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애 민음의 시 142
신달자 지음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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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깨문 복숭아
[시를 노래하는 시 29] 신달자, 《열애》

 


- 책이름 : 열애
- 글 : 신달자
- 펴낸곳 : 민음사 (2007.10.12.)
- 책값 : 7000원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복숭아를 깨물어 먹습니다. 맛나게 깨물어 먹습니다. 두 아이는 능금도 깨물어 먹습니다. 어금니까지 곱게 난 큰아이는 복숭아도 능금도 혼자서 척척 잘 깨물어 먹습니다. 어금니가 아직 돋지 않은 작은아이는 앞니로 깨물 수는 있으나 제대로 씹지 못합니다. 어버이가 오물오물 씹어서 숟가락에 받은 다음 건네야 먹을 수 있습니다.


  큰아이는 혼자서 밥을 먹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쥡니다. 큰아이는 제 밥그릇에 담긴 밥을 푸고, 제 국그릇에 담긴 국을 뜹니다. 작은아이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입으로 씹은 밥을 먹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숟가락에 국을 뜨거나 국그릇을 들고 입에 대 주어야 국을 마실 수 있습니다. 돌을 지나면서 물잔을 혼자 들고 마실 수는 있는데, 스스로 알맞게 맞추지는 못해 물을 왈칵 쏟곤 합니다.


  작은아이는 큰아이 하는 양을 바라보며 저도 혼자 숟가락을 들고는 밥을 푸고 싶습니다. 작은아이는 스스로 국을 뜨고 싶습니다. 숟가락을 들어 이리저리 휘젓습니다. 밥상은 이내 어지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지르면서 숟가락질을 익히고 젓가락질을 익히는걸요. 두 아이 나란히 온 방에 온갖 것을 늘어놓으면서 놀고, 이렇게 놀면서 크는걸요.


.. 나 알몸으로 누워 산을 받아들이면 / 산 하나 품어 나오리 ..  (저 산의 녹음)


  아이들이 복숭아를 잘 먹고, 옆지기와 나도 복숭아를 잘 먹으니, 우리 집 어느 한켠에 복숭아나무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복숭아를 먹으며 씨앗이 나올 적에 심어야지 생각하는데, 으레 잊고는 그냥 버립니다. 나물비빔을 좋아하면 텃밭에 온갖 푸성귀가 자라도록 해서 즐겁게 뜯어서 먹으면 됩니다. 옥수수를 좋아하면 밭 가장자리에 옥수수를 줄줄이 심으면 됩니다. 고구마를 좋아하면 조금 너른 땅뙈기를 마련해서 고구마줄기를 하나씩 묻으면 돼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꽃을 심습니다. 목련도 심고 장미도 심으며 동백도 심습니다. 양파를 잘 먹으면 양파를 심습니다. 마늘을 좋아하면 마늘을 심어요. 양파나 마늘이 돈이 될 만하니 심는다 하면 쓸쓸합니다. 돈을 벌어 어떤 즐겁고 좋은 일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할 때에는, 돈만 벌어서는 부질없으리라 느껴요. 즐겁게 돈을 벌고 즐겁게 돈을 쓰며 삶을 즐겁게 누릴 때에 아름다운 하루가 된다고 느껴요.


  두 아이 노는 모습을 아침부터 밤까지 지켜봅니다. 두 아이는 끝없이 놉니다. 쉬지 않고 놉니다. 등판이 땀으로 젖습니다. 이마에서 땀이 흐릅니다. 콧잔등에 땀이 맺힙니다. 그러나 두 아이 모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놀이에 빠지니 좋고, 놀이에 흠뻑 빠져 즐거우며, 놀이에 온통 사로잡히니 재미나는구나 싶어요.


.. 아무 미련 없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모습 편안하다 ..  (코스모스 영가靈歌)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싫어할 만한 일을 굳이 하지 않습니다.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좋아할 만한 일을 합니다. 달갑지 않은 일을 즐거이 하려는 아이는 없습니다. 못마땅하거나 안 내키니는 일을 애써 하려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라면 모름지기 스스로 가장 즐거우며 재미나고 신나는 일을 합니다. 아이라면 마땅히 스스로 가장 좋아하며 사랑하고 멋진 일을 해요.


  그런데, 어른도 아이와 마찬가지예요. 스스로 가장 즐겁다 여길 일을 할 때에 즐겁습니다. 스스로 가장 재미나다 여길 일을 해야 재미나요. 스스로 가장 좋아한다고 여기는 일을 해야 좋겠지요.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운 마음이 될 일을 할 때에 사랑을 나눌 수 있어요.


  좋아하지 않는데 돈을 벌 수 있어 한다면 얼마나 고될까요. 사랑하지 않으나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찾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을 생각합니다. 마음을 북돋우는 일을 누립니다.


.. 그 똘똘하고 뿌듯한 하늘이 다섯 살이 되는 새해에도 나는 그저 /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세뱃돈 줄게 고추 좀 보자 / 강아지가 물고 갔음 어째 좀 보자 한 번만 보자 보채는 나에게 / 이놈 눈 딱 부라리고 날 쳐다보며 하는 말 / 할머니는 변태야! ..  (변태)


  아직 쉬를 옳게 가리지 못하는 작은아이는 곧잘 이불에 쉬를 눕니다. 이불은 쉬로 젖으니 틈틈이 햇볕에 말리고, 퍽 자주 빨래합니다. 이불 빨래를 손으로 하기도 하지만, 빨래기계를 장만한 뒤로는 빨래기계한테 맡깁니다.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제금난 지 열일곱 해인데, 빨래기계는 제금난 지 열일곱 해째에 비로소 장만했습니다. 올봄까지 이불도 기저귀도 모두 손수 빨래했어요.


  이불을 꾹꾹 발로 밟으며 빨 적에, 기저귀와 숱한 옷가지를 손으로 복복 비비며 빨 때에, 가만히 생각에 젖습니다. 이 옷을 입고 이 이불을 뒤집어쓰는 살붙이는 하루를 즐겁게 누렸을까. 정갈히 빨아서 예쁘게 갠 옷을 입을 살붙이는 새 하루를 새로운 넋으로 맞이할까.


  새로운 날은 참말 새롭습니다. 어제와 같은 하루는 없습니다. 오늘과 같은 하루도 없습니다. 어제는 어제대로 즐겁게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궂은 일이 잦았건 기쁜 일이 넘쳤건, 하루는 하루대로 반갑다고 여깁니다.


.. 아파트 일 층인 내 방 창에는 / 녹음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 사월부터 연둣빛 땡땡이 무늬가 어른거리더니 / 서너 달 지나며 창은 짙푸린 비단으로 출렁거렸다 ..  (바라본다는 것)


  이제 유월과 칠월에 이은 여름철 팔월이 저뭅니다. 꼭 달력 날짜 때문은 아니나, 팔월 막바지, 이른바 늦여름에 이르면 밤날씨가 살짝 서늘합니다. 팔월 삼십일 밤, 곧 팔월 삼십일일로 넘어서는 밤에는 집안 온도가 26도로 내려옵니다. 오월이 끝나고 유월로 접어들 적부터 본 적 없는 온도입니다. 구월 어귀에 비로소 후끈후끈 무더운 밤이 사라집니다. 바야흐로 가을일까요.


  들판에서 씩씩하게 자라는 벼는 누렇게 익습니다. 드센 비바람이 휘젓고 지나갔어도 씩씩하게 서며 누렇게 익습니다.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몰 때면 으레 곳곳에서 메뚜기를 봅니다. 아, 메뚜기로구나. 우리 식구 살아가는 이곳 시골마을은 지난해까지 풀약을 꽤 많이 쳤다는데, 올해부터는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며 이제껏 치던 풀약을 꽤 많이 줄였다고 해요. 그러나 풀약을 아예 안 치지는 않습니다. 치기는 치되 좀 적게 칠 뿐입니다.


  풀약을 아예 안 친다면 메뚜기를 더 많이 만나겠지요. 풀약이 없는 논이랑 밭이라면 사마귀와 여치와 풀무치와 방아깨비 모두 마음껏 노닐겠지요.


  개구리가 살아가니 뱀도 살아갑니다. 뱀이 살아가니 소쩍새도 살아갑니다. 들쥐가 살고 까마귀가 삽니다. 숱한 멧새와 들새가 살아갑니다. 멧비둘기와 참새는 아직 덜 여문 나락 알을 먹고 싶어 자꾸 들판으로 내려앉습니다. 모두들 제 밥을 찾습니다. 저마다 제 삶을 누립니다.


.. 강의실은 구 층에 있었다 / 지하 삼 층 차고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 한순간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일이 / 나에겐 예삿일이다 / 높은 곳을 죽 올라가는 그 재미로 / 계단을 잊은 지 오래다 ..  (버들잎 강의)


  내가 우리 아이들만 하던 나이였을 적을 곧잘 되새기곤 합니다. 내 어릴 적 내 어버이는 방학 때면 나와 형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내 아버지가 국민학교 교사였기에 아버지는 여름과 겨울에 긴 방학을 맞습니다. 방학철이면 으레 시골집에서 열흘이든 스무 날이든 묵습니다. 시골집에서는 시골 할머니가 차리는 밥을 먹습니다. 시골집에서는 시골 이웃을 만나 시골살이를 누립니다.


  이때 나는 메추리가 알을 낳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고, 메추리알이 왜 메추리알인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시골집 사촌형을 따라 메추리집을 털 적에 어미 메추리가 빽빽 울면서 우리 머리에 똥을 지르던 일이 새삼스럽습니다. 도시에서 먹는 메추리알은 플라스틱 꾸러미에 촘촘히 놓이는 알인데, 이 메추리알이란 메추리가 낳는 제 새끼라고 새삼스럽게 생각했어요. 다른 목숨을 내가 먹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닭우리에서 닭이 낳은 알을 꺼낼 적에도 달걀이란 목숨이지 그냥 먹을거리가 아니로구나 하고 느꼈어요. 갓 낳은 말랑말랑하며 따스한 목숨을 먹으면서 내가 오늘 하루 또 신나게 뛰놀 기운을 얻는다고 느꼈어요.


  바람소리를 떠올립니다. 시골마을은 온통 바람소리입니다. 풀벌레 노랫소리를 떠올립니다. 시골마을은 온통 풀벌레 노랫소리입니다. 그래, 이때 메뚜기가 보이면 곧장 잡아서 병에 모으거나 밟아서 죽이라 했어요. 메뚜기가 벼를 다 갉아먹는다 했으니까요. 애꿎은 메뚜기는 도시 아이 하나 잘못 만나 애꿎게 숨을 잃습니다. 방아깨비와 사마귀를 나란히 한손에 잡아 애꿎게 싸움을 붙입니다. 방아깨비가 파르르 떨고 사마귀가 먹이를 잡으려고 안달하는 기운이 손가락을 거쳐 마음속 깊은 데까지 쩌렁쩌렁 울립니다. 내가 무얼 보자고 이런 짓을 하나.


  방아깨비를 잡아 손가락 사이에 끼면, 그야말로 방아를 찧습니다. 한참 방아를 찧다가 똥을 지립니다. 똥을 지리면 그제서야 놓아 주는데, 똥까지 지린 방아깨비는 기운을 잃어 풀숲에서 거의 꼼짝하지 못합니다. 방아 찧는 모습을 구경한다며 넋을 잃은 어린 나는, 방아깨비가 똥을 지려 놓아 준 다음,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풀숲에서 천천히 숨을 잃는 모습을 보며 또 생각합니다. 내가 무얼 알자고 이런 짓을 하나.


.. 나는 문득 /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밥을 짓고 싶어 ..  (우리들의 집)


  길을 가다가 뒤집어진 벌레를 보면 그냥 지나치려 하다가도 우뚝 멈춥니다. 손가락 하나를 뻗어 벌레가 이 손가락을 붙잡고 일어서도록 합니다. 물에 빠진 무당벌레를 건져 풀숲으로 옮깁니다. 거미줄에 갓 걸린 나비나 잠자리를 보면 거미줄을 스윽 끊습니다. 거미는 다시 기운을 차리고 거미줄을 새로 치겠지요. 그래도 거미야 미안하구나. 너한테 걸맞는 다른 먹이를 기다리렴.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던 엊그제 우리 집 시멘트블록담 한쪽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시멘트블록이 고샅길에 흩어졌기에 한쪽으로 치우는데, 시멘트블록 안쪽 구멍에 개미집이 있더군요. 수만에 이르는 개미는 집을 잃었다며 아우성입니다. 네 녀석들이 이 속에서 또아리를 트느라 시멘트담이 허술해졌을까.


  빨래대를 받치려고 마당에 놓은 큰돌을 옮길 적에도 개미집을 봅니다. 그저 큰돌 밑일 뿐인데, 이곳을 저희 집으로 삼는 개미는 어떤 마음일까 하고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흙땅 돌밑에 집을 지어야지, 시멘트바닥 돌밑에 어설피 집을 꾸리면 어떡하니.


.. 자기 손으로 자기 몸을 쓸어내리는 것을 / 자위행위라고 말합니다만 / 나의 손은 나의 어머니입니다 / 내 손이 내 몸의 성감대를 찾아가는 것을 / 내 손이 내 몸의 흐느끼는 곳을 찾아가는 것을 / 야릇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  (손)


  옆을 돌아보면 모두 내 이웃입니다. 둘레를 살펴보면 모두 내 동무입니다. 이웃집도 이웃집이요, 풀과 나무와 꽃도 이웃입니다. 무화과나무 매화나무 감나무 모두 이웃입니다. 후박나무 동백나무 모과나무 모두 동무입니다.


  맑게 갠 파란 빛깔 하늘을 흐르는 티없이 하얀 구름도 내 이웃입니다.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살도 내 동무입니다. 우렁차게 우는 매미와 숱한 풀벌레도 내 이웃입니다. 조잘조잘 지저귀는 들새와 멧새 모두 내 이웃입니다.


  저마다 좋은 아침을 맞이합니다. 저마다 좋은 밥을 생각합니다. 저마다 좋은 하루를 빚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새 날을 마주합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새 이야기를 꾸립니다.


  오늘은 무얼 먹을까. 오늘은 어떤 밥을 차릴까. 오늘은 아이들이랑 무얼 하면서 놀까. 복숭아는 다 먹었는데 어떤 열매를 장만해 볼까. 산들산들 부는 아침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 나는 너에게 지금도 내가 아는 귀여운 / 여자의 이름을 달아 주고 싶은데 / 사랑을 축하하며 / 예쁜 꽃다발을 가슴에 안겨 주고 싶은데 / 세상의 정보를 가장 먼저 주우려고 / 컵라면을 손에 든 채 / 너는 밤새 컴퓨터 화면만 뜨겁게 마주하고 있다 ..  (딸의 하이힐을 수선하며)


  신달자 님 시집 《열애》(민음사,2007)를 읽습니다. 한자말로 된 책이름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열애’가 뭘까?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국어사전에는 두 가지 한자말이 나옵니다. 먼저, ‘悅愛’가 있고, 말뜻은 “기쁜 마음으로 사랑함”입니다. 다음으로, ‘熱愛’가 있으며, 말뜻은 “열렬히 사랑함”입니다. ‘열렬(熱烈)’은 또 뭔가 싶어 국어사전을 새삼스레 뒤적이니 “어떤 것에 대한 애정이나 태도가 매우 맹렬하다”라 합니다. 그러면 ‘맹렬(猛烈)’은 또 뭐람? 다시 국어사전을 뒤적여 “기세가 몹시 사납고 세차다”라는 말뜻을 얻습니다.


  아하, 그러니까 ‘열애’란 “기쁜 사랑”이나 “뜨거운 사랑” 둘 가운데 하나가 되겠군요.


  아무튼, 나는 둘 다 좋습니다. 사랑은 기뻐서 좋습니다. 사랑은 뜨거워서 좋습니다. 나는 둘 모두 좋습니다. 기쁘게 나눌 수 있는 사랑이 좋습니다. 뜨겁게 불을 피워 둘레를 따사로이 살찌울 수 있는 사랑이 좋습니다.


  나는 내가 받는 사랑으로 따스한 나날입니다. 나는 내가 주는 사랑으로 따스한 나날입니다. 사랑을 받으면서 따스하고, 사랑을 주면서 따스합니다. 따스한 사랑을 느끼기에 싯말이 태어납니다. 따스한 사랑을 나누기에 시노래를 짓습니다.


  사랑이 있어 시를 씁니다. 사랑을 느껴 책을 읽습니다. 사랑을 꿈꾸어 삶을 짓습니다. 사랑을 노래해 밥을 나눕니다. 사랑을 어깨동무하며 지구별이 따사롭습니다. (4345.8.3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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