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책읽기
하느님은 예배당에 없다. 예배당에는 예배당만 있을 뿐이다. 숲에는 숲이 있지, 숲 말고 다른 것이 없다. 다만, 요즈음 숲에는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있다. 자가용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자가용 창문을 열고 휙휙 쓰레기를 던지기 일쑤라, 시골 들판을 걷거나 자전거로 지나가다 보면 곳곳에서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 버렸구나’ 싶은 쓰레기를 본다.
하느님은 성경책에 없다. 성경책에는 성경책만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바라보면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을 느끼고 싶으면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살며시 껴안으면 된다. 어린이 마음을 다루는 책이라든지, 어린이 몸짓을 살피는 방송이라든지, 어린이한테 무엇무엇 가르친다는 교재를 들여다본대서 아이들을 느낄 수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 다른 어떤 지식이나 정보로 다룰 수 없다.
하느님은 십자가에 없다. 십자가에는 십자가만 있을 뿐이다. 정치권력자는 전쟁영웅한테 훈장을 주고, 무슨무슨 훌륭한 일을 했다는 사람한테 훈장을 준다. 그러면 전쟁영웅이란 무엇인가. 이 나라에서는 전쟁영웅인 그이가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될까. 베트남전쟁 영웅은 어떤 사람일까. 한국전쟁 영웅은 어떤 사람일까. 베트남사람은 한국사람 총에 맞아 죽어도 될 만한가. 괴뢰군이나 인민군이란 없다. 국군도 없고 미군도 없다. 모두 ‘여느 사람’이요 ‘여느 아버지’요 ‘여느 어버이’일 뿐이다. 군인옷을 입었고 멀찍이 떨어졌기에 못 알아챌 뿐, 전쟁영웅이 죽인 적군이란 바로 내 이웃집 아저씨이거나 내 오래된 동무이곤 하다. 문화영웅이나 교육영웅이나 스포츠영웅이란 무엇일까. 십자가에는 십자가만 있듯, 훈장에는 훈장만 있다. 사람을 옭아매는 굴레만 있다.
하느님은 하늘에 없다. 하느님은 바다에도 땅에도 어디에도 없다. 하느님이 있는 곳은 오직 내 마음속이다. 못 믿겠으면 내 마음을 읽으면 된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 노예교육에다가, 이에 앞서 유치원이니 어린이집이니 유아원이니 보육원이니 하는 여덟 해 바보교육에다가, 나중에는 대학교이니 대학원이니 유학이니 하는 쳇바퀴교육에 허덕이면서, 갓난쟁이일 적부터 서른이 넘을 무렵까지 ‘내 마음속 스스로 들여다보기’를 할 겨를이 없다. 그나마 틈틈이 혼자 여행이라도 다니면 조금이나마 ‘내 마음속 조용히 돌아보기’를 할 텐데, 여행길에 나서면서 느긋하거나 너그러운 마음이 되는 사람은 뜻밖에 퍽 드물다.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하느님인 줄 아무도 모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이녁 마음읽기를 못 한다.
가만히 마음을 다스리며 생각을 기울여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웃으면 내 아이가 웃고, 내 옆지기가 웃으며, 내 이웃이 웃는다. 익살꾼이 웃겨야 웃지 않는다. 가벼운 내 웃음 한 자락이 훨훨 퍼진다. 내가 찡그리면 내 아이도 내 옆지기도 내 이웃도 몽땅 찡그린다. 내가 사랑스레 활짝 웃으면, 내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웃음꽃이 피어나며 둘레 사람들 마음이 따뜻해진다. 왜 그럴까? 왜 그런지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 몹시 사랑스러운 웃음을 흘리거나 나누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 곁에서는 마치 ‘빛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들 하는데, 참말 빛이 나니까 빛이 난다고 느낀다. 왜 그럴까? 왜 환한 사랑 꽃피우는 사람한테서는 빛이 날까?
생각해야 한다. 느껴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하느님이라서, 저마다 다른 하느님이 저마다 어떤 마음이 되고 어떤 생각이 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이 지구별이 달라진다. 하느님은 예배당에도 성경책에도 십자가에도 없다. 하느님은 바로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기에, 모든 사람이 스스로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려 하느냐에 따라 지구별 목숨이 달라진다. 아주 작은 한 사람이 스스로 삶을 바꾸어 도시를 떠나면 도시도 살고 시골도 산다. ‘도시에 한 사람 자리가 비어’서 도시가 살지 않는다. 도시는 이대로는 몽땅 무너지고 둘레 시골마저 망가뜨린다. 그래서 이런 슬픈 굴레를 깨닫고 도시를 떠나 시골살이를 하겠다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이 한 사람 기운이 도시를 따스히 보듬고 시골 또한 살가이 쓰다듬기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살아날 수 있고, 지구별이 숨쉴 수 있다.
이 나라 한국이 안 무너지고 버티는 까닭은 삼성이나 에스케이나 무슨무슨 재벌이 수출을 많이 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나라 한국이 안 무너지고 버티는 까닭은 ‘어린이와 젊은이 모두 떠난 시골’에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씩씩하게 남아서 식량자급율 20%를 지켜 주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날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농약 많이 쓰고, 풀 한 포기 그대로 건사하지 않지만, 시골에서 숲을 사랑하고 곡식을 거두는 따순 손길이 있기에, 이 손길 힘을 받아 한국이라는 나라 하나 버틸 수 있다.
잘 생각해야 한다. 이제 시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시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야 한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도시사람은 ‘쌀조차 다른 나라에서 사다 먹어’야 한다. 아직은 그나마 ‘농약 가득 서린 쌀’이라 하더라도, 이 나라 쌀을 먹지만, 앞으로는 이 나라 값싼 쌀조차 못 먹고, 다른 나라에서 비싸게 사다 먹어야 한다. 곡물재벌이나 씨앗재벌 금고를 두둑히 채우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이 나라 사람들 모든 삶이 얽매이면서 흔들리고 만다.
사람이 살자면, 시골에서 살아야 마땅하지만, 도시에서 살더라도 사람다움을 건사하고 싶다면, 하느님이 어디에 있는지 깨우쳐야 한다. 스스로 깨우치도록 마음을 닦고 다스리며 아껴야 한다. 시골사람은 누구나, 그러니까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구나 당신 스스로 하느님인 줄 안다. 당신 스스로 ‘하느님이 내려준 선물 같은 손과 발’로 흙을 만지는 줄 안다.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 되어 흙을 만지고 풀을 만지면서 목숨을 일구는 줄 안다. 도시사람은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직 씩씩하게 살아서 흙을 만지는 동안 하루 빨리 ‘내 마음을 읽어 하느님 찾는’ 일을 해야 한다. 예배당 아닌, 성경책 아닌, 십자가 아닌, 바로 내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을 찾아, 저마다 하루를 어떻게 빚고 하루를 어떻게 누리며 하루를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아름다운가를 깨달아야 한다.
내 웃음 하나가 퍼져 온누리를 밝힌다. 내 비아냥이나 짜증이 퍼져 온누리를 어둡게 한다. 내 사랑으로 온누리를 따스히 돌본다. 내 거친 말과 막된 몸짓으로 온누리를 뒤흔든다. (4345.1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