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힘들면 연락해
김수미 지음 / 샘터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꿈꾸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책읽기 삶읽기 118] 김수미, 《얘들아, 힘들면 연락해!》(샘터,2009)

 


  시골집에 손님이 찾아옵니다. 여느 때에도 늘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에 차릴 밥을 이것저것 미리 손질해 놓지만, 손님이 찾아온 만큼 이모저모 더 마음을 써서 손질을 합니다. 집식구끼리 먹는 밥이라면 엊저녁 먹고 남은 찬밥이 있어도 아침에 그대로 먹지만, 손님이 온 만큼 아침밥은 달리 해야지 생각합니다. 어쨌든 따순 밥을 끓이고, 한편으로는 찬밥을 볶든지 지지든지 어떻게 끓이든지 할 생각입니다. 손님이 들고 온 먹을거리를 더 맛나게 먹자면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함께 찾아온 아이들은 도시내기라 풀밥 먹기가 익숙하지 않은데, 우리 식구 먹는 대로 풀을 밥상에 차리자면 힘들는지 몰라요. 그러면 이 아이들이 풀을 맛나게 먹도록 이끄는 길은 무엇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 나 자신 우울증과 빙의를 앓으면서 자살 직전까지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인생 후배들의 아픔에 누구보다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다. 개미는 바늘로만 찔러도 치명적이지만 코끼리에게는 그저 따끔할 뿐이다. 하지만 돌려 생각해 보자. 절벽에서 떨어지면 코끼리는 치명적이지만 개미는 끄떡없지 않은가?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세상 모든 개미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  (16쪽)


  동이 틉니다. 날이 밝습니다. 마을을 드나드는 멧새는 으레 우리 집 후박나무와 산초나무에 앉았다가 갑니다. 멧새와 들새는 우리 집뿐 아니라 이웃집에도 빠짐없이 들르지 싶습니다. 새를 쫓는 집은 없고 새를 미워하는 집은 없어요. 새들은 감나무에 앉아 감을 쪼아먹기도 하고, 후박나무 열매를 먹기도 했고, 후박씨를 먹든 산초열매를 먹든, 저희 마음껏 이 나무 저 나무에 앉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은 곱게 뽑는 목소리로 나긋나긋 새벽노래를 들려줍니다.


  아침에는 아침나절대로 아침노래를 듣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멧새와 들새가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을 이으며 들려주는 노랫소리가 다 다릅니다. 고운 결로 새삼스레 들려주는 노래입니다.


  하루 흐름으로 보자면 동이 트며 온 고을이 환하게 빛날 무렵 새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먹이를 찾으며 비비배배 노래한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르게 바라보자면, 새들이 이슬 내린 깃을 털고 힘차게 일어나서 비비배배 노래하기에 아침햇살이 새삼스레 우리한테 찾아온달 수 있습니다.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 누구나 아직 동이 안 튼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를 열기에, 이러한 숨결과 손길을 받으며 아침햇볕이 즐거이 찾아온달 수도 있어요.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새벽에 조용히 생각에 젖습니다. 아직 새근새근 자며 고단한 몸을 쉬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우리 아이들과 손님 아이들은 모두 저희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먹고 자랍니다. 사랑을 나누어 주는 어버이와 함께 살아가며 무럭무럭 자랍니다.


  나는 내 어버이가 베푸는 사랑을 받아먹고 자랐습니다. 나 혼자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라지 않았어요. 내 가슴속에서 샘솟는 사랑이 있어 내 자그마한 사랑이 내 어버이한테 새롭게 기운이 되기도 했을 테지만, 내 어버이가 나누어 주는 사랑이 있기에 내 작은 몸뚱이는 천천히 자랐어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큽니다. 이동안 아이들 나름대로 가슴속에서 사랑씨앗 살며시 심으며 저희 어버이한테 조그맣게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서로 주고받기에 사랑이요, 서로 나누기에 사랑입니다. 서로 즐겁게 웃는 사랑이고, 서로 기쁘게 북돋우는 사랑입니다.


.. 엄니는 매일 마당에서 꽃에 물을 주시면서 혼자서 구시렁구시렁 이야기를 하곤 하셨는데 내가 엄니를 꼭 닮았다. 집 안만이 아니었다. 끝이 안 보이는 깨밭에는 작은 주머니만 한 연보라색 깨꽃이 주렁주렁 열리고, 원두막 위에는 하얀 박꽃이 춤을 추고, 밭고랑 사이사이 노오란 호박꽃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밭에 올라가면 보리밭 사이에 몰래 심었다는 시뻘건 양귀비꽃도 보였다 ..  (65쪽)


  밥을 예쁘게 차려서 즐거이 먹은 다음 무얼 할까 헤아립니다. 마을 고샅을 살짝 걷다가 바다에 함께 갈까 싶습니다. 바다는 여름철에 물에 첨벙 뛰어들어도 재미나지만, 가을이나 겨울에 차디찬 바닷물에 살며시 손을 담그다가 모래밭에서 달리고 주저앉아 바람을 듬뿍 쐬어도 재미납니다.


  말없이 바라보아도 좋은 바닷바람입니다. 가만히 맞아들여도 기쁜 바닷햇살입니다. 들에서는 들바람과 들햇살을 누립니다. 멧골에 오르면 멧바람과 멧햇살 누립니다.


  이야기가 찾아옵니다. 한 올 두 올 이야기 실타래가 바람에 실려 나한테 찾아옵니다. 석 올 넉 올 이야기 꾸러미가 햇살 따라 아이들한테 찾아듭니다. 풀과 나무는 모두 바람과 햇살과 빗물과 눈송이를 받아먹고 자랍니다. 어른인 나도, 우리 아이들도, 손님 아이들도, 누구나 바람과 햇살과 빗물과 눈송이가 있기에 다부지게 하루를 열 수 있습니다.


  꼭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종이상자 하나가 놀잇감이 됩니다. 반드시 무얼 사야 하지 않습니다. 풀잎 하나 뜯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꼭 어딘가 가야 하지 않습니다. 내 조그마한 보금자리가 숲이 되어 집식구 사랑을 보듬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어떤 일을 해야 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꿈을 꾸어요. 내 모습을 꿈꾸고 내 얼굴을 꿈꾸어요. 따스하고 너그러운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로 하루를 빛낼 수 있는 내 삶을 꿈꾸어요.


.. 나는 주로 여성들 위주로 모인 강연에서, 나의 행동이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가 그것이 메아리처럼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고 이야기한다 ..  (239쪽)


  김수미 님 이야기책 《얘들아, 힘들면 연락해!》(샘터,2009)를 읽습니다. 김수미 님이 내놓는 이야기책은 한결같습니다. 늘 당신 살아온 이야기를 담습니다. 언제나 당신 하루를 글로 적바림합니다. 굳이 소설을 쓸 까닭이 없어요. 누구라도 스스로 이녁 삶을 적바림하면 글이고 소설이고 문학이고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야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아요. 내 삶을 찬찬히 살피면서 적바림할 때에도 이야기를 쓸 수 있어요.


  누가 나를 사랑해 주어야 내가 예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해 주었기에 내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지 않습니다. 아니, 꼭 입으로 말하거나 글로 적어야 사랑이 되지 않아요. “널 사랑해.” 하고 말할 적에 사랑이지 않아요. 삶을 함께 누리면 돼요. 함께 누리는 삶이 사랑이에요. 함께 나누는 밥그릇 하나가 사랑이에요. 김치 한 접시가 사랑이에요. 국 한 모금이 사랑이에요. 늘 마시는 바람 한 줄기가 사랑이에요. 나한테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한 그루가 사랑이에요. 구름 한 자락이 사랑이에요. 아침저녁으로 드리우는 노을이 사랑이에요. 풀벌레 한 마리 노랫가락이 사랑이에요. 빗물 한 방울이 사랑이에요.


  김수미 님은 꿈을 꿉니다. 꿈을 꾸기에 글을 씁니다. 김수미 님은 사랑을 합니다. 사랑을 하기에 김수님은 이녁 삶을 가장 꽃피울 만하다고 여긴 ‘연기’를 하면서 이녁 이웃과 동무한테 고운 사랑을 방긋방긋 웃음꽃으로 나누어 줍니다. (4345.10.29.달.ㅎㄲㅅㄱ)

 


― 얘들아, 힘들면 연락해! (김수미 글,샘터 펴냄,2009.6.15./12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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