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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을 부르는 아이 ㅣ 풀빛 그림 아이 25
디터 콘제크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사랑을 불러 서로 누리는 삶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00] 디터 콘제크, 《색깔을 부르는 아이》(풀빛,2002)
새벽에 살짝 빗방울 듣던 하늘인데, 낮을 지나며 구름이 살그마니 걷히며 해가 듭니다. 하루에도 날씨는 수없이 바뀌는구나 싶으면서, 한가을로 접어든 뒤 빗방울 한 차례 안 들으니 새삼스레 고맙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아직 땅이 없이 논일도 밭일도 따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식구 깃든 시골마을에서는 모두 논일이랑 밭일로 부산해요. 나락을 베어 말리고, 나락을 벤 빈논에 거름을 내어 마늘 심을 채비를 합니다. 하루쯤 말린대서 다 마르는 나락이 아니에요. 콩을 털어 말릴 때에도 하루이틀만 말리지 않아요. 퍽 여러 날 바싹바싹 말려요. 나락을 말릴 때에는 길 한켠에 길게 펼치고는 틈틈이 섞습니다. 아래에 있는 나락과 위에 있는 나락에 골고루 말라야 할 테니까요. 부지깽이도 가을일 거든다는 말이 떠오르는 시골마을이에요. 그런데 이런 가을 시골에서 들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모두 할머니와 할아버지뿐입니다.
빗방울이 들지 않기에 나락을 말리기에 알맞습니다. 바람은 우수수 소리를 내며 풀잎과 나뭇가지와 볏포기 흔들리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바람결 따라 이웃마을 논배미 무르익는 내음이 찾아듭니다. 또한, 우리 마을 논배미 무르익는 내음이 바람에 실려 이웃마을로 찾아가요.
구름이 걷히다가 퍽 엷게 드리웁니다. 구름이 엷다 보니 가을햇살은 온 들판과 마을을 하얗게 비춥니다. 언뜻선뜻 노란 기운이 서린 햇볕이 아닌 마알간 흰빛으로 눈부십니다.
가을이기에 이 같은 하늘빛과 햇빛을 누릴 수 있을까. 내가 도시에서 내처 살았을 때에도 이 같은 하늘빛과 햇빛을 느낄 수 있을까. 옆지기와 내가 아이들 어버이로서 시골로 삶터를 옮겨 살아가니, 어버이부터 이 빛을 느끼고, 우리 아이들도 이 빛을 느끼도록 하는 셈 아닐까.
이래저래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저 하늘 저 구름한테는 어떤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까 헤아립니다. 이 고운 빛살은 우리 시골마을에만 내리쬘는지, 이웃 시골마을에도 내리쬘는지, 또 이웃 도시나 이 나라 커다란 도시에도 내리쬘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저 구름은 우리 마을 머리 위로만 지나가며 흩뿌리는 빛살이 될 수 있겠지요.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서는 다른 구름이 드리우면서 다른 빛쌀을 흩뿌릴 수 있겠지요.
.. 소년 마법사 빈센트는 마법이 전혀 재미가 없었어요. 어떤 마법도 잘 되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다른 소년들은 마법을 아주 잘 부렸어요. 마술 지팡이를 들면 쥐가 갑자기 코끼리처럼 커지기도 하고, 물이 돌처럼 딱딱해지기도 했어요. 빈센트는 차라리 호숫가에 앉아, 물고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엄치는 모습을 쳐다보는 것이 더 좋았어요. 빈센트는 딱딱해지지 않은 부드럽고 시원한 물이 좋았고, 코끼리처럼 커져 버린 쥐는 조금 무서웠어요 .. (6쪽)
환한 빛살은 마당을 거쳐 집안으로 스밉니다. 칭얼대던 작은아이를 살살 달래 재운 방안으로도 빛살이 환하게 스밉니다. 작은아이는 어릴 적부터 낮잠 자는 버릇을 잘 들였기 때문인지 낮에는 어김없이 낮잠을 잡니다. 큰아이는 어릴 적부터 낮잠을 못 자 버릇했기 때문인지 낮에 낮잠 자는 일이 아주 드뭅니다. 고개 까딱 않고 달게 자는 작은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 아이가 먹을 밥이란 사랑이 담긴 밥일 때에 맛나고, 이 아이가 누릴 놀이란 사랑이 서린 놀이일 때에 신나겠지요. 어버이인 내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랑이 듬뿍 배인 말일 때에 반갑기 마련이에요.
자장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다스립니다. 아이한테만 고운 목소리로 불러 줄 자장노래가 아니라고 느껴요. 부르는 어버이 스스로 참 곱구나 하고 느끼며 즐길 수 있는 노래여야지 싶어요.
그러니까, 어버이 스스로 좋아하고 즐기면서 자장노래를 부를 때에 아이 또한 좋아하면서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어버이 스스로 맛나게 먹으며 즐기는 밥일 때에 아이 또한 맛나게 먹으며 즐기는 밥이 되겠지요.
들길을 걷든, 자전거수레에 아이들 태워 달리든, 언제나 같아요. 즐겁게 걷고 즐겁게 달릴 노릇이에요. 웃으며 걷고, 웃으며 달릴 노릇이에요.
설거지를 하고 비질을 하며 빨래를 합니다. 낯을 찡그리면서 설거지를 하면 스스로 서운하고 슬프며 고단합니다. 이맛살 찌푸리며 비질을 하거나 빨래를 하면 스스로 골이 나고 아프며 힘겹습니다.
밥을 먹는 뜻이 있어요. 하루에 두 끼이든 세 끼이든 네 끼이든, 때에 맞추어 밥을 먹는 뜻이 있어요. 잠을 자는 뜻이 있어요. 손발톱을 깎고 머리카락을 빗으며 기지개를 켜는 뜻이 있어요.
삶을 누리며 즐겁거든요. 삶을 즐기며 빛나거든요. 삶을 빛내며 사랑이 태어나거든요.


.. 곧, 휘파람을 불어 색깔 마법을 부리는 작은 새와 빈센트의 피리에 대한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많은 새들이 노래를 배우러 왔고, 오래지 않아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허공을 가득 채웠어요 .. (16∼18쪽)
아침나절, 바깥에서 빗방울이 들을락 말락 할 무렵, 큰아이와 작은아이는 맨발로 마당에 서서 놀았어요. 마음대로 뛰놀던 큰아이는 문득 부엌에 대고 아버지한테 외칩니다. “아버지, 비 와요.” 비가 올 듯 말 듯하기에 부디 빨래가 다 마를 때까지 비가 안 와 주렴, 하고 빌었는데, 아주 살짝 빗방울이 조금 떨어집니다. 거의 다 마른 빨래에 빗방울 묻히기 싫어 서둘러 빨래를 걷습니다. 큰아이가 “내가, 내가 걷을래.” 하면서 부산을 떱니다. 빨래를 다 걷어 집으로 들인 다음 옷걸이에 꿰어 거는 동안, 큰아이는 마당에 세운 빨래대를 걷어서 집으로 들이겠다고 낑낑거립니다. 아이야, 그 빨래대는 그냥 마당에 두어도 돼. 큰아이는 접어서 낑낑 들던 빨래대를 도로 마당으로 가져가서 펼칩니다. 밥 먹자 할 적에는 자꾸 딴짓을 하고 한눈을 파는 아이가 또 이럴 적에는 이런저런 심부름을 스스로 알아서 합니다.
바람은 불다가 멎습니다. 빗방울은 더 들지 않습니다. 먼지잼조차 아니구나 싶습니다. 거의 다 마른 빨래는 그대로 집안에 두고, 두꺼운 천이라 촉촉한 빨래는 바깥에 내놓습니다.
구름결 따라 햇살은 반짝이다가 흐리다가 되풀이합니다. 아이는 맨발로 집안에서 놀다가 마당에서 놀다가 되풀이합니다. 따순 가을 날씨에 나무마다 일찌감치 새 잎이 돋습니다. 봄에 돋아야 할 잎일 텐데 늦가을 앞두고 벌써 읻이 돋습니다. 너희는 벌써 잎이 돋는 바람에 한겨울 추위를 견디어야겠구나. 그러나, 너희는 한겨울 추위를 견딜 마음으로 이 가을에 일찌감치 바깥으로 나온 셈일 테지. 너희가 한겨울 추위를 견디면서 아직 자그마한 눈으로 있는 다른 벗들한테 ‘아직 너희는 나오지 말아. 바깥은 모질게 춥구나.’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겠지.
.. 빈센트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온 밤을 뜬눈으로 새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아침 일찍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자마자, 색깔들이 다시 빛나기 시작하는 거였어요. 빈센트는 그 광경을 맨 처음 보았어요. “색깔들도 쉬어야 하나 봐. 어쩌면 그것도 좋은 일이야. 그렇지 않으면 색깔에 익숙해져, 언젠가는 색깔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 작은 새가 가장 친한 친구 빈센트에게 말했어요 .. (26∼27쪽)
디터 콘제크 님 그림책 《색깔을 부르는 아이》(풀빛,2002)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 ‘빈센트’는 마법 부리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법을 즐기지 않고, 마법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아이 빈센트는 숲을 숲 그대로 바라보고 싶어요. 냇물은 냇물 그대로 마주하고 싶어요. 나무와 물고기는 나무대로 물고기대로 이웃하고 싶어요.
빈센트를 둘러싼 다른 아이들은 다른 어른들과 똑같이 마법을 익히느라 바쁩니다. 더 놀라운 마법을 부리려고 애씁니다. 더 대단한 마법을 부려 이름을 드날리려 합니다.
아이 빈센트는 갈대 줄기를 피리 삼아서 붑니다. 갈대 줄기로 피리를 부는 소리가 차츰 무르익으면서 노랫소리로 거듭납니다. 아이 빈센트가 갈대피리를 익숙하게 불 수 있을 무렵, 작은 새가 아이 빈센트한테 찾아와서 동무가 됩니다. 둘은 서로 어여쁜 노랫소리를 빛내려 합니다. 서로서로 어여쁜 노랫소리를 빛낼 수 있을 무렵, 둘은 아름다운 노래를 다른 동무한테 스스럼없이 나누어 줍니다. 다만, ‘사람 동무’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나누어 받지 않아요. 오직 들새와 멧새와 풀벌레만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나누어 받아 더 널리 퍼뜨립니다.
이리하여 가을날 아름다운 빛깔이 온누리에 퍼지겠지요. 겨울날에도 풀벌레가 마지막 노랫소리를 읊을 테고, 풀벌레가 흙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는, 바람이 노랫소리를 이어받아 싱싱 휭휭 읊을 테며, 이윽고 찾아오는 봄에는 새삼스레 온갖 새들과 벌레들이 갖가지 노래를 복닥복닥 읊을 테지요.
사랑을 부릅니다. 사랑을 서로 누립니다. 사랑을 삶으로 빛냅니다. 하루는 아름답고, 오늘은 즐거이 웃을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4345.10.17.물.ㅎㄲㅅㄱ)
― 색깔을 부르는 아이 (디터 콘제크 글·그림,김경연 옮김,풀빛 펴냄,2002.1.10./9500원)
(최종규 .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