잠듭니다. 4345.12.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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