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93 : 두 줄에서 읽는 얼
우리가 애써 책을 읽어야 한다면 어떤 책을 읽을 때에 ‘즐거울’는지 ‘아름다울’는지 ‘참다울’는지 ‘착할’는지 ‘신날’는지 ‘빛날’는지 ‘거룩할’는지 ‘재미날’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면, 줄거리를 살펴 독후감이나 서평을 써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곧, 우리가 어버이한테서 새 목숨 선물받아 살아가야 하는 까닭은 ‘어른 되어 일자리 얻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삶을 누리는 까닭을 생각하듯, 책을 읽는 까닭을 헤아려 봅니다.
밥을 먹어야 한다면 어떤 밥을 먹을 때에 즐거울는지 생각해 봅니다. 밥은 왜 먹을까요. 밥은 왜 지을까요. 밥집은 왜 이다지도 많을까요. 회사원이나 공무원은 왜 바깥 밥집에서 밥을 사다 먹을까요. 학교는 왜 급식을 할까요. 집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왜 도시락을 싸려고 하지 않을까요. 도시락을 싸지 못할 만큼 바쁠까요. 도시락을 쌀 겨를에 ‘생산성 높은’ 다른 일을 해야 할까요. 밥짓기는 ‘생산성 낮은’ 일이라, 돈 몇 푼 치러서 사다 먹거나 급식실 만들어서 밥판에 척척 밥을 올려놓고 먹은 다음 설거지조차 안 해도 그만인 셈일까요.
내 어릴 적을 돌이켜봅니다. 나와 형과 아버지는 날마다 도시락을 둘씩 싸들고 다녔습니다. 나와 형은 중학생과 고등학생 여섯 해를 도시락 둘 싸들고 다녔고, 집과 일터 사이가 먼 아버지도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날마다 도시락 다섯 통 싸는 일을 해야 했고, 나와 형은 도시락 설거지‘라도’ 했습니다.
요즈음 여느 어머니(아버지 아닌 어머니)들 얘기를 살짝 엿들으면, 소풍날이나 현장학습날 같은 자리에 김밥을 싸 주거나 김밥을 ‘사 주’거나 하는데, 아이들은 빈 도시락통 아닌 ‘빈 스티로폼 통과 나무젓가락과 비닐봉지’ 따위를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집으로 돌아온다고 해요. 열 번 백 번 천 번,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 고이 건사하며 쓰는 도시락통 쓰는 집이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우리 식구가 시골집을 떠나 할머니 할아버지 댁까지 기차 타고 찾아갈 적을 떠올립니다. 집에서 바지런히 손을 놀려 도시락을 싸기도 하고, 때때로 김밥집에서 사다 먹기도 합니다. 집에서 도시락을 싸면 쓰레기가 안 나오지만, 김밥집에서 사다 먹으면 쓰레기가 한 봉지씩 나옵니다. 독일사람 에냐 리겔 님이 쓰고 한국사람 송순재 님이 옮긴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착한책가게,2012)라는 책을 읽으면, “우리는 학생들이 프랑스어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역할극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대신, 파리 중앙역에 배낭 하나 메고 내려서 거기에서 리옹까지 혼자서 찾아가는 특명을 수행할 날을 꿈꾸었다. 또한 학생들이 아일랜드에서 도보여행을 할 날도 꿈꾸었다(107쪽).” 하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참말, 아이들은 교과서를 배울 아이들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고 배우며 받아들일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삶을 짓고 생각을 지으며 사랑을 지을 아이들입니다. 체험학습 아닌 ‘삶’을 누릴 아이들이에요. 손수 밥을 짓고, 손수 빨래를 하며, 손수 이야기를 엮을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자전거 타고 집과 학교 사이를 다니기를 빌어요. 아이들이 스스로 흙을 만져 곡식이랑 푸성귀를 거두기를 빌어요. 아이들이 서로 어깨동무하며 고운 노래 부르기를 빌어요. 4345.12.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