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설’과 ‘말하기’와 ‘떠벌리기’
[말사랑·글꽃·삶빛 10] 내 말은 내 사랑이다

 


  생각을 가만히 기울이면서 말할 때에 내 말투는 씩씩하게 섭니다. 마음을 따스히 쓰면서 말할 때에 내 말마디는 어여삐 빛납니다. 사랑을 알뜰히 들이면서 말할 때에 내 말결은 보드라이 샘솟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말을 합니다. 따로 ‘표준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가장 사랑하는 글을 씁니다. 따로 ‘맞춤법’에 걸맞게 글을 쓰지 않습니다. 내 생각을 씩씩하게 다스릴 말을 합니다. 내 마음을 따스하게 북돋울 글을 씁니다. 내 사랑을 보드라이 보듬을 이야기를 나눕니다.


  흔히들 ‘바른 말 고운 말’을 이야기합니다. 말을 바르게 써야 한다 말하고, 글은 곱게 써야 한다 얘기합니다. 나는 이 같은 목소리가 틀리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바른 말 고운 말’은 가없이 마땅하다고 느낍니다. 다만, 어떤 바른 말이고, 어떻게 고운 말인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 들려주는 표준말이 바른 말이라 할 만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말글학자가 얘기하는 맞춤법이 고운 말이라 할 만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바르다’와 ‘곱다’를 밝히자면 무엇보다 바른 삶과 고운 삶을 밝혀야지 싶어요. 바른 넋과 고운 넋을 나란히 밝혀야지 싶어요. 바른 꿈과 고운 사랑을 함께 밝혀야지 싶어요.


  사람들한테 어떤 ‘말 지식’을 얘기한대서 바르게 쓸 말이 서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사람들한테 어떤 ‘말 정보’를 알려준대서 곱게 쓸 말이 퍼지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삶을 바르게 볼 줄 모르면서 말을 바르게 볼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착한 일을 즐기지 못하거나 고운 나날 누리지 못하면서 말만 곱게 꾸밀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말’이란, 내 삶을 드러내는 얼굴이라고 느낍니다. ‘글’이란, 내 사랑을 적바림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사람들 스스로 어디에서 어떤 삶을 누리는가를 톺아볼 수 있어야 사람들 스스로 어디에서 어떤 말을 익히며 나누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어떤 일을 어떤 넋으로 하는가를 깨달을 수 있어야 사람들 스스로 사랑어린 말과 믿음직한 글로 생각을 드러냅니다.


  일본사람 우오즈미 나오코 님이 쓴 청소년책 《원예반 소년들》(양철북,2012)을 읽다가 39쪽에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는 대목과 “어쨌거나 발설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이거지?” 하는 대목을 봅니다. 44쪽에서는 “나가서 떠벌리지 않을까요?” 하는 대목을 봅니다. 세 가지 글월을 나란히 놓고 생각에 잠깁니다. 읽던 책은 내려놓고 한동안 생각에 빠집니다. 내가 열대여섯 살 푸름이였을 적, 나는 어떤 낱말과 말투로 내 넋을 가누었을까 하고 돌이킵니다. 내 열대여섯 살에는 누구한테서 듣거나 배운 말마디로 내 넋을 드러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내 열대여섯 살 말밭은 어떤 낱말로 이루어졌던가 하고 되돌아봅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늘 주고받는 말마디가 내 말마디가 되었을까요. 동무들하고 주고받는 말마디가 내 말마디가 되었을까요. 교과서에 적힌 글줄과 교사들이 읊는 말소리가 내 말마디로 녹아들었을까요. 나는 어떤 말을 어떤 넋으로 어떤 사랑을 담아 나누던 푸름이였을까요.


  한자말 ‘발설(發說)’은 “입 밖으로 말을 냄”을 뜻한다 합니다. 나는 푸름이였을 적 이 한자말을 알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발설’뿐 아니라 ‘입 밖에 내다’라든지 ‘벙긋하다’ 같은 말도 알았다고 느낍니다. 열대여섯 살 무렵, 나와 동무들이 주고받던 말마디를 하나씩 되새기며 적어 봅니다. 첫째, “너, 말하지 마.” 둘째, “너, 입도 벙긋하지 마.” 셋째, “너, 입 다물어.” 넷째, “너, 조용히 해.” 다섯째, “너, 일러바치지 마.” 여섯째, “너, 호박씨 까지 마.” 일곱째, “너,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


  이밖에, 이무렵 나와 동무들이 알던 말로 ‘고자질(告者-)’이 있고, ‘발설(發說)’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말은 어른들이 으레 쓰기에 우리들도 더러 썼지, 우리 스스로 먼저 쓰지 않았습니다. 동무들이나 아이들끼리는 언제나 “너, 선생님한테 일렀지?”처럼 말했습니다. 이무렵 ‘말하다’와 ‘이르다’가 서로 어떻게 같거나 다른가를 알지 못했지만, 두 가지 말을 골고루 썼어요. ‘호박씨 까기’는 좀 다른 자리에 쓴다고 하지만, 내 어릴 적 동무들은 몰래 읊는 말도 호박씨를 깐다고 함께 얘기했어요. 뒤에서 주절거리는 말도 ‘호박씨 깐다’고 했어요. “너 어디서 호박씨 까고 다니냐?”처럼.


  더 뒤돌아보면, 이무렵 어른들은 우리한테 ‘이르다’가 어떤 뜻이거나 쓰임이거나 느낌인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는 열두 해 동안, 어느 국어 교사도 이 대목을 짚지 못했습니다.


  고등학생 때에는 때때로 ‘언쟁(言爭)’이나 ‘논쟁(論爭)’ 같은 말을 듣거나 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낱말을 쓰면서 어딘가 꺼림칙했어요. 나는 열 살에 천자문을 떼며 한자를 조금 익혔는데, 어른들이 쓰는 ‘언쟁’이나 ‘논쟁’이란, 말뜻을 풀면 한국말로 ‘말다툼’이나 ‘말싸움’이에요. 어느 자리에서는 ‘다툼’이라기보다 ‘나눔’이었어요. 서로 말을 나누는 자리인데, 언제나 버릇처럼 ‘논쟁’이라 하더군요. 삶 매무새 그대로 ‘말나눔’이나 ‘이야기나눔’ 같은 낱말을 즐겁게 빚을 만하지만, 어른들은 이렇게 새말을 빚어 즐겁게 쓰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합니다. 한국사람이니까요.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합니다. 일본사람이니까요. 중국사람은 중국말을 할 테지요. 중국사람이니까요. 그러면, 한국사람이 주고받는 한국말은 어떤 한국말일까요.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한국말답다 할 만할까요.


  한자말 ‘발설’은 한국사람이 쓸 만한 한국말로 여겨도 될까요. 이 낱말을 ‘한국말사전’에 싣거나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싣거나 청소년책에 넣어도 괜찮을까요.


  어른 나이로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은 푸름이 나이로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 앞에서 어떤 말을 쓰는가요.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을 쓰나요. 어떤 사랑으로 어떤 글을 짓나요. (4345.5.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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