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82 : 고향이 되는 책
2006년에 처음 나온 《열네 살의 철학》(민들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 푸름이 가운데 30만 남짓 이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하기에 그리 많이 읽는가 생각하다가는 그만 이 책을 잊은 채 여러 해 흐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봅니다. 나는 2006년 3월에 이 책이 나올 무렵 삶터를 옮겨야 했습니다. 이무렵부터 책짐을 싸서 이듬해 봄에 새 삶터로 옮겼지만, 혼자 책짐을 꾸리고 새 삶터를 알아보러 다니느라 이무렵 갓 나온 이 책은 끈으로 친친 묶인 채 한 해를 넘겼고, 새 삶터로 옮긴 뒤에도 끈에서 좀처럼 풀리지 못하다가 또 두 차례 더 삶터를 옮깁니다. 느긋하게 책을 펼칠 겨를 없이 하루하루 보냈어요. 이제 우리 식구는 고즈넉한 시골마을에 기쁘게 집을 얻어 지내기에 다시는 책짐을 꾸리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그마치 여섯 해만에 《열네 살의 철학》이라는 책을 ‘갓 나온 책’으로 삼아 읽습니다.
“나와 인류 전체는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좋아지지 않으면 인류는 좋아지지 않는 거야(170쪽).”라든지 “부모님은 일을 하기 위해 사는지, 아니면 살기 위해 일하는지, 과연 어느 쪽일까(131쪽)?”라든지 “관념이 현실을 만들지, 현실이 관념을 만드는 건 결코 아니야(92쪽).”라든지, 천천히 밑줄을 그으며 찬찬히 되새깁니다. 사람들이 쓰는 말은 어떻게 해서 태어났을까를 생각해 보자(40쪽)는 대목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서 내가 오늘 적바림하는 글 한 줄에는 어떠한 사랑과 꿈이 깃드는가를 되새깁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버지더러 ‘책 그만 읽’고 ‘저희랑 같이 놀’자고 합니다. 책을 덮습니다. 아버지라고 책만 읽는 사람이 아니라,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너희랑 복닥이고 또 너희 밥을 먹이고 또 너희 옷을 빨고 또 너희 잠잘 집을 치우고 또 너희 누릴 온갖 것 건사한다며 땀흘리다가, 등허리 두들기며 살짝 허리 펴자면서 이렇게 몇 분쯤 책을 쥘 뿐인데, 요만큼이나마 봐주면 안 되겠니, 하는 말이 슬며시 새어나려다가 맙니다. 새삼스레 이런 말 한 마디 다시금 돌아봅니다.
아이랑 손을 잡고 달립니다. 아이를 안고 간지럼 피웁니다. 같이 노래하고 같이 풀내음 맡습니다. 아이들 모두 가까스로 재우고 나서 살짝살짝 넘기던 《어머니전》(호미,2012)에 나오는 이 나라 섬마을 어머니들 삶이 떠오릅니다. 《어머니전》을 쓴 강제윤 님은 섬마을에서 만나는 할머니(어머니)들한테서 얘기를 찬찬히 듣고는 책 하나로 갈무리했는데, 어느 섬마을을 찾아가든 “이제는 할머니가 스스로 고향이 되었다(39쪽).”고 느낀다는 생각자락을 적바림합니다. 그래, 이런 말마따나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네 어머니랑 아버지’하고 ‘어머니네 어머니랑 아버지’를 뵈러 먼먼 마실을 다닙니다. 아이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보려고 먼먼 길을 기꺼이 찾아오십니다. 내 어머니와 옆지기 어머니는 당신 스스로 ‘고향’입니다. 나와 옆지기는 우리 스스로 아이한테 ‘고향’입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와 옆지기 아버지한테 우리 집 두 아이는 ‘또다른 고향’이 됩니다. 먼먼 길 고단히 달려오면서 싱긋 웃을 수 있습니다. 먼먼 길 바쁜 틈 쪼개어 찾아오면서 맑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4345.5.20.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