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색잉꼬 4
테츠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살아가는 길
 [만화책 즐겨읽기 187] 데즈카 오사무, 《칠색 잉꼬 (4)》

 


  아주 고단한 날은 아이들이 기저귀에 쉬를 하거나 이불에 쉬를 누었어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주 고단한 날은 거의 없습니다. 언제나 아이들 칭얼대는 소리를 듣고, 쉬 마렵다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밤잠을 자건 낮잠을 자건, 집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봄이건 가을이건, 빗방울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밥을 하다가도 빨래를 개다가도, 어찌 되든 빗소리를 들으면 ‘마당에 치울 것 있나’ 생각하며 후다닥 밖으로 나갑니다.


  빗소리는 빗방울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로도 들리고, 집 안팎 바람결 달라지는 결로도 들립니다. 흔히 소리는 귀로 듣는다고 여기지만, 내 살갗도 소리를 듣고 내 머리카락도 소리를 듣습니다. 온몸으로 소리를 들어요.


  빛깔을 느낄 적에도 눈으로만 느끼지 않습니다. 손가락으로도 느끼고 코로도 느끼며 가슴으로도 느껴요.


  어떤 이야기 어떤 삶이라도 늘 온몸과 온마음이 함께 움직입니다. 밥알 하나를 씹으면서도 온몸이 느낍니다. 그릇 하나 설거지를 하면서도 온마음이 느낍니다. 나 스스로 즐겁게 무언가를 하면 온몸이 즐겁습니다. 나 스스로 힘겹게 무언가를 하면 온마음이 힘겨워요.


- “아버님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실 수가 있어. 태풍이나 쓰나미 정도 일으키시는 건 별것도 아냐. 나도 물을 솟구쳐 올리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아버님은 인간과 결혼하는 것을 절대 반대하셔. 그래서, 분명 태풍을 당신과 맞닥뜨리도록 하신 거야.” “뉴스에선 태풍의 중심이 바로 이 위를 통과할 거래. 도저히 보트론 이 섬을 나갈 수가 없어.” “괜찮아. 물의 정령인 내가 같이 있으니까.” “이봐, 상상 속의 얘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20∼21쪽)
- “무엇보다 우리 회사가 돈을 들여 극단을 만들 것을 제안한 건 내 아들이요. 말하자면, 귀여운 자식 놈이 즐거우리라 생각하고 극단을 만들어 준 셈이지.” (182쪽)


  깊은 밤에 둘째가 바지랑 기저귀가 옴팡 젖고 이부자리까지 적시도록 쉬를 눕니다. 웃도리까지 젖었기에 옷을 모두 갈아입힙니다. 둘째 아이는 옷을 다 갈아입히도록 잠에서 안 깹니다. 젖은 옷은 새벽에 빨래하자고 대야에 담급니다. 나도 쉬를 눌까 싶어 밖으로 나옵니다. 밤별을 헤아리며 쉬를 눕니다. 그런데, 오늘은 별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내 눈이 흐린가, 왜 별이 안 보이나.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아하, 구름이 짙게 끼어서 별이 없나 싶군요. 구름이 끼다니, 저녁까지만 하더라도 하늘에는 구름이 거의 한 점도 없었는걸. 설마 비구름일까 하고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옵니다. 이렇게 집으로 들어오고 나서 몇 분 안 지나 빗방울 소리를 듣고는 헐레벌떡 마당으로 다시 나와서, 아이들이 낮 동안 마당에 어질러 놓은 여러 가지를 치우고 빨래대를 처마 밑으로 옮기며 부산스레 움직입니다.


  아이들이 이불에 쉬를 눌 적에 ‘이 녀석 또 이불에 쉬를 했구나!’ 하고 말하다가는, ‘그래, 이불을 빨 때가 되었다는 뜻이니?’ 하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이불 빨래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 쉬를 해? 한 주도 안 되었는데 이불을 다시 빨라고?’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벌써 이불을 다시 빨 수는 없어. 다만, 이불을 자주 해바라기 시킬게.’ 하고 되뇝니다.


- “당신의 아이디어이긴 하나, 난 도저히 내키지가 않아.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다니!” “하지만 당신에겐 중요한 일이 있잖아요. 거기에 비하면 칠색잉꼬는 도둑인데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무명 배우예요. 죽는다고 한들 안타까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60쪽)
- “혀, 형사님! 무슨 일입니까. 순간 못 알아볼 뻔했네요.” “칠색잉꼬는 여기 없나요?” “요즘은 통 보이질 않는군요.” “그래요. 모처럼 이런 모습을 보여줄까 했더니.” “깜짝 놀랐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잉꼬랑 데이트 할 예정이었나?” (138쪽)

 

 

 

 


  내가 살아가는 길은 무엇일까 하고 돌아봅니다.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돌아봅니다. 나 스스로 얼마나 즐겁게 누리는 하루인가 하고 돌아봅니다.


  아이 앞에서 싱긋 웃는 내 얼굴이란 바로 나한테 싱긋 웃는 해님 같은 따스함입니다. 아이 앞에서 우락부락 찡그리는 내 얼굴이란 바로 나한테 우락부락 찡그리는 바보스러운 차가움입니다.


  나는 내 동무들을 바라보며 ‘너 참 예뻐졌구나!’ 하는 말을 할 때에 즐겁다고 느꼈습니다. 동무들이 누군가 고운 짝꿍을 사귀면서 한껏 예쁜 티가 물씬 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즐겁다고 느꼈습니다. 예나 이제나 ‘누가 누구를 사랑하면 스스로 예뻐지는 모습’이 그리 궁금하지 않았어요. 동무들이 다른 누구를 사랑한다 할 적에는 바로 ‘남을 사랑하는 내 동무’가 스스로를 예쁘게 다스리며 스스로 예쁘게 거듭나는 셈이니, 곧 스스로를 사랑해 스스로 사랑스레 다시 태어나는 노릇이에요.

  나도 나한테서 내 모습을 읽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언제나 맑게 노래하면서 활짝 웃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으레 어둡게 쫑알거리면서 이맛살을 찡그립니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가는 길이란 내가 사랑하는 길이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살아갈 길이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사랑하려는 길인가 하고 깨닫는 셈이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사랑할 곳을 찾지 못한다면 살아갈 곳을 찾지 못하는 노릇이겠지요. 사랑할 님을 그리지 못한다면 함께 살아갈 삶동무를 그리지 못하는 노릇이 될 테고요.


  이래저래 새벽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벌렁 드러눕다가 이내 벌떡 일어납니다. 무언가 한 가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부엌으로 가서 불을 켭니다. 그릇에 쌀을 담습니다. 물을 받아 쌀을 헹굽니다. 이제 쌀을 불립니다. 아침에 먹을 밥을 떠올리니, 엊저녁에 쌀을 안 불려 놓았구나 싶어, 부랴부랴 새벽에 잠을 설치듯 쫓고는 쌀씻기를 합니다. 우리 식구가 흰쌀밥을 먹는다면 굳이 한나절 쌀을 불리는 일을 안 해도 되지만, 누런쌀밥을 먹는 삶이니 반드시 한나절 쌀을 불려야 해요.


  밥을 할 때마다 느끼는데, 누런쌀은 더 오래 불릴수록 더 맛납니다. 그렇다고 이틀이나 사흘을 불리면 안 되지요. 내 느낌으로는 열여섯 시간쯤 불리고 나서 짓는 누런쌀밥이 참 맛있구나 싶어요. 누런쌀 씨눈이 열리고 알맹이가 한껏 부풀면서 고소한 내음이 퍼진달까요.


  더 헤아린다면, 쌀을 불리기 앞서, 이 쌀알을 방아를 찧어 겨를 벗겨 곧바로 불리면 훨씬 맛나리라 느껴요. 아주 마땅한 노릇일 텐데, 그리 멀잖은 옛날 우리 어머님들은 끼니마다 방아를 찧고 쌀을 불렸어요. 미리 방아를 잔뜩 찧어서 쌀겨를 벗기지 않았어요. 참말 끼니마다 식구들 먹을 만큼 겨를 벗기고 쌀을 불린 다음 가마솥에 밥을 지었어요. 그때그때 벗긴 겨는 소들이 먹는 맛난 밥이 되고, 쌀알은 사람들이 먹는 맛난 밥이 되었겠지요. 오늘날 사람들 눈길로 보자면 ‘그렇게 해서 언제 밥을 하느냐’ 싶을 수 있고, ‘쌀겨를 날마다 벗기느라 들이는 품과 겨를이 너무 많다’ 여길 수 있을 테지만, 삶이니까 이렇게 할 만하리라 느껴요. 삶이기에 아이들 기저귀를 빨래하고 아이들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삶이기에 도란도란 웃음꽃 피우는 나날을 즐기겠구나 싶어요.


- “연극의 막이 올랐어. 막이 올랐다면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야만 해.” “안 돼. 죽으면 끝이라고! 갑자기 몸이 아픈 것으로 해서.” “형사 나리. 당신도 수사를 도중에 중단하란 말을 들으면 억지로라도 계속하겠다는 생각을 하겠지? 연극도 마찬가지로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엔 중단할 수 없어. 그건 배우의 의지야.” (72쪽)
- “형사님은 잉꼬와 만나는 게 더 좋으신가요?” “말을 이상하게 하지 마. 내가 감시는 못하는 동안 잉꼬가 또 연극을 하면서 도둑질을 할지도 모르잖아!” (132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칠색 잉꼬》(학산문화사,2012) 넷째 권을 읽으며 빙그레 웃습니다. 넷째 권에서는 《칠색 잉꼬》 만화책을 이루는 두 기둥 가운데 하나인 ‘센리 형사’가 자꾸자꾸 ‘사랑과 삶’을 생각합니다. 센리 형사랑 나란히 《칠색 잉꼬》 두 기둥을 이루는 ‘칠색 잉꼬’도 ‘삶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자꾸자꾸 되새깁니다.

  참말 삶이란 무엇일까요. 참으로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역사 교과서에 이름이 올라야 삶일까요. 텔레비전 연속극에 나올 법해야 사랑인가요.


  삶은 누가 어떻게 누릴까요. 사랑은 누가 어디에서 누리는가요.

 


- “도망칠 생각인가.” “으엑.” “날 놔두고 도망치다니, 그렇겐 안 되지. 와하하하하. 네가 날 지옥으로 보내려고 해도 소용없어. 애초에 난 너한테밖에 안 보이니까. 네가 가는 곳엔 반드시 내가 있다는 얘기지. 왜냐하면 난 네 본심이니까 말이야, 우하하하하하.” (88쪽)
- “글쎄 그 도련님이 제대로 된 연출을 허락해 주질 않는다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선생님은 극단에서 쫓겨나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게 될까 봐 제대로 된 연출을 하실 용기가 없단 말입니까? 왜 있는지도 모를 그런 극단 따위 잘린들 어떻습니까! 그런 각오만 돼 있다면 더 당당해지실 수 있을 겁니다.” “각오…….” (186쪽)


  데즈카 오사무 님은 만화를 그립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은 삶을 만화로 그립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은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날을 만화로 그립니다.


  나는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을 읽습니다. 나는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을 읽으며 삶을 생각합니다. 나는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을 읽으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예쁜 하루를 생각합니다. (4345.10.27.흙.ㅎㄲㅅㄱ)

 


― 칠색 잉꼬 4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도영명 옮김,학산문화사,2012.2.25./9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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