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전 -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소설이다
강제윤 지음, 박진강 그림 / 호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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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책에 이름 몇 글 적히지 않아도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48] 강제윤, 《어머니전》

 


- 책이름 : 어머니전
- 글 : 강제윤
- 그림 : 박진강
- 펴낸곳 : 호미 (2012.5.1.)
- 책값 : 15000원

 


  어머니는 딸을 낳고, 어머니는 할머니 되며, 딸은 어머니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아버지는 할아버지 되며, 아들은 아버지 됩니다. 느티나무는 느티씨를 떨구어 어린 느티나무를 키웁니다. 단풍나무는 단풍씨를 떨구어 어린 단풍나무를 키웁니다.


  어린나무가 씨를 맺어 땅에 떨굴 때까지는 퍽 오랜 나날이 걸립니다. 사람들은 열매나무를 몇 해만에 금세 키우고 굵다란 열매까지 척척 열리게끔 하지만, 꽃을 피우든 열매를 맺든 하자면, 작은 씨앗 하나는 오랜 나날에 걸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며 잎을 틔웁니다. 여러 해나 열 몇 해 지나야 비로소 첫 꽃송이와 첫 열매를 맺어요.


.. “배추를 생으로 쌈 싸 먹고 채독에 걸리면 그 벌레가 사람 피를 빨아 먹어. 그냥 두면 죽어라우. 한디 옥수수 수염 대려 먹으면 나섰어.” 병이 있으면 병을 낫게 해 주는 약도 곁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옛날에는 약만 먹고 살았어. 도라지랑 더덕이랑 맨날 노물(나물)로 먹고 살았제.” 할머니는 그런 약초들을 캐다 팔아 자식들을 키우고 교육시켰다 … 할머니는 어제 딴 강낭콩 두 가마니를 삼천포 장에 내다 팔고 오는 길이다. 10킬로그램에 일만오천 원, 두 가마라 해 봐야 겨우 삼만 원이다. 씨 뿌리고, 키우고 결실을 얻어다 파는 값이 이토록 헐하다. 농사가 얼마나 천대받는 시대인가 … 저 고무 대야 속 작은 전복 하나에도 잠녀들 목숨 값이 들어 있다 ..  (13, 44, 67쪽)


  우리 집 뒤꼍 뽕나무를 올려다봅니다. 이 뽕나무에서는 오디가 맺힐 테고, 오디가 맺히기 앞서 뽕꽃이 필 텐데, 뽕꽃은 어떤 모양일까 궁금합니다. 봄맞이 숱한 들꽃과 나무꽃을 말하는 사람 많은데, 막상 이른봄 찾아드는 느티꽃이라든지 굴참꽃이라든지 떡갈꽃을 생각하거나 살피거나 얘기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아무래도 하얗거나 노랗거나 분홍빛 감도는 꽃잎 아니고는 익숙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붉은 빛이거나 보라빛 아니라면 꽃잎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단풍나무에는 단풍꽃이 핍니다. 은행나무에는 은행꽃이 핍니다. 소나무에는 솔꽃이 필 테지요. 나무는 줄기를 굵고 높고 튼튼히 뻗으면서 꽃을 피웁니다.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습니다.


  사람은 생각을 하고 사랑을 나누며 차근차근 씩씩한 어른이 되면서 몸속에 씨앗을 품습니다. 몸속에 품은 씨앗으로 아이를 하나만 낳을 수 있고, 열을 낳을 수 있습니다. 씨앗을 모두 목숨으로 맺어야 하지 않아요. 씨앗은 씨앗대로 몸속에서 곱게 깃들다가 몸안으로 스며들 수 있어요. 씨앗은 좋은 꿈을 만나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어요. 씨앗은 새로운 씨앗으로 이어지며 우리들 살아가는 지구별을 아름다이 돌보는 밑힘이 될 수 있어요.


  돌이켜보면, 나무들은 나무씨를 내며 지구별을 푸르게 가꿉니다. 풀들은 풀씨를 내며 지구별을 푸르게 돌봅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씨를 내어 지구별을 어떤 빛깔로 가꾸는가요. 사람은 사람씨를 맺을 때에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사랑을 나누는가요. 사람은 저마다 몸에 품은 씨앗을 알뜰히 건사하나요. 사람은 스스로 몸에 품은 씨앗을 예쁘게 아끼나요.


.. “부친 모친 가시고 나니 갈 일이 있나.” 이제는 할머니가 스스로 고향이 되었다 … 장소가 고향이 아니다. 사람이 고향이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고향이다. 할머니는 이미 스스로 자식들의 고향이 되었으니 어디에 달리 고향이 있겠는가 ..  (39, 189쪽)


  아침이 되어 아이들이 하나둘 깨어납니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이 하나둘 잠듭니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 무언가 집일을 해 보려 하지만, 내 몸도 고단해서 아이 곁에 나란히 쓰러집니다. 아이들이 잘 때에 함께 자고, 아이들이 일어날 때에 같이 일어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이들보다 몇 시간 일찍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깨기 앞서 하루를 열며 아침을 맞습니다. 아침밥 차리려고 부엌일을 하든, 아이들 옷가지 빨래하려고 밑빨래를 해 두든, 아이들이 새근새근 꿈나라를 누빌 때에 조용히 일어납니다.


  내 어머니도 내가 갓난쟁이였을 적에 이와 같았겠지요. 내 아버지도 내가 어린이였을 무렵에 이와 같았겠지요.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낳아 돌본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와 같았을 테고,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가며 마주할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이와 같았을 테지요.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는 언제나 아이들하고 함께하면서 아이들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널리 살피며 더 깊이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는 늘 아이들하고 복닥이면서 아이들보다 더 힘을 쓰고 더 사랑을 북돋우며 더 꿈을 키웁니다.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받은 사랑을 누립니다. 내 아이들은 나와 옆지기한테서 받는 사랑을 누립니다. 사랑을 물려주는 어버이는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사랑을 물려주지 못하는 어버이는 사랑 없이 메마르게 살아갑니다.


  나무는 씨앗에 무엇을 담을까 생각해 봅니다. 풀은 씨앗에 무엇을 실을까 헤아려 봅니다. 어른나무는 작은 씨앗이 앞으로 어떻게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기 바랄까요. 봄날 짙푸르게 우거지는 풀들은 저희 풀씨가 앞으로 어떤 땅에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기를 꿈꿀까요.


.. 아주머니는 난생처음 본 나그네지만, 집에 들렀으니 뭐라도 대접하고 싶었던 게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넙죽 받아먹는다. 평생 다시 마주칠 일 없을 나그네한테 베푸는 마음이란, 대체 어떤 마음일까 … “오늘 연락선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우리 손죽도가 훤합니다.” 할머니는 손죽도를 찾아와 준 나그네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  (105, 156쪽)


  섬마을을 돌며 ‘어머니’한테서 이야기를 듣는 강제윤 님이 빚은 《어머니전》(호미,2012)을 읽습니다. 《어머니전》에 나오는 이들은 강제윤 님한테 어머니라 할 만한 분입니다. 누군가한테는 이들 ‘어머니’가 ‘할머니’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한테는 이들 ‘어머니’가 ‘동무’일 수 있습니다.


  강제윤 님이 섬마을에서 만나는 예순 일흔 여든 아흔 줄에 접어든 어머니 들은 하나같이 일을 합니다. ‘일’이라 했지만, 당신들 어머니 삶을 이어온 하루를 날마다 새롭게 맞이합니다.


  바다에 나가든 물을 만지든 흙을 보듬든, 어머니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아주 늙은 오늘까지 일을 하고 삶을 꾸리며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들은 언제나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씁니다. 어머니들은 어디에서나 아이들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며 들판을 사랑합니다.


  몸으로 아이를 품는 어버이라서일까요. 몸으로 아이를 품지 않더라도 가슴으로 아이를 품는 어버이라서일까요. 아버지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사랑은 왜 어머니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사랑처럼 따스하거나 너르거나 깊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아버지들은 왜 스스로 아이한테 따스하며 너르면서 깊은 사랑을 물려주려는 넋을 품지 않는 듯 보일까요. 아버지도 아이였을 적에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았을 텐데, 아이일 적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을 스스로 어버이가 된 다음 아이한테 얼마나 어떻게 물려주는 삶일까요.


.. 다 밥 먹고 살자고 사는 세상 아닌가. 밥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섬이라고 무엇이 다르랴. 많은 사람이 도시에 살지만, 그들 또한 밥벌이를 위해 직장이라는 섬에 갇혀 살지 않는가 … 어느 쪽이든 자동차를 타고 서둘러 왔다가 서둘러 떠난다. 서두르지 않는 사람도 대개는 섬에 몰입하기보다는 놀이나 식도락에 몰두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섬에 와서도 섬을 보지 못한다 … “조개도 옛날 같지 않고 밤낮 자디잘아유. 원래 이게 물물이 크는 건데 밤낮 봐야 콩알 같아. 삶아 논 것마냥 안 커요.” 보름 한 물때마다 몰라보게 씨알이 굵어지던 것이 이제는 삶은 조개처럼 아예 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근처에 있는 보령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매연 때문이다. 나무들도 시들시들하다가 썩어 주저앉는다. 밭작물도 제대로 자라는 것이 없다 ..  (159∼160, 162, 174쪽)


  ‘밥 먹고 살자’는 누리입니다. 나도 먹고 너도 먹으며 함께 살아가자는 지구별입니다. 어른도 밥을 먹고 아이도 밥을 먹습니다. 사람도 밥을 먹고 벌레도 밥을 먹습니다. 나무도 풀도 꽃도 새도 나비도 밥을 먹습니다. 저마다 밥상이 다르고, 저마다 집이 다르며, 저마다 아기씨가 다릅니다. 다 다른 곳에서 저마다 사랑을 피우면서 생각을 빛냅니다.


  밥은 얼마나 어떻게 먹을 때에 즐거울까요. 내 몸을 따스하게 채우는 밥은 얼마쯤 먹을 때에 흐뭇할까요. 밥은 어떻게 차릴 때에 기쁠까요. 내 마음을 너그러이 보듬는 밥은 누구하고 먹을 때에 아름다울까요.


  고속도로는 누가 지을까요. 제철소와 발전소는 누가 지을까요. 고속철도는 누가 지을까요. 공항과 항구는 누가 지을까요. 군대는 누가 만들까요. 탱크와 전투기와 항공모함은 누가 만들까요. 경제발전은 왜 이루어야 할까요. 사회복지와 문화예술은 왜 이루어야 하나요. 대학교에는 왜 가야 하고, 인터넷은 왜 해야 하나요.


  무엇을 하며 살아갈 때에 기쁜 하루일까요. 무엇을 누리는 삶일 때에 아름다운 꿈일까요. 무엇을 아이들과 어깨동무하면서 즐기면서 고마운 나날일까요.


.. 나그네는 수백 년을 이어 온 이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 못내 애석하다. 문화재란 무엇일까. 이미 사라져 쓸모없는 관청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과연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일일까. 저 오래된 마을과 집과 돌담과 나무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닐까 … 이 마을에도 돌담 대신 담장들은 대부분 블록 벽돌담이다. 사십여 년 전,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때 돌담을 헐어 버리고 쌓은 것이다. 돌담은 수백 년 세월에도 변함없이 튼튼한데 저 벽돌은 벌써 썩어서 시커멓다 … 이들 섬에는 각기 드라마 촬영장과 영화 촬영지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이 관광 상품으로서, 가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풍광 좋은 해변마다 촬영장이 들어서고 그것들이 마치 섬을 대표하는 문화처럼 선전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오래된 섬살이의 흔적들은 증발해 버리고 가상의 드라마가 현실의 자리를 대체해 버렸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수천 년 역사의 섬에서 고작 내세울 것이 멜로드라마나 영화 촬영장뿐이라면 그것은 코미디다 ..  (17, 54, 162쪽)


  어머니들이 살아가는 오늘은 고스란히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삶이야기’이고, 하루를 지나면 ‘옛이야기’입니다. 아버지들이 살아가는 오늘 또한 하나하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삶이야기’이고, 이듬날부터는 ‘옛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이야기를 짓습니다.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이야기를 짓습니다. 더 좋다거나 더 궂다 싶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더 기쁘다거나 더 슬프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살아가며 누리는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며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며 웃고 우는 이야기입니다. 좋다 싶은 일을 마주하면 좋다 싶은 생각으로 이야기를 빚습니다. 궂다 싶은 일을 부딪히면 궂다 싶은 생채기로 이야기를 빚습니다.


  오누이는 해와 달이 되기도 하고, 푸른개구리는 엄마개구리 말하고 어긋난 짓을 일삼다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눈도 코도 귀도 손도 발도 하나뿐인 아이는 홀로 씩씩하게 크며 힘센 기운을 착한 곳에 씁니다. 팥죽을 나누어 먹은 밤알이며 까치이며 늙은 할멈을 거들어 범한테서 작은 보금자리를 지킵니다. 콩쥐도 팥쥐도 모두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흥부도 놀부도 한결같이 귀여운 아이입니다. 방귀를 뀌어도 며느리요, 바느질이 서툴어도 옆지기입니다. 낫질을 잘 해도 옆지기일 테고, 글을 못 읽어도 사위일 테지요.


  모두들 사랑스럽게 얼크러지며 밥을 먹는 삶입니다. 저마다 살가이 어깨동무하며 밥을 나누는 삶입니다. 어머니들은 섬에서 수천 해 수만 해를 살았습니다. 따로 이름 석 자 없이도 아이를 사랑으로 낳고 사랑으로 돌봅니다. 족보나 역사책에 이름 몇 글 적히지 않아도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도 사랑으로 키웁니다. 《어머니전》은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삶”입니다. “어머니 사랑”입니다. “어머니 꿈”입니다. 아이를 낳고 돌보며 즐거이 누린 고운 빛입니다. (4345.5.1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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