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빛깔있는책들 - 한국의 자연 174
박기성 지음, 심병우 사진 / 대원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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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사랑스러운 삶터를 사진으로
 [찾아 읽는 사진책 90] 심병우·박기성, 《울릉도》(대원사,1995)

 


  우리 집 둘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기를 날마다 빌면서 생각합니다. 둘째 아이가 아버지 자전거수레에 탈 수 있으면 언제라도 네 식구 즐겁게 자전거마실을 다닐 수 있으리라고. 이제 둘째는 첫째와 함께 자전거수레에 앉습니다. 처음에는 퍽 못마땅해 했지만, 요사이는 자전거수레에 앉히면 몹시 좋아합니다. 꼭 첫째 때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첫째는 자전거수레에 처음 타던 날 대단히 무서워 했어요. 그러더니 이내 더 태워 달라 보챘고, 이제는 자전거수레에 타고 함께 마실 다니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옆지기 자전거 뒷바퀴에 자꾸 실바람이 생겨 튜브를 통째로 갈아야겠다고 느낍니다. 마침 따사로운 봄날씨인데 뒷바퀴 때문에 네 식구 나란히 자전거마실 다니기를 못합니다. 읍내에 나가 자전거집에 튜브를 알아보지만 시골 읍내에는 마땅한 튜브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큰도시로 가거나 인터넷으로 물건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기로 했으면, 이런저런 물건을 스스로 손질하거나 짓거나 다듬을 수 있도록 몸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다시금 깨닫습니다.


  도시에서 살던 나날을 문득 떠올립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도시를 벗어나 여러 날 자전거마실을 해야 할 때에는 자전거 손질하는 연장을 한 꾸러미 챙깁니다. 언제 어디에서 못을 밟아 바퀴나 튜브가 찢어질는지 몰라요. 언제 어디에서 브레이크슈가 다 닳거나 망가질는지 모르며, 체인이 끊어지거나, 건전지가 다 닳거나, 어떤 일이 생길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갑작스레 비를 만날 수 있고, 돌을 밟고 넘어져 뒹굴 수 있어요. 시골 두메나 멧길에서 자전거집을 들를 수 없을 뿐더러, 찬찬히 갖춘 연장을 만나기 어려운 줄 미리 헤아립니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제대로 즐기지 못합니다. 제대로 돌아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여태껏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돌아보지 않았다면, 오늘부터 제대로 살피거나 돌아볼 노릇입니다. 찬찬히 살피고 가만히 돌아봅니다. 찬찬히 아끼고 가만히 사랑합니다. 나는 내 가장 가까운 곳 사람들, 곧 살붙이부터 살피고 돌아볼 노릇입니다. 내 옆지기와 아이들부터 아끼고 사랑할 노릇입니다. 네 식구 살아가는 우리 시골마을을 아끼고 사랑할 노릇입니다. 머나먼 좋은 나라나 멀디먼 예쁜 나라를 바라기 앞서, 네 식구 오래오래 살아가고 싶어 뿌리내리는 시골마을 둘레를 즐겁게 나들이할 노릇이에요.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늘 내 삶터부터 사진으로 찍거나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릴 때에 가장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서울사람한테는 서울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인천사람한테는 인천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고흥사람한테는 고흥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서울사람한테 제주섬이 가장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제주섬이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서울사람이라면, 서울을 떠나 제주섬에서 살아야 합니다. 울릉섬을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부산사람이라면, 부산을 떠나 울릉섬에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터전에서 삶자리를 꾸려야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 느낄 만한 나날을 누리거든요.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 여기지 못하는 곳에서는 스스로 썩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망가뜨리거나 덧없이 보냅니다. 돈을 벌든, 사랑짝을 찾든, 학교를 다니든, 무엇을 하든, 스스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곧,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 어떠한 일이든 돈을 많이 벌 만한 곳으로 가면 됩니다. 마음이 느긋하면서 기쁜 채 돈을 벌고 싶으면 돈크기를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좋은 일터를 찾으면 됩니다. 얼굴 예쁜 색시를 만나고 싶으면 사람들을 얼굴로만 따지면 됩니다. 마음 착한 동무를 사귀고 싶으면 사람들을 마음씨로 어깨동무하면 돼요.


  가장 바라는 꿈대로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립니다. 가장 아끼는 모습대로 가장 빛나는 사진을 빚습니다.


  심병우 님 사진과 박기성 님 글이 어우러진 《울릉도》(대원사,199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발을 묶는 바다는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살진 오징어와 명태, 방어가 무궁무진하고 기른 것 아닌 천연 미역과 돌김은 인건비가 안 빠져 못 딴다(13쪽).”고 하는데, 두 분은 울릉섬을 몇 차례쯤 마실해 보았을까요. 울릉섬 마실을 하는 몇 차례에 걸쳐 며칠쯤 묵어 보았을까요. 얼마나 울릉섬에서 살고 나서 이와 같이 글을 쓰고, 이러한 책에 사진을 담을 수 있을까요.

 


  고작 열흘이나 기껏 두어 달쯤 살아내고서 어느 한 마을을 들려주거나 보여준다 하는 사진책이나 이야기책을 낸다면, 이런 책은 빈 껍데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흘이나 두어 달을 살아낸 사랑을 속속들이 일구어 아름다이 엮을 줄 안다면, 이런 책은 넉넉하고 따스한 알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말 누군가는 딱 한 번 스치듯 지나가며 담은 사진으로도 ‘사진여행’을 풀어놓습니다. 참말 누군가는 태어나서 자라거나 여러 해 살더라도 ‘사진여행’뿐 아니라 ‘사진삶’조차 풀어놓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 마음 때문입니다.


  《울릉도》를 읽습니다. “신천지인 까닭에 유물·유적이 거의 없지만 볼거리는 많다. 역사가 보잘것없는 미국사람들이 1872년에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이라는 것을 만들어 자랑거리로 삼았듯, (울릉도는) 곳곳에 천연기념물 지역을 두었다(19쪽).”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것(울릉 9경)을 모두 보려면 아무래도 섬을 한 바퀴는 돌아야 한다. 배나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그리고 성인봉을 오르고 나리분지에도 가 봐야 한다(24쪽).”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쟁이 심병우 님이나 글쟁이 박기성 님은 울릉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손님입니다. 그렇다고 뻔질나게 드나드는 손님도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땀방울을 영글어 《울릉도》를 내놓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랑이 아리땁게 모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더 멋스럽다 싶은 사진을 찍을 테고, 누군가는 더 놀랍다 싶은 이야기를 글로 옮길 테지요. 그런데, 더 멋스럽다 싶은 사진이나 더 놀랍다 싶은 글이 꼭 있어야 되지는 않아요. 스스로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사진이나 글이면 돼요. 스스로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사진이나 글이면 넉넉해요.


  내 사랑스러운 삶터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덧붙여, 내 사랑스러운 꿈터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어여쁩니다. 그리고, 내 사랑스러운 이야기터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아리땁습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이 미국땅을 자동차를 몰아 두루 돌며 담은 《미국사람들》이라는 사진책은, ‘자동차를 몰아 넓고 큰 미국땅을 두루 도는’ 느낌을 담습니다. 더 돋보이거나 더 멋스러운 모습이나 느낌을 담지 않습니다. 그저 ‘넓고 큰 미국땅 온갖 모습과 느낌’을 담습니다. 사진책 《울릉도》는 자동차나 버스나 헬리콥터나 배에 기대지 않고 두 다리로 즐기거나 누린 울릉섬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보여줍니다. 어느 쪽이 더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더 거룩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더 멋스럽지 않습니다. 그저 저마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른 눈길로 담습니다. 세계사진역사에 이름을 올린다 해서 더 돋보일 까닭이 없고, 한국사진역사에조차 이름을 못 올린다 해서 덜 떨어질 까닭이 없습니다.


  《울릉도》에 실린 “천부에서 한 시간 반쯤 걸려 올라선 고개는 세상 모를 딴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사방이 험상궂은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거짓말처럼 설원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여남은 채의 집들이 겨울잠을 자고 있다(85쪽).”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추운 겨울날 한 시간 반쯤 눈밭을 헤치며 멧자락을 누빈 이야기입니다. 삶을 담고 사랑을 들려주고 꿈을 보여줍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느낄 사진을 빚습니다. (4345.4.25.물.ㅎㄲㅅㄱ)


― 울릉도 (심병우 사진,박기성 글,대원사 펴냄,1995.9.5./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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