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숲 21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손희정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마음속 나를 느끼기
 [만화책 즐겨읽기 177] 이시키 마코토, 《피아노의 숲 (21)》

 


  새벽에는 홀로 조용히 일어나서 낯을 씻고 쉬를 눕니다. 이러고 나서 기지개를 켠 다음 쌀을 씻습니다. 누런쌀로 밥을 짓기 때문에 바지런히 일어나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날마다 하는 일이기는 한데, 날마다 새롭습니다. 하루에 두 차례 쌀을 씻어서 불릴 적마다 가만히 헤아려 보곤 합니다. 내 밥짓기는 내 살붙이한테 목숨을 잇는 좋은 삶짓기일까 하고. 스스로 좋은 삶짓기로 여기면서 쌀 한 톨이랑 물 한 방울에 좋은 넋을 담는가 하고.


- ‘내가 슈우헤이랑 같은 라인에 있다면, 세계 어디에 있든 마음이 향하는 곳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라인에서 떨어지기 싫어서,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다. 나란 놈은 대체 얼마나 슈우헤이에게 의지해 온 걸까?’ (24쪽)
-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없어져도 괜찮도록, 저는 카이와 진심으로 마주하고 있었으니까요.” (84쪽)


  지난밤에 비가 그칩니다. 오늘은 날이 맑으리라 생각합니다. 해가 환하게 뜨고 마당이 말라 물기가 사라지면, 며칠째 눅눅하기만 한 채 안 마르던 빨래를 모두 내놓고 보송보송 말리려 합니다. 새벽녘에 하늘을 바라보려고 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 보는데, 모기그물문에 매미 한 마리 붙었더군요. 이 매미는 지난밤 비바람을 그으려고 여기에 붙었을까요. 아직 나뭇가지나 풀잎 모두 물기로 촉촉하니, 모기그물에 붙어 날개와 몸을 말릴 생각일까요.


  아이들 하나씩 일어나고 햇볕 찬찬히 깃들 무렵, 모기그물에 붙던 매미는 마당 한켠 후박나무로 옮겨 앉습니다. 이윽고 우렁차고 시원스런 목청을 뽑아 노래를 부릅니다.

 

 


- “도면 자체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걸 어떻게 파악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건물이 되지 않니.” “엄청 허술하게 날림 공사로 지은 집이 될 수 있고, 몇 세기에 걸쳐 칭송받는 예술품 같은 건물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53쪽)
- “10명의 장인이 있으면 10가지 집이 만들어져요?”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어떤 재료를 쓰는지에 따라서 전혀 달라지잖아요. 나무를 쓸지, 돌을 쓸지, 흙을 쓸지, 짚으로도 지을 수 있고.” (54쪽)
- “소중한 사람을 잃기도 하고,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하지만 즐거운 일도 기쁜 일도 있지?” “뭐, 뭐, 그렇죠.”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고 싶지 않다면 평생 누구와도 관계 맺지 말고 외톨이로 숨어 살 수밖에 없어.” “그런 건 불가능해요. 밥을 안 먹으면 죽어 버리잖아요.” “괴로운 일은 마음을 강하게 해 주고, 즐거운 일은 마음을 풍부하게 해 준단다.” (56쪽)


  겨울과 봄 사이에는 멧새가 노래했어요. 봄부터 제비가 찾아들어 노래했어요. 늦봄과 여름 사이에 개구리가 노래했어요. 이윽고 풀벌레 노랫소리가 이어졌고, 바야흐로 매미들 노랫소리가 울려퍼집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다시 겨울부터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 거쳐 겨울이 되기까지, 언제나 소리는 끊이지 않습니다.


  소리와 함께 빛깔도 끊이지 않습니다. 봄빛에 이어 여름빛이 찾아옵니다. 여름빛에 이어 가을빛이 찾아듭니다. 가을빛 다음으로 겨울빛이 찾아와요.


  저마다 온누리에 한 가지 있는 소리요 빛입니다. 사랑스레 태어나고 아름답게 자라나는 무늬요 결입니다.


  이른아침부터 섬돌에 앉아 만화책을 읽는 큰아이를 바라봅니다. 나와 옆지기와 아이들은 이 땅에 무엇을 누리거나 즐기려고 찾아왔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놀이를 하며 어떤 이야기를 나누려고 이 땅으로 찾아왔을까요. 학교를 다니려고 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겠지요. 무언가를 거머쥐거나 어떤 길 하나를 찾아 걸어가려고 이 땅에 서지 않았겠지요.


  꿈을 꾸려고 태어났으리라 생각해요. 다만, 꿈을 꾸려는 삶이지, 목표를 이루거나 욕심을 채우거나 하는 삶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즐겁게 누릴 꿈이고, 사랑스레 보듬을 꿈이라고 생각해요.

 

 


- “선생님이 말씀하신 건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자, 마지막 강의다. 그것들을 전부 잊어버려라. 내게서 배운 건 깨끗이 잊어버려야 한다.” “예? 깨끗이 잊으라니요?” “‘잊어버리는 것’도 훌륭한 재능 중 하나야.” (59쪽)
-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이미 네 속에 들어 있어.” (63쪽)
- “카이, 그 녀석이 없어도 이미 네 안에는 ‘숲의 피아노’가 존재하지? 네 안에 존재하는 건 잃어버릴 수가 없지 않니! 나는 내가 가진 건 전부 다 가르쳤단다. 그리고 넌 너에게 필요한 걸 확실히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어! 그러니 안심하고 전부 잊어버려! 머릿속을 완전히 비우고 파이널에 도전하는 거야. 협주곡은 수많은 장인들과 벌이는 공동작업이란다. 그곳에 가면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해.” (65∼66쪽)


  날마다 밥을 짓습니다. 날마다 밥을 먹습니다. 살붙이들한테 밥을 먹입니다. 날마다 옷을 빨래합니다. 잘 빨래하고 잘 말리고 잘 개서 입고 입힙니다.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살아가며 사랑하는 나날입니다. 살아가며 사랑하는 꿈을 생각하는 나날입니다.


  밥을 먹는 까닭이란 따로 없습니다. 그저, 살아가려고 밥을 먹는데, 살아가려는 까닭이라면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을 뿐이요,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은 까닭이라면, 사랑하며 살아가는 꿈을 꾸고 싶기 때문이라 할 만해요.


  내 마음속 나를 느끼면서 좋아하는 삶이지 싶어요. 내 마음속 나를 헤아리면서 보살피는 삶이지 싶어요.


  어떤 재주를 부려야 하지 않아요. 어떤 솜씨를 뽐내야 하지 않아요. 어떤 이름을 날려야 하지 않아요. 어떤 나인가를 살포시 느끼면서 스스로 웃을 수 있는 삶이면 넉넉해요.

 

 


- “연습할 대로 연주해서는 의미가 없어! 왜인지는 알겠지?” “무대는 살아 있으니까!” (72쪽)
- “지금 말한 것도 잊어버리라고 하실 거예요?” “하하, 잊어버리렴. 괜찮아! 자신감을 가져. 나한테서 배운 걸 떠올리지 않아도 넌 이미 너란다! 넌 이미 나한테서 가져가고 싶은 전부 가져갔고, 그걸 넘어섰어. 이찌노세 카이, 바로 너 자신이 된 거야.” (73쪽)


  이시키 마코토 님 만화책 《피아노의 숲》(삼양출판사,2012) 스물첫째 권을 읽습니다. 스물첫째 권에 이르러 ‘스승한테서 홀로서기’를 하려는 카이 이야기가 흐릅니다. 그런데, 카이는 스승한테서 홀로서기를 한다기보다, 스승한테서 처음 피아노와 삶을 배울 때부터 홀로서기를 했어요. 누가 누구한테서 무엇을 배운다 할 때에는 홀로서기를 한다는 뜻이에요. 홀로서기를 하면서 더 살갑고 깊은 동무로 살아간다는 뜻이에요. 서로 오롯한 목숨으로서 마주하고, 서로 옹근 꿈으로 만나며, 서로 오달진 삶으로 어깨동무를 한다는 뜻이에요.


  아침을 차리는 나는 ‘아침밥’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하는 나는 ‘빨래’를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 둘 태운 자전거수레를 끌면서 ‘자전거’를 생각하지 않아요. 글을 쓸 때에 ‘글’을 생각하는 일이란 없고, 사진을 찍으며 ‘사진’을 생각하지 않아요.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이 ‘사랑’을 생각할 일이란 없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아름다운 꿈을 누릴 카이는, 피아노를 치는 동안 ‘피아노’를 생각할 일이 없어요. 예나 이제나 카이는, 피아노 앞에 앉건 숲에서 뛰놀건 어머니하고 작은 집에서 밥을 먹건 ‘삶을 생각’하고 ‘삶을 사랑’하는 나날이었어요. 카이한테 ‘피아노 치기’를 이끈 분은 카이가 ‘피아노 치는 재주’가 모자라다고 여겨 ‘피아노 교사’ 노릇을 하지 않았어요. 카이 스스로 삶을 생각하고 사랑하면서 ‘피아노를 카이 것으로 녹여’낼 수 있는 길을 손을 맞잡고 즐겁게 걸어갔어요.


  카이는 카이대로 카이 마음속에서 숨을 쉬는 ‘나’를 느낍니다.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카이와 가르치고 배우던 분은 이녁대로 이녁 마음속에서 숨을 쉬는 ‘나’를 느낍니다. (4345.8.25.흙.ㅎㄲㅅㄱ)

 


― 피아노의 숲 21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문보람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12.8.3./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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