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찬물빨래 돌아오다 (대통령 뽑기 생각)
겨울 찬물빨래가 돌아온다. 십이월 첫머리만 하더라도 찬물에 손을 담글 때에 ‘시리다’고까지 안 느꼈으나, 십이월 한복판으로 접어들어 새 추위가 찾아오니, 이제 찬물에 손을 담그며 살짝 ‘시리다’고 느낀다. 그러나, 새벽부터 밤까지,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아이들 씻기고 무얼 하고 걸레 빨고 하면서 손에 물기 마를 새 없기는 늘 마찬가지이다. 바야흐로 손 트고 발 트는 철이 돌아왔구나 싶다.
겨울 찬물빨래는 여름 찬물빨래보다 훨씬 바쁘고 빠듯하다. 겨울에는 물을 끓여서 빨래를 해야 하기도 하지만, 이보다 해가 어느 만큼 떴고, 바깥바람이 얼마나 포근한가를 살핀다. 바깥바람이 꽁꽁 얼어붙으면 해가 났다 하더라도 내다 널거나 말거나 부질없다. 바깥바람이 차면 빨래가 얼어붙으니 방에 널 때보다 못하다. 바깥바람을 살피며 ‘빨래가 안 얼 만하구나’ 싶으면 바지런히 빨래를 해서 내다 넌다. 으레 저녁나절 잠자리 들기 앞서 빨래를 해서 방에다 넌다. 밤에 아이들 밤오줌 누이려고 잠에서 깼을 때 조금 더 한다.
새 대통령 뽑는다는 날이 밝는다. 나랑 알고 지내는 이웃 가운데 1번 후보가 훌륭하니 이녁을 뽑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분은 꼭 한 사람 있다. 내 어버이는 아마 1번 후보를 찍으실 듯한데, 이번 선거에서는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말씀이 없다. 내 어버이는 지난번 대통령 뽑을 적에는 아주 마땅히 1번 아니고는 될 수 없다고 말씀했고, 지지난번 대통령 뽑을 적에는 나한테 ‘여행경비’를 줄 테니 대통령 뽑는 그날에 맞추어 외국여행 다녀오라고 말씀했다.
시골마을 택시 일꾼은 2번 후보를 뽑아야 시골도 나아지고 남북교류도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옆지기 명상모임 이웃들도 2번 후보를 뽑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인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도 2002년까지는 2번 후보한테 내 표를 주었다. 1997년 겨울, 군대에서 전역을 앞두고 대통령 뽑기를 할 적에는 중대장과 행정보급관 눈치를 보며 목숨을 걸고 2번 후보한테 내 표를 주었다. 이때 ‘설마 전역이 코앞인 나를 어떻게 해코지하지는 않겠지’ 하고 생각했다. 마지막휴가를 나온 군대 바깥에서 정권이 바뀐 모습을 보았고, 휴가를 마치고 돌아간 군부대는 생각 밖으로 조용했으나, 눈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서 대대장이 나와 동기들더러 ‘눈 때문에 길이 나쁘니 며칠 쉬다(?) 전역하라’ 했는데, 이 말이 더 무서워 눈밭에서 얼어죽더라도 맨발로 전역하겠다고 외치며 깊은 멧골에서 몇 시간 걸려 허우적허우적 뛰쳐나온 일이 새삼스럽다.
겨울날 찬물빨래가 돌아오면서 여러 생각이 겹친다. 빨래를 할 적에는 다른 생각을 잊는다. 내 마음을 무척 차분히 다스릴 수 있다. 나는 올 2012년 대통령 뽑기에서 누구한테 내 표를 줄까 생각한다. 나는 2002년이 지나고서 한 표 권리를 쓸 적에 5번이나 7번 후보한테 내 표를 주었다. 올해에도 5번 후보한테 내 표를 줄 생각이다. 5번 후보를 기리거나 떠올리는 이웃은 아직 내 곁에 한 사람뿐이지만, 아줌마 대통령이고 노동자 대통령이고를 떠나, 가장 믿음직하며 씩씩한 ‘심부름꾼’ 노릇을 할 사람은 이녁 하나 아닌가 생각한다.
내 둘레 사람들이 하나같이 ‘2번 후보한테 표를 주지 않으면 투표를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들려준다. 나는 곰곰이 듣다가 묻는다.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 맞나요? 나는 내가 믿을 만하며, 심부름 잘 하겠구나 싶은 사람한테 표를 주겠어요.’ 이런 말을 듣는 분들은 ‘그래도, 될 사람과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으니, 되어야 할 사람한테 표를 주어야지요.’ 하고 말한다. 그래, 나는 찬찬히 듣다가 ‘나는 5번 후보가 될 만하다고 여겨 5번 후보한테 표를 주어요.’ 하고 말한다. 더 하고픈 말이 있으나, 더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리라 느껴 입을 다문다.
내 책읽기를 돌아보면 내 삶읽기하고 같다. 나는 아무 책이나 읽지 않는다. 나는 베스트셀러도 스테디셀러도 읽지 않는다. 이른바 ‘한 해 마무리’라 하면서 ‘올 한 해 사랑받은 책 투표’ 같은 무언가 한다 할 적에도, 나는 어느 책에도 내 표를 주지 않는다. 내가 올 한 해 사랑한 책이 ‘한 해 마무리’하는 자리에 끼는 적이 아직 없으니까.
내 마음을 움직일 만한 책이어야 내가 기꺼이 장만해서 읽는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 내놓은 ‘이럭저럭 읽을 만한 책’이라서 읽지 않는다. 백 해 천 해 두고두고 즐길 만하다 싶을 때에 즐거이 장만해서 읽는다.
나는 내 온 사랑을 실어 빨래를 하고 밥을 지으며 비질을 한다. 이맛살 찡그리면서 밥·빨래·청소를 할 수 없다.
나로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리 아랑곳할 일이 없다. 1번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2번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또 5번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내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이 대목을 내 이웃들한테 들려주고 싶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우리 삶은 달라지지 않아요. 누가 대통령이 된대서 우리 삶이 나빠지지 않아요. 누가 대통령이 되니까 우리 삶이 좋아지지 않아요.
내 삶은 나 스스로 좋게 가꾸려고 힘쓸 때에 좋아져요. 내 삶은 나 스스로 손을 놓거나 마음을 놓을 때에 나빠져요. 독재자가 대통령이 된대서 나빠지는 내 삶은 아니에요. 제국주의자가 우리 나라를 총칼로 쳐들어온대서 나빠지는 내 삶은 아니에요. 내 삶은 내가 일굴 뿐이에요. 내 삶은 ‘공무원 삶’도 ‘회사원 삶’도 아니에요. 내 이웃인 당신이 공무원이거나 회사원이라 하더라도 다를 구석 없어요. 당신이 살아가는 밑바탕은 ‘사람’이지, 어떤 신분이나 계급이나 직위가 아니에요.
가슴속을 들여다보셔요. 당신 가슴속에서 어떤 빛이 밝게 비추는가를 들여다보셔요.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시장이든 군수이든 구청장이든 면장이든, 어느 누구한테도 기대지 마셔요. 내 삶은 내가 빚어서 내가 누려요. 아이들을 낳아 보살핀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저희끼리 아이들 삶을 빚어서 누려요. 어버이가 만들어서 나누어 주는 삶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빚는 삶이에요. 내 어버이가 나를 낳기는 하지만, 내 삶을 만들어 줄 수 없어요. 나는 내 어버이 뜻이 아닌 내 뜻에 따라 내 삶을 빚는걸요.
대통령 뽑는 자리에 다녀올 당신이 신문을 내려놓고 방송은 끄고 인터넷은 좀 닫을 수 있기를 빌어요. 삶을 돌아보아 주셔요. 이런저런 새소식 챙긴다면서 스스로 ‘마음읽기’하고 멀어지지 마셔요. 자, 나랑 같이 손빨래를 해요. 빨래기계 하루쯤 쉬라 하고, 다른 일 모두 잊으며 홀가분하게 ‘우리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요. 나 스스로 어떻게 일굴 때에 아름다울 내 삶인가를 생각해요. 내가 빚을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내가 아이들하고 누릴 예쁜 나날은 어떤 그림인지를 생각해요.
저마다 찍고 싶은 사람한테 표를 주면 돼요. 민주주의이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하면 끝이에요. 한 표 권리를 썼으니, 우리는 우리 삶으로 돌아가야지요. 아직 5번 후보가 대통령 된 적 없어 모를 노릇이라고도 하지만, 1번이나 2번 후보가 대통령이 된대서, 이 나라에 골프장이 줄어들지 않더군요. 1번이든 2번이든 한결같이 ‘토목공사 대통령’ 노릇만 하더군요. 핵발전소이든 화력발전소이든, 공해덩어리만 잔뜩 만들 뿐, 슬기로운 길을 걷지 않아요. 1번이든 2번이든 군대를 없애거나 줄이겠다고 밝히지 않아요. 둘 다 전쟁무기 더 많이 만들고 군부대 더 키운다고 하더군요. 1번이고 2번이고 ‘회사원·노동자·공무원’이 일터에서 적게 일하며 집에서 아이들과 더 오래 보내도록 할 마음이 없기도 해요. 어린이집을 더 많이 세운다고 하지만, 우리한테는 어린이집 아닌 ‘일자리 나누기’와 ‘내 집에서 내 식구랑 더 오래 사랑을 빚는 삶’이 즐겁고 아름다울 텐데요.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국가보안법 없어질 낌새는 없구나 싶어요.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자유무역협정을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경제성장율에 목 매다는 슬픈 모습이 사라질 듯하지 않아요.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새만금이고 4대강이고, 또 끝없는 막개발이고, 고속도로이고 고속철도이고, 이제 그만 때려짓겠다 하는 다짐은 없어요.”
이제 아침이 밝고 햇살 따사롭게 내리쬔다. 아침빨래 바지런히 마치고, 아침밥 맛나게 차려서 먹어야지. 네 식구 손 잡고 시골 들길을 걸어 면소재지 투표하는 데에 가야겠다. 4345.12.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