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익숙하게 쓰는 영어
[말사랑·글꽃·삶빛 12] ‘깔개’와 ‘방석’과 ‘쿠션’

 


  이제 초등학교 아이들은 아주 스스럼없이 영어를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배울 뿐 아니라, 집에서도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배웁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도 영어를 배웁니다. 아이들은 한글 그림책과 나란히 영어 그림책을 읽기도 하지만, 한글 그림책에 앞서 영어 그림책을 읽기도 합니다.


  한글은 으레 쓰고 한국말은 누구나 하니까 아이들한테 따로 안 가르쳐도 될 만하다고 여기지 않나 싶도록, 한국 어른들은 한국 아이들한테 한글과 한국말을 옳고 바르며 예쁘고 상냥하며 즐겁고 슬기롭게 가르치는 일을 안 합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안 가르치면 제대로 배우지 못해요. 찬찬히 물려주지 않으면 찬찬히 물려받지 못해요. 사랑을 담아 알려주지 않으면 한국말을 사랑스레 쓰는 길을 깨닫지 못해요.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우리 집 아이는 날마다 바깥에서 뛰노느라 살결이 차츰 까맣게 탑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 아이 살결은 햇볕에 ‘그을려’요. 햇볕에 타는 일은 ‘그을다-그을리다’요, 불에 태우는 일은 ‘그슬다-그슬리다’입니다. 우리 집 아이 말고,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놀러오는 아이들이라든지 면내나 읍내에서 마주하는 아이들을 만날 때면 문득문득 느끼는데, 이 아이들 가운데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는 아이는 매우 드뭅니다. 이를테면, ‘그을다’와 ‘그슬다’를 알맞게 가릴 줄 아는 아이가 없어요. 더 나아가, 이 낱말을 아예 모르기조차 합니다. 더 살피면, 아이들이 ‘그을다’과 ‘그슬다’를 모르기 앞서, 어른들부터 이 낱말을 모릅니다.


  어젯밤부터 빗방울이 듣습니다. “빗방울이 듣는다”고 적었는데, ‘비오다’를 일컬어 “빗방울이 듣는다”고도 합니다. 비가 올 때에 비를 안 맞으려고 처마 밑으로 몸을 옮기는 일을 일컬어 “비를 긋는다”고 합니다. ‘처마’는 집을 덮은 지붕이 도리 밖으로 나온 자리를 일컫습니다. ‘도리’는 서까래를 받치려고 기둥을 가로지르는 나무를 일컫습니다. ‘서까래’는 지붕을 얹기 앞서 도리 위에 죽 이어 까는 나무를 일컬어요. 그런데, 이런저런 ‘집’을 이루는 나무를 가리키는 낱말을 오늘날 어른들은 얼마나 잘 알거나 살필까요. 집짓는 일을 하는 어른이 아니라면 이런 낱말은 아예 모르쇠로 살아가지 않나 싶은데요.


  곧, 어른도 모르고 아이도 모르는 한국말입니다. 비오는 날, 우산을 ‘펼치’고 ‘접는’다고도 하지만, 우산을 ‘켜’고 ‘끈’다고도 해요. 빗줄기 굵기가 어떠한가에 따라, 안개비·는개·이슬비·가랑비로 나눕니다. 이 같은 굵기는 빗줄기를 눈으로 살피고 빗방울을 몸으로 맞으며 스스로 느껴야 깨닫습니다. 머리로는 알 수 없고, 지식으로는 가르지 못해요. 빗방울이 몇 밀리미터라야 는개이고 이슬비이고 나누지 않아요. 빗물이 어느 만큼 옷을 적셔야 안개비이고 는개이고 가르지 않아요. 이리하여, 오늘날 어른이든 아이이든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같은 옛말을 쓰는 일이 몹시 드뭅니다. 비오는 날 빗줄기를 살피며 가랑비인가 실비인가 이슬비인가 살피지 않거든요. 더구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이슬을 볼 일이 더 드물다 보니, 이슬비를 깨닫기 힘들고, 이슬비를 깨닫지 못하니, 보슬비는 또 어떤 비인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더 들여다본다면,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보슬비를 말하지 않아요. 바람 없는 날 가늘게 조용히 내리는 보슬비를 텔레비전에서 날씨를 알려주는 분들이 말하는 일 또한 없어요.


  조용히 여름비를 느끼며 만화책 한 권 읽습니다. 일본사람 콘노 키타 님이 지은 만화책 《다음 이야기는 내일 또》(대원씨아이,2012) 셋째 권입니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 보이는데, ‘방석’과 ‘쿠션’과 ‘마루’와 ‘리빙룸’이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 “앗, 방석에 고양이 털이. 다른 걸 가져올 테니까 기다리렴.” “방석?” “여기 있어. 앉으렴. 자!” “아, 쿠션 말이군요!” “마리아네 집에는 ‘마루’가 없어?” “응.” “그럼 어디서 가족들이랑 TV를 보거나 얘길 하는데?” “어머, 그거야, 당연히 리빙룸이지.” ..


  어느 아이는 ‘깔개’를 ‘방석(方席)’이라 말합니다. 어느 아이는 방석이라는 낱말을 알아듣지 못하다가는 ‘쿠션(cushion)’이라 외칩니다. 이러다가 ‘마루’라는 낱말이 나오는데, 늘 마루에서 지내는 아이는 아주 마땅히 ‘마루’라 말하지만, 다른 아이는 이 또한 못 알아듣다가는 ‘리빙룸(living room)’이라 외쳐요.


  즐겁게 읽던 만화책을 한동안 덮고 생각합니다. 재미 삼아 나온 이야기라 여길 수 있고, 일본에서도 이처럼 영어에 길들거나 젖어든 채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다는 우스개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일본도 한국도 온통 영어 물결에 휩쓸리는 나라인 만큼, 스스로 제 말을 잃거나 잊으며 넋과 얼이 뒤죽박죽이 되는 모습이라 여길 수 있겠지요.


  가만히 보면, 예부터 이 나라 살림집에는 ‘마루’가 있고 ‘부엌’이 있었으나, 어느새 ‘거실(居室)’과 ‘주방(廚房)’이라는 한자말이 또아리를 틀었어요. 한자말이 또아리를 튼 자리는 시나브로 ‘리빙룸’이라든지 ‘키친(kitchen)’ 같은 영어한테 새롭게 자리를 내주고 밀려나요. 이동안 한국말은 어디에서도 깃들지 못해요. ‘마루’나 ‘부엌’뿐 아니라 ‘책상’과 ‘걸상’이라는 낱말이 밀려납니다. ‘아침밥’과 ‘낮밥’과 ‘저녁밥’이라는 낱말은 ‘조찬(朝餐)’과 ‘오찬(午餐)’과 ‘만찬(晩餐)’이라는 한자말에 밀리더니, 요즈음에는 ‘브런치(brunch)’와 ‘디너(dinner)’라는 영어가 새삼스레 스며듭니다.


  그렇다고 요즈막 아이들더러 영어를 쓰지 말라느니, 애먼 한자말을 지식자랑 삼아 쓰는 일은 나쁘다느니 하고 나무랄 수 없습니다. 쓸 만한 영어라면 쓸 노릇이고, 알맞게 쓰는 한자말은 알맞다 할 만합니다. 다만, 스스로 어느 자리에 어떤 낱말을 쓸 때에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빛나는가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아무 영어나 한자말을 함부로 쓸 때에는 반갑지 않습니다. 어느 자리에 어떤 낱말을 써야 좋은가를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삶도 넋도 말도 흐물흐물 시들어요.


  으레 ‘의사소통’을 하려고 말을 주고받는다 하는데, ‘의사소통(意思疏通)’이란 무엇인지부터 옳게 살펴야지 싶습니다. 이 한자말 의사소통은 “생각이나 뜻이 서로 제대로 흐르는 일”을 가리킵니다. 흔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하고들 얘기합니다만, 참말 ‘알’기에 이렇게 얘기하는지는 아리송해요. 넘겨짚는다거나 어떤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뜻으로 ‘의사소통’을 들지 않느냐 싶어요. 곧, 사람과 사람이 참답게 의사소통을 하는 일이란 ‘생각을 제대로 밝혀 주고받는 일’이요, 생각을 제대로 밝혀 주고받자면, 나 스스로 읊는 내 말이 내 모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생각이 담기도록 슬기롭게 가다듬어야 알맞습니다. 사이좋게 놀던 동무하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어떤 인사말로 내 좋은 느낌을 나누어야 기쁠까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랜 벗한테 띄우는 글월에 어떤 말마디로 내 삶과 넋과 말을 담아야 사랑스러울까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결이 그을리도록 노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너는 ‘깜순이’로구나.” 하고 말합니다. 이윽고 ‘까미’, ‘까망이’, ‘깜씨’, ‘까망둥이’ 같은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립니다. 말괄량이처럼 노는 아이라 한다면 ‘말괄까미’라 이름을 붙여도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것을 바라보면서, 누군가는 방석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깔개라 말하며 누군가는 쿠션이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이 바라보는 이 똑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세 사람이 바라보는 이 똑같은 것을 영어나 프랑스말이나 중국말로 옮긴다 할 때에는 어떻게 적바림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여느 자리에서 영어를 익숙하게 쓰는 까닭은, 어른들부터 여느 자리에 영어를 익숙하게 쓰기 때문인데, 어른들은 무엇을 생각하거나 바라며 여느 자리에 영어를 익숙하게 쓰나요. (4345.6.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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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8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6-08 15:17   좋아요 0 | URL
저는 늘 괜찮아요.
저는 저 스스로 제 삶과 마음을 제 깜냥껏 사랑으로 다스리거든요.

부디 스스로 가장 좋은 사랑으로 돌보실 수 있기를 빌어요.
서재를 떠나고 안 떠나고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아요.

방명록에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앞으로는 부디
'무익한 논쟁'이 아닌
'즐거울 글'을 기쁘게 쓰시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익명'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무익한 말놀이에 말다툼'만
벌여 버릇하거든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얼마나 바보짓 말다툼을 하는가
깨닫지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