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책 아나스타시아 6
블라지미르 메그레 지음, 한병석 옮김 / 한글샘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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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으로 아로새겨 즐기는 책
 [환경책 읽기 40] 블라지미르 메그레, 《아나스타시아 (6) 가문의 책》

 


- 책이름 : 아나스타시아 (6) 가문의 책
- 글 : 블라지미르 메그레
- 옮긴이 : 한병석
- 펴낸곳 : 한글샘 (2011.2.9.)
- 책값 : 12000원

 


  (1) 마을살이


  비오는 가을 새벽입니다. 때때로 멀디먼 곳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아스라히 들립니다. 가을 내내 듣던 풀벌레 노랫소리와 멧새 노랫소리는 빗물에 감겨 안 들립니다. 그예 들이붓는 빗줄기 아니라 사이사이 가만히 쉬는 가을비입니다. 빗소리 똑 끊길 즈음 멧새 한 마리 우리 집 뒤뜰로 찾아들어 삑삑삑삑 하며 노래하고 지나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비가 그친 가을밤을 맞이합니다. 아이들과 천천히 논둑길을 걷습니다. 저기 가까운 숲에서 밤새 노래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쇳쇳쇠 쇳쇳쇠 노래하는 새는 깊은 밤에 무슨 이야기 실어 나긋나긋 소리를 밝힐까 궁금합니다. 조용한 마을에 가느다란 새소리 울려퍼집니다. 가느다란 새소리는 집집을 돌며 달빛 어린 꿈을 나누어 줍니다.


  가을이 흐릅니다. 밤에는 제법 선선하거나 쌀쌀하다 싶지만, 낮에는 따사로운 가을이 흐릅니다. 가을걷이 마친 논은 목아지 잘린 볏포기만 남습니다. 볏짚 동그랗게 마는 기계가 지나간 논은 커다란 짚더미가 군데군데 놓입니다. 가장 늦게 심어 가장 늦게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논은 아직 누런 알맹이가 바람에 살살 날립니다. 이제 시골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아, 예전처럼 바쁘게 벼베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벼를 심습니다. 벼를 베어 논을 얼마쯤 묵히고 나서는 집집마다 두레를 하며 논에 마늘을 심습니다. 일손이 모두 할머니나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서로 쉬엄쉬엄 두레를 하며 마늘을 심느라, 벼베기도 찬찬히, 마늘심기도 찬찬히, 날을 달리하며 일손을 놀립니다. 이렇게 해야 나중에 마늘을 뽑고 엮고 나를 적에도 두레를 할 수 있습니다.


.. 아이는 자라서 학교에 간다. 그런데 삶의 의미나 사람의 소명 혹은 그냥 그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없거나 그런 대화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가 되지 않았거나 앞으로 그럴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으나, 결국은 그럴 시간을 놓치고 만다. 아이는 어른이 되니까. 그런데 우리 자신이 자기 아이들과 심각히 얘기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누가 아이들을 교육한단 말인가 … 사람은 모두 자신에 대한 진리를 깨달아야 해. 진리가 없다면, 거짓 전제 속에서 삶은 최면과 비슷한 거야 … 아이는 거짓으로 왜곡되지 않은 인류의 온 역사를 알아야 해 … 아버지가 말씀하신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나요? 아이들이 크는 동안 트랙터는 망가져요. 자동차는 녹슬고 집은 낡지요 … 부모라면 모두 반드시 깊이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 오직 스스로 ..  (9∼10, 150, 152, 208∼209, 276쪽)


  이웃마을 이장님이 새벽방송을 합니다. 군청에서 ‘경관 사업’을 한다며 유채씨앗을 나누어 주는데, 그냥 되는대로 뿌리지 말고 제대로 트랙터로 갈아엎어 고랑을 만들어 살뜰히 심는 한편 비료도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웃마을을 비롯해 우리 마을과 옆마을까지 다 함께 ‘유채씨 심는 경관 사업’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다음해에는 다른 마을로 이 사업이 넘어가니까, 허술하게 하지 말라는 얘기를 아주 길게 늘어놓습니다.


  군에서는 유채씨 심어 봄날 노란 꽃물결 넘실거리도록 하는 일을 맡기며 시골집마다 돈을 얼마씩 줄까요. 들판에 노란 유채꽃 물결지는 모습은 누구 보라고 만드는 일일까요.


  시골 분들 누구나 알 텐데, 굳이 유채씨를 뿌리지 않더라도 빈 들판에서는 온갖 풀꽃이 마음대로 피고 집니다. 꼭 노란 꽃물결이 넘실거려야 하지 않아요. 노란 꽃물결을 이루어야 예쁜 마을이 되지 않아요.


  들판에 자운영 바알간 꽃물결이 넘실거려도 어여쁩니다. 봄까지꽃이라든지 돗나물꽃이 넘실거려도 어여쁩니다. 이 꽃 저 꽃 뒤섞여 봄꽃이 넘실거려도 어여쁩니다.


  아니, 굳이 어떤 씨앗을 따로 심으면서 비료까지 주어야 할까 궁금해요. 겨우내 봄내 얼마쯤이라도 논흙도 쉬면서 새 기운을 북돋우도록 놓아 주어야지 싶어요.


.. 병들고 불행한 사회에서는 오직 병들고 불행한 아이들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 … 남자는 아이를 낳을 목적으로 여자를 가까이해야 하고, 태어날 아이를 상상하고, 아이의 탄생을 소망하는 순간이어야 합니다 … 종이 쪽지로 조건 지어진 혼인이란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그건 단지 사회가 고안해낸 조건일 뿐입니다 … 참사람은 함께 지음에 있어 오직 사람한테만 내재하는 사랑, 앞일을 예견하는 능력, 지음에 대한 인식 등등의 에너지와 감정이 참여할 때에만 태어날 수 있습니다 … 사람의 출생의 시점을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이라 해야 더 정확할까요? 생리적 입장에서 볼 때, 이때가 좀더 정확한 출생의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정자와 난자의 만남은 원인이 아닌 결과인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 두 사람의 생각이 있었지요. 출생일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  (11, 20, 25, 29, 34∼35쪽)


  가을바람을 누립니다. 갑작스레 찬바람이 분다고 호들갑 떠는 사람도 있으나, 늦가을이니 찬바람이 불기 마련이에요. 이제 곧 겨울이 찾아오니 찬바람이 찾아들 만해요. 그러나, 새벽이나 밤에는 찬바람이라 하더라도 아침해가 활짝 웃음 띄며 찾아올 적부터 뉘엿뉘엿 해가 기울며 노을 지는 저녁까지는 따순바람인걸요.


  가을바람은 가을날 가을들을 살살 쓰다듬습니다. 겨울에 부는 겨울바람은 겨울녘 겨울멧골을 휘휘 저으며 춤춥니다. 봄에 부는 봄바람은 우리 아이들 머리카락을 슬슬 간질이며 노래노래와 함께 찾아듭니다. 여름에 부는 여름바람은 내 마음 곁에서 시원하게 감돌면서 하늘을 누리고 바다를 즐기며 흙을 사랑하는 손길을 속삭입니다.


  별을 바라봅니다. 시골집에서는 쏟아지는 밤별을 누립니다. 도시로 볼일을 보러 나올 적에는 아주 흐릿흐릿 가물거리는 별 몇 겨우 찾습니다. 도시사람은 밤에 별도 못 보면 무슨 즐거움을 누리나 싶지만, 정작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별을 헤아리지 않아요. 별을 헤아리지 않으니 별을 누리는 즐거움을 몰라요. 다른 데에서 즐거움을 찾거든요. 나는 밤마다 별을 헤아리는 즐거움을 누리니까, 시골집에 있든 도시로 볼일 보러 나오든 언제나 고개를 치켜들어요. 하늘로 두 팔을 번쩍 올려요. 아, 별아, 별아, 내 목소리 들리니?


  아이들을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이곳저곳 천천히 마실을 다니다가도 한 팔을 쫙 벌리며 바람이랑 속닥속닥 이야기꽃 피웁니다. 아, 바람아, 바람아, 내 노래가 들리니? 그러면 수레에 탄 아이들도 팔을 쫙 벌리며 아버지를 따라합니다. 야, 바람아, 바람아, 내 노래 듣니?


  새들 노랫소리를 봄부터 겨울까지 듣습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 따라, 새들 노랫소리는 다릅니다. 마땅하지요. 철과 날이 다른걸요. 참새는 짹짹 비둘기는 구구 노래한다고들 하지만, 참새 곁에 가만히 서서 참새 노랫소리를 들어 봐요. 멧비둘기 들판에 내려앉아 나락을 훑으려 할 적에 둘레에 조용히 서서 멧비둘기 노랫소리를 들어 봐요. 어느 참새도 ‘짹짹’거리지 않고, 어느 멧비둘기도 ‘구구’거리지 않아요.


.. 고급 슈퍼마켓에서도 품질이 좋은 식품을 구할 수 없습니다 … 산모에게는 자신이 익숙한 장소와 환경에서 출산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갓난아기한테는 더욱 그러하겠죠 … 이 사람들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누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그러면 종이쪽지, 돈을 준대요. 나중에 이 돈을 음식과 바꾸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달리 사는 방법을 모르고, 삶에 기뻐하는 걸 잊어버렸대요 … 공동묘지는 누구에게도 필요가 없어진, 고인의 생명이 없는 몸을 갖다 버리는 쓰레기 하치장 같은 것이란다.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가 벌어지는 곳이라서 사람들이 공동묘지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한다 …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계절을 따라 일정 순서에 의해 다양한 식물들의 열매가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니야 … 신성한 자연에서는 아무것도 어디로도 그냥 사라지지 않아. 다만 그 상태와 육을 바꾸는 것일 뿐이야 ..  (32, 36, 50, 96, 157, 165쪽)


  물을 마실 때마다 물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물을 가만히 바라보며 살짝 한 마디 합니다. 고마워, 좋아, 내 몸으로 들어와 내가 되어 주렴.


  나는 물이 됩니다. 내 몸으로 들어온 물은 내가 됩니다. 나는 물을 마시면서 이 물방울이 어느 골짜기를 흐르다가 나한테 찾아왔는가 읽습니다. 골짜기를 흐르며 부딪힌 돌멩이를 떠올리고, 시냇물 되어 흐를 적에 어느 물고기 아가미를 거치다가 어느 가재를 만나고 어느 낚싯바늘을 건드리다가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 구름을 이루고, 빗방울 되어 하늘을 싱싱 날아 어느 밭뙈기 푸성귀 잎사귀를 톡 건드리고는 흙으로 스며들어 잎 하나 더 푸르게 북돋았을까 하고 그림을 그립니다. 물방울은 푸성귀 잎사귀를 한껏 푸르게 북돋우고는 다시 하늘로 나와 살살 피어나는 아지랑이 되어 또 구름이 됩니다. 또 빗방울이 되고 또 땅으로 내려오는데, 숲속 잣나무 뿌리로 스며들고, 또 구름 되어 또 빗방울 되어 땅으로 내려오다가는 내 물잔에 담기는 물방울이 되어요.


  물방울은 내 몸으로 스며들어 내가 되었다가는 땀이나 오줌으로 흘러나옵니다. 때로는 내 살결 구멍을 거쳐 살살 빠져나와 아지랑이처럼 훨훨 하늘로 올라가 새롭게 구름이 되어요. 참말 끝없이 나들이와 마실을 누리는 물방울이에요.

  내가 마시던 물은 내 아이들이 마시는 물이 됩니다. 내 아이들이 마시는 물은 할머니가 마시는 물이 됩니다. 할머니가 마시는 물은 저기 청와대에서 일하는 사람들 마시는 물이 되고, 이분들 마시던 물은 저기 광양제철소 일꾼이 마시는 물이 됩니다.


  물방울은 지구별을 끝없이 돌아다닙니다. 바람 또한 지구별 구석구석 끝없이 돌아다닙니다. 서로 하늘에서 만나 속삭입니다. 넌 어디 다녀왔니? 넌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니? 너는 누구 몸에 들어가 보았니?


  물방울이 내 몸으로 스며들듯, 바람은 내 콧구멍과 입을 거쳐 내 허파로 들어옵니다. 허파에서는 핏줄을 타고 몸 구석구석 빙빙 돕니다. 그러고는 새삼스레 내 콧구멍이나 입으로 빠져나와요. 때로는 내 살결 구멍을 타고 살그마니 빠져나오겠지요.


.. 우리는 이 공간에 사랑을 간직할 거예요 … 내겐 엄마 아나스타시아가 최고로 가깝고 좋아요. 꽃보다 구름보다 아름다워요. 엄마는 아주 재미있어요. 명랑해요. 항상 계셨으면 좋겠어요 …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이고, 우리 주위의 세상이 그가 지은 것이라면, 당연히 부모의 가장 큰 소원은 자기 자식이 사려 깊은 삶을 사는 것, 자식들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짓는 것이다 … 사람이 오늘 높은 곳에서 현대의 도시를 조망한다면, 무엇이 보일까? 엄청난 인공의 돌더미가 땅을 덮고 있어. 높이로, 그리고 넓이로 집들이 자라나. 여기저기 점점 더 넓은 공간을 돌 풍경이 가로막아. 그곳에 깨끗한 물은 없고 공기는 오염되었어. 그 엄청난 돌 무더기 속에서 행복한 가정은 얼마나 되지 ..  (75, 85, 103, 167쪽)


  사람들은 으레 비행기를 타고 먼먼 나라로 찾아가야 ‘여행’이라고 여깁니다. 참말, 비행기 나들이도 여행이 되겠지요. 배를 타도 여행이 될 테고, 자가용 몰아 고속도로 달려도 여행이 돼요.


  그런데, 돈을 들여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고 어느 집에 묵으며 하룻밤 보내야 여행일까 모르겠어요. 참말 마실이나 나들이란, 이렇게 지도에서 어디를 콕콕 찍어야 마실이나 나들이가 될까 궁금해요.


  고요히 눈을 감아 봅니다. 물방울이 돌아다니며 흐르는 길을 생각합니다. 바람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불다가 내 숨결이 되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와 온누리를 불고 돌아다니는가 그립니다. 햇살은 어느 곳을 얼마나 따사로이 비추는가를 헤아립니다.


  나는 몸을 움직이는 마실과 나들이도 하지만, 마음으로 온 데 온 곳 온 자리 돌아다니는 마실과 나들이도 합니다. 내 몸속 핏줄을 타고 돌아다니면서도 마실입니다. 내 머릿속 세포 하나하나 열면서 별빛과 달빛을 떠올리면서도 나들이입니다.


  가을잎이 집니다. 가을잎은 시골에서는 흙땅에 떨어져 천천히 삭으며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으로 돌아간 가을잎은 나무뿌리가 받아들여 새롭게 푸른잎으로 태어납니다. 또는 다른 풀씨와 섞이며 풀줄기가 됩니다. 도시에서는 가을잎이 돌아갈 흙이 없어 그만 비닐봉투에 담겨 쓰레기처럼 버려집니다. 뭉텅이 뭉텅이 잎사귀봉지를 담은 쓰레기차는 어디론가 갑니다. 어디로 갈까요?


  종이 한 장을 꺼냅니다. 아니, 종이 한 장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됩니다. 시골에서는 따로 수첩이나 공책을 펼쳐야 하지만, 도시에서는 길을 조금만 걸어도 온갖 종이가 바람에 날려 뒹굴어요.


  아무 종이라도 좋기에 아무 종이라도 줍습니다. 이 종이 한 장은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를 돌아다니다가 나한테 왔을까 생각합니다. 너는 어디에서 어떤 나무로 자라며 살다가 이런 광고종이가 되었니? 너는 어디에서 어떤 바람과 햇살을 누리는 나무로 살다가 이런 쪽종이가 되었니?


  나는 어느 종이라 하더라도 허투루 다루지 못합니다. 모든 종이는 나무에서 태어나거든요. 어떠한 종이라 하든 숲을 이루던 아름드리 나무였어요. 종이는 모두 숲바람을 일으키고 숲내음을 날리며 숲사랑을 펼쳐 주었어요. 이 나무들은 종이로 바뀌어 우리한테 찾아와요. 시골에는 숲이 있고 흙이 있으며 나무가 있기에, 굳이 종이가 없어도 되는데, 도시에는 숲도 흙도 나무도 없으니 종이라도 곳곳에 흩날리면서 사람들한테 ‘숲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요.

 


  (2) 살림살이


  밥을 짓습니다. 우리 집 식구들 먹을 밥을 짓습니다. 밥을 짓는 데에 퍽 긴 겨를을 들입니다. 밥을 짓는 동안 조용히 생각에 잠기며 몸을 움직입니다. 쌀을 불리고 버섯을 불리며 다시마를 불립니다. 흐르는 물을 받아 밥을 안치고 국을 끓입니다. 소금으로 간을 본 다음 된장을 살짝 풉니다. 아이들이 맛나게 밥과 국을 먹습니다. 옆지기가 맛있께 밥과 국을 먹습니다. 따로 입을 열어 말하지 않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사랑이 샘솟습니다. 맛나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배가 부릅니다. 맛있게 먹는 매무새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부릅니다.


  옛사람이 왜 스스로 논을 돌보아 나락을 거두고는, 끼니마다 절구질을 해서 겨를 벗기고 돌을 인 다음, 가마솥에 물을 담아 장작으로 불을 때어 밥을 지었나 하는 몸짓을 깨닫습니다. 물도 그냥 물이 아니에요. 새벽 일찍 별바라기 하면서 우물가나 냇가에서 길은 물이에요. 참말 옛사람 밥하기를 헤아리면, 밥 한 그릇 먹자고 한두 시간 서너 시간 가벼이 써요. 밥 한 그릇 먹을 때에 한 시간 즈음 넉넉히 들여요.


  밥을 지으며 사랑을 지으니까요. 밥을 먹으며 사랑을 먹으니까요.


.. 그녀(아나스타시아)는 자신의 목숨으로 당신의 책을 지은 거예요. 사람들에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지식을 나눠 주면서요 … 스스로 판단해 보세요. 선생이 이런저런 책을,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다고 칩시다. 그것이 정말 선생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나요 … 나는 매일매일 다른 책을 읽어요. 그 책은 글자가 훨씬 즐겁고 다양해요 … 나는 가지각색의 즐거운 글자들이 좋아요. 이건 평생 읽을 수 있어요. 거기에는 모든 것에 대해 적혀 있어요 … 아이는 온갖 식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마디마디 읽기를 계속했다 …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고, 다른 누가 아닌 자기의 아이들을 위해 쓰기 시작하면 사원의 지식 모두가 그들 안에서 환해질 거야 ..  (16, 41, 60, 63, 65, 270쪽)


  옷을 짓습니다. 나한테는 풀줄기를 갈무리해서 실을 얻는 재주가 없다지만, 이웃한테서 옷 한 벌 얻는다지만, 나는 날마다 손으로 빨래를 하면서 옷을 짓습니다.


  내 손길이 닿으며 때와 먼지가 빠지는 옷을 해바라기하는 마당에 차곡차곡 넙니다. 옷가지는 햇살을 머금으며 보송보송 마릅니다.


  식구들 입던 옷가지를 두 손으로 조몰딱조몰딱 주무르면서 빙그레 웃습니다. 내 손가락 사이사이 사랑이 새어나와 옷가지마다 새롭게 스며듭니다. 햇살은 따순 사랑으로 빨래를 말려 줍니다. 잘 마른 옷을 다시 내 손가락 조물조물 움직여 갭니다. 옷을 빨고 말리고 개고 하면서 내 사랑이 옷에 스며들어요. 이 옷을 입는 살붙이는 ‘옷만 입’지 않아요. 사랑을 입어요.


  옷을 지으며 사랑을 짓거든요. 옷을 입으며 사랑을 입거든요.


.. 지구에, 인류사회에 생각과 느낌의 문화, 그리고 사고가 충분히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경우, 실수가 발생한 거야 … 사람의 소명은, 주위의 모두를 깨닫고 우주에 훌륭함을 짓는 것이야. 지구를 닮은 것을 다른 은하계에 짓는 거야. 그리고 새 세상 모두에게 지은 훌륭한 창작을, 지구에 더하는 거야 … 산 사람한테 훌륭함을 지으려는 열정이 있을 때, 사람에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고, 훌륭한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 단 한 가지 생각만으로 달에 꽃을 키울 수 있고, 사람한테 필요한 대기를 짓고, 동산을 조성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그 동산에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전에 생각은 온 지구를 꽃피는 낙원 동산으로 바꾸어 놓아야 해. 그건 집단 생각으로 할 수 있어 ..  (111, 119, 137, 170∼171쪽)


  집을 짓습니다. 내 살림돈은 아직 많이 모자라 땅 살 돈 나무기둥 올릴 돈 흙벽 쌓을 돈 구들 놓을 돈은 없어요. 그러나 나는 날마다 집을 짓습니다. 빗자루 들고 비질을 하면서 집을 지어요. 걸레를 들어 방바닥을 훔치면서 집을 지어요. 저녁나절 작은아이 오줌바지 똥바지 새롭게 빨래해서 방 곳곳에 옷걸이를 꿰어 널면서 집을 지어요. 밥상을 차리며 집을 짓고, 식구들 나란히 둘러앉으며 집을 지어요.


  곰곰이 돌아보면, 온 식구가 서로 집을 짓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마음을 기울여 집을 짓습니다.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마음을 쏟아 집을 짓습니다.


  우지끈 뚝딱 시멘트를 들이부어야 집짓기이지 않아요. 살붙이 다 함께 환하게 웃고 떠들며 놀다가 새근새근 잠드는 보금자리를 누리는 하루가 고스란히 집짓기예요. 사랑을 담아 집을 지어요. 사랑을 담아 보금자리를 즐겨요. 사랑을 담아 하루를 누리는 동안 시나브로 삶이 태어나요.


.. 통일이라면 무슨 통일을 역사가들은 말하는 것일까? 사실은 모든 게 간단해. 한 제후가 다른 제후들을 죽이거나 정복한 것이지.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건 문화, 삶의 양식뿐이야 … 돈이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 생가하지? 환상이야. 진실된 사랑을, 엄마의 감정을, 태어난 곳, 스스로 길러낸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열매의 맛을 돈으로 산 사람은 아무도 없어 … 부산함 속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지는 정보가 점점 줄어들어도 이를 눈치채지 못해. 지금 모든 인류가 애써 가고 있는 길이 옳은 것인가? 이 하나의 질문, 주제에 대해서는 점점 더 금기가 준엄해지고 있어 … 악을 악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우치지 못한 거야 … 세뇌! 텔레비전에서는 폭력영화를 내내 보여준다. 대중의 오락을 위한 것 같지만, 정작 보여주는 것은 폭력을 쓰면 아주 잘살 수 있다는 것다 ..  (212, 219, 226, 246, 274쪽)


  블라지미르 메그레 님이 아나스타시아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아나스타시아 (6) 가문의 책》(한글샘,2011)을 읽습니다. 메그레와 아나스타시아 둘은 《가문의 책》이라는 종이책 하나를 함께 쓰면서 ‘두 집안 이야기’를 적바림해서 둘이 사랑으로 낳은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그래요. 누구나 책을 써요. 어버이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책을 써서 아이한테 물려주어요.


  누군가는 붓을 들어 글을 쓴 다음 종이책을 남깁니다. 누군가는 낫과 쟁기를 들어 흙을 일구면서 ‘흙책’을 남깁니다. 누군가는 칼과 도마를 들어 부엌살림을 하면서 ‘살림책’을 남깁니다.

  누군가는 ‘바다책’을 남기겠지요. 누군가는 ‘하늘책’을 남기고, ‘숲책’을 남기며, ‘들책’을 남겨요.


  나는 두 아이 아버지로서 어떤 책을 써서 남길 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짓고 내 사랑을 얼마나 지으면서 아이들과 즐거이 나눌 ‘삶책’ 하나 빚을 만한가 그려 봅니다.


..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자기 차가 공기를 어떤 유독가스로 오염시키는지 정말 모를까 … 대도시의 생활양식은 사람을 멸살하고, 사람이 자연스런 공간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하도록 맞추어져 있어.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 대부분도 테러리즘의 방조자야 …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자기 주위에 사랑의 공간을 지은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없어 … 당신은 그걸 믿어야 해. 그리고 마음속으로 좋은 상황을 모델링해야 해. 그러면 그것은 현실이 돼 … 스스로 밝히지 못한 건,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주입되는 걸 진리인 양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해. 나 가야겠어, 블라지미르, 당신 많은 부분에서 옳아. 하지만 현실을 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사람들을 통솔하고픈 욕망에 빠지질 않길 바랄게. 유혹을 이기고 어떤 조직에도 가담하지 마 ..  (244, 261, 266, 277, 289쪽)


  내 어머니한테서 ‘어머니책’을 물려받습니다. 내 아버지한테서 ‘아버지책’을 물려받습니다.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살면서 ‘옆지기책’을 나란히 읽습니다. 두 아이를 만나 두 아이가 나날이 새롭게 짓는 ‘아이책’을 가만가만 읽습니다.


  마음으로 아로새기며 즐기는 책입니다. 마음으로 빚고 마음으로 쓰며 마음으로 나누는 책입니다.


  책은 책이지 베스트셀러가 아니며 스테디셀러가 아닙니다. 책은 삶이지 종이꾸러미가 아닙니다. 책은 사랑이기에, 어떤 줄거리가 아니에요. 책은 꿈이에요. 책은 비평이나 비판이나 서평 따위로 다룰 수 없어요. 꿈을 꾸듯 책을 읽고 삶을 읽으며 사랑을 읽어요. 내 삶을 책 하나로 담아 내 아이한테 남기고, 내 아이는 내 아이 삶을 사랑하면서 내 아이대로 책을 남겨요.


  살그머니 책을 덮습니다. 긴긴 마실을 다녔구나 생각하면서 책을 덮습니다. 책을 덮었으니, 이제 새롭게 마실을 다니자고 생각합니다. 두 팔 벌려 별을 안고 해를 안으면서 훨훨 날자고 생각합니다. 내 푸른 꿈을 하늘로 날리고, 내 바알간 사랑을 흙에 심습니다. (4345.1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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