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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고아원 ㅣ 세계사 시인선 122
최문자 지음 / 세계사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아이들 손에 나뭇잎 하나
[시를 노래하는 시 37] 최문자, 《나무고아원》
- 책이름 : 나무고아원
- 글 : 최문자
- 펴낸곳 : 세계사 (2003.11.7.)
- 책값 : 5500원
숲에서는 언제나 노래가 울립니다. 숲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숲이 들려주는 노래를 언제나 듣습니다. 그러나, 숲에 깃든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살며시 열어 숲이랑 하나가 되려는 몸짓이 아닐 적에는 숲노래를 못 알아채거나 못 느껴요. 숲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지내더라도 숲이랑 한마음이 되며 살아갈 적에는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숲노래를 고이 들으며 숲넋을 가슴 깊이 아로새깁니다.
꽃밭 앞에 섰어도 꽃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에 있지만, 아스팔트땅 한켠에서 씩씩하게 새잎 틔우며 자라는 조그마한 들풀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꽃밭을 가득 채운 꽃마다 향긋하게 나누어 주는 꽃내음을 못 맡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 북적거리는 도시 한복판에 있지만, 매캐한 바람 부는 도시로 가늘게 풍기는 먼먼 꽃내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얼크러지면서 아이들 맑은 눈빛을 읽으며 빙그레 웃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그저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집어넣을 뿐, 막상 아이들과 기쁘게 이야기꽃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방긋방긋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뛰노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들한테 온갖 값진 장난감을 사다 주면서 혼자 놀라고 내버려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 막다른 집에서 꽤 오래 산 적이 있다. / 헐어빠진 나무대문들을 / 희망처럼 보이게 하려고 / 페인트로 파랗게 칠을 했었다. / 대문의 나무결은 숨을 그치고 / 그날부터 파랗게 죽어갔다 .. (파란 대문에 관한 기억)
꽃이 피고 집니다. 나무가 천천히 자랍니다. 꽃이 피고 지는 흐름을 살피며 삶을 헤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무가 천천히 자라는 결을 느끼며 나뭇가지를 따사로이 쓰다듬는 사람이 있습니다. 꽃망울마다 서린 밝고 푸른 기운을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랑잎 하나 천천히 주워 잎줄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무가 떨군 씨앗을 고개 숙여 살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막 뿌리를 내린 한살박이 새 어린나무랑 두살박이 새 어린나무를 알아보고는 귀엽다고 톡톡 간질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 길거리를 거닐기는 하지만, 길거리에 심긴 채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를 알아채지 않고 갈 길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뭇가지에 줄을 꽉 동여매어 걸개천을 내거는 동안 나뭇가지가 얼마나 아파 하는가를 안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무는 사람과 똑같이 숨을 쉽니다. 나무는 사람과 똑같이 자랍니다. 나무는 사람과 똑같이 씨앗을 내어 새 숨결을 키웁니다. 나무는 사람과 똑같이 나뭇가지 잘릴 적에 아픈 소리를 냅니다. 나무는 사람과 똑같이 찬바람과 비바람을 맞으며 춥다고 노래합니다.
나무 곁에 서요. 나무 곁에 서서 귀를 살며시 대요. 나뭇줄기를 타고 오르는 숨소리를 들어요. 맨 밑바닥 뿌리부터 맨 꼭대기 잎사귀까지 흐르는 숨결을 느껴요. 햇살이 살찌우는 나뭇잎 하나 살살 쓸어요. 나무가 선 자리에는 어떤 흙이 있는지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냄새를 맡아요.
.. 원주, K시인을 따라 / 옻나무밭에 갔었다. / 심장은 놔두고 / 밑둥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 수십 번 더 그어진 칼금 / 저건 숲이 아니다 .. (옻나무밭)
감나무 한 그루 마당에 있으면 겨우내 달콤한 감알 실컷 즐길 수 있도록 선물해 줍니다. 매화나무 한 그루 마당에 있으면 봄내 환한 꽃잔치를 베풀다가는, 여름내 달콤하게 즐길 동그랗고 노오란 열매를 선물해 줍니다. 능금나무가, 배나무가, 복숭아나무가, 살구나무가. 탱자나무가, 석류나무가, 포도나무가, 사람들 살림집마다 한두 그루쯤 자랄 때에는 얼마나 환하며 고울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사람들 살림집이 아파트 아닌, 너나없이 마당 있어 흙내음 물씬 나는 보금자리라면 얼마나 빛나며 예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한국땅은 그렇게 좁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누구나 마당 있는 살림집을 누릴 만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몽땅 도시로 몰리도록 내모니까, 도시에는 땅뙈기가 비좁다고 여겨 2층 3층 20층 30층 쑥쑥 올리기만 합니다. 아파트 한 채에 5억이니 15억이니 떠들지만, 20억이 되건 30억이 되건 마당 한 뼘조차 없다면, 이러한 곳을 ‘집’이라 할 만한지 궁금해요. 흙이 없고 밭이 없어 마당이랑 꽃자리가 없다면, 이러한 곳을 집이라고 일컬을 수 없지 않나 싶어요.
누구라도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아야지 싶어요. 돈이 많은 사람만 마당 있는 집을 누릴 수 없어요. 돈이 적은 사람도 마당 있는 집을 누려야지 싶어요. 마당 한켠에는 열매 알차게 맺는 나무 몇 그루 자라고, 마당 두켠에는 여러 푸성귀 푸르게 자라며, 마당 세켠에는 장독 놓을 겨를 있는 한편, 마당 네켠에는 샘터 조그맣게 있어, 아이들 여름내 물놀이 즐길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 그들은 원래 강남 먹자골목에 살고 있었다. / 먹어본 기억이 깔린 유년의 골목 / 감각의 그 길을 그들은 추억한다 .. (K게이트)
사람이 숨을 쉬고 나무가 숨을 쉽니다. 사람이 숨을 쉬고 풀이 숨을 쉽니다. 사람이 숨을 쉬고 꽃이 숨을 쉽니다.
자동차들이 배기가스를 내뱉으면 사람도 나무도 풀도 꽃도 캑캑거립니다. 공장들이 매연을 내뱉으면 사람도 나무도 풀도 꽃도 코며 입이며 귀며 갑갑히 막힙니다. 발전소가 춤을 추고 골프장이 노래하면 사람도 나무도 풀도 꽃도 시들시들해지고 맙니다. 고속도로가 가로지르고 철길이 뒤덮이면 사람도 나무도 풀도 꽃도 꽁꽁 얽매인 채 뛰놀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나요.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나요.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물려주며 무엇을 사랑하도록 이끄는가요.
내 아이한테 나무 한 그루 베풀지 못한다면 어른 구실이란 무엇일까 아리송합니다. 이웃 아이한테 나무 한 그루 나누어 주지 못한다면 어른 노릇이란 무엇일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숲이 없으면 시골이 아니요, 숲이 있는 시골이 없으면 도시는 살아내지 못합니다. 숲이 있는 시골이 있어야 도시도 살아납니다. 숲이 있는 시골에서 먹을거리를 거두어야 비로소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 돈을 버는 사람들 먹을거리가 나옵니다.
.. 깊은 산에 다녀온 날은 / 머리를 감아도 감아도 풀냄새가 났습니다 .. (당신의 풀)
아무개가 대통령이 된다 해서 도시사람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아요. 시골에 숲이 있어야 도시사람 살림살이가 나아져요. 저무개가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가 된들, 도시사람 살림살이가 좋아지지 않아요. 도시에도 곳곳에 숲이 있어 도시사람 마음과 몸을 쉴 틈이 있어야, 도시사람 누구나 살림을 펼 수 있어요. 그무개가 판사가 되든 검사가 되든 의사가 되든 대수롭지 않아요. 병원은 없어도 되고 극장은 없어도 되며 구청이나 시청 건물을 높게 새로 지을 까닭이 없어요. 숲을 넓혀야 하고, 숲을 아껴야 하며, 숲을 보살펴야 해요.
고속도로 넓힌다며 숲을 밀 때에는 사람 스스로 사람 목숨을 끊는 셈입니다. 더 빨리 달릴 기찻길 놓는다며 숲을 무너뜨릴 때에는 사람 스스로 사람 목숨을 꺾는 셈입니다.
공장을 지어 공산품을 내놓고 이웃나라에 팔아치워야 경제성장율이 올라간다 하는데, 경제성장율이 올라 보았자 사람들 살림을 넉넉히 채우지 못해요. 숲이 있어 싱그러운 먹을거리를 얻어야지요. 숲이 있어 맑은 바람을 마셔야지요. 숲이 있어 시원한 시냇물을 먹어야지요. 숲이 있어 나무그늘 누리고, 숲이 있어 열매를 즐겨야지요.
.. 지금쫌 / 노을 아래 있겠다. / 그 버려졌던 아이들 / 절뚝거리는 은행나무 / 포크레인에 하반신 찍힌 느티나무 / 왼팔 잘린 버즘나무 / 길바닥에서 주워다 기른 / 신갈나무, 팥배나무, 홍단풍 .. (나무고아원 1)
최문자 님 시집 《나무고아원》(세계사,2003)을 읽습니다. 외톨뱅이로 태어나는 나무는 없지만, 도시사람은 나무를 외톨뱅이 되도록 닦달합니다. 외돌토리가 되고픈 나무는 없지만, 도시사람은 나무를 외돌토리가 되도록 들볶습니다.
나무를 껴안지 않으며 살아가는 도시사람은 나무가 얼마나 아파 하거나 슬퍼 하는가를 못 느낍니다. 나무를 곁에 두며 살아가지 않는 도시사람은 나무가 얼마나 사랑스럽거나 믿음직한가를 모릅니다.
나무를 볼 줄 모르기에 나무를 노래하지 못하는 도시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시골사람은 나무를 노래할까요. 시골 군·읍·면에서 펼치는 교육이나 문화 정책을 들여다보면, 시골에서 태어난 아이를 하루빨리 도시로 보내어 돈 더 잘 벌 만한 회사원이 되도록 길들이려 할 뿐, 시골아이 스스로 나무를 아끼거나 사랑할 숲아이가 되도록 가르치거나 이끌지 않아요.
시골아이가 시골아이답게 숲아이로 크지 못합니다. 도시아이 또한 도시아이답게 씩씩한 숲사랑을 키우지 못합니다.
.. 개발한답시고 / 생땅 갈아엎을 때 / 풀들은 뼈도 못 추리고 / 인부들은 아이 밴 나무까지 / 아스팔트 바닥으로 휙휙 집어던졌다. / 터져버린 살, 꽃, 태아 / 삐약거리는 진달래 죽지 않는 나무는 / 결코 살고 싶지 않은 곳으로 / 손목 잡혀 왔다 .. (나무고아원 2)
아이들 손에 손전화라 하는 기계를 쥐어 줄 때에, 이 아이들은 무엇을 바라볼까요. 아이들 손에 교과서와 참고서를 쥐어 줄 때에, 이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아이들 손에 컴퓨터와 텔레비전을 쥐어 줄 때에, 아이들 손에 자동차와 아파트 열쇠를 쥐어 줄 때에, 또 아이들 손에 극장표와 도서상품권을 쥐어 줄 때에, 이 아이들은 어떤 삶을 누릴까요.
아이들 손에 나뭇잎 하나 들리기를 꿈꿉니다. 아이들 손에 나뭇가지 하나 들리기를 꿈꿉니다. 아이들 손에 나뭇줄기 따사로운 기운 스미기를 꿈꿉니다. 아이들 손에 푸른 잎사귀 푸른 기운 감돌기를 꿈꿉니다. 아이들 손에 싱그러이 노래하는 숲속 작은 새들 이야기 한 자락 내려앉을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5.12.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