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는 어떤 마음일까
[말사랑·글꽃·삶빛 5] 뜻을 살피지 않는 한국사람
책을 읽습니다. 한국글로 적힌 책을 읽습니다. 한겨레가 빚은 글이기에 ‘한글’이고, 한글은 ‘한국사람이 쓰는 글’, 곧 ‘한국글’입니다. 한국글로 적힌 책은 한국말을 옮겼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글인 한글로 적었다 해서 모두 한국말이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온 나라에 있는 빵집 가운데 ‘빠리바게뜨’나 ‘뚜레쥬르’는 한국글로 적었어도 한국말이 아닙니다. ‘라이브쇼’는 한국말이 될까요. ‘녹음방초승화시’나 ‘남아수독오거서’는 한국말이라 할 만한가요. ‘만땅’이나 ‘오라이’나 ‘땡큐’나 ‘바이바이’는 모두 한국글로 적은 모습인데, 이들 한국글은 한국말로 삼아도 되나요.
푸름이가 읽도록 엮은 책 하나를 읽다가 “배려하는 마음을 상대도 알 수 있도록 드러내 보이는 행동 방식이 바로 예의야” 하는 대목을 봅니다. 책은 줄거리를 헤아리자고 읽는 책이기에, 낱말 몇 군데나 말투 곳곳이 엉클어지거나 뒤틀렸어도 가볍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틀린 글로 엮은 책이라 해서 줄거리를 못 헤아리지 않아요. 한국말을 알맞거나 알차게 다스리지 못한 글로 빚은 책이기에 줄거리가 흐려지거나 감추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배려하는 마음”을 들려주는 푸른책 한 권을 읽으면서, 글쓴이가 밝히고픈 뜻을 넉넉히 헤아립니다. 다만, 줄거리는 줄거리대로 읽되 한국말은 한국말로 살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국어사전에서 ‘배려’라는 낱말을 찾아봅니다. 뜻풀이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이라 합니다. 한국글로 ‘배려’로 적지만, 이 낱말 온 모습은은 ‘配慮’입니다.
配慮 = 마음을 씀, 마음쓰기, 마음씀
배려하는 마음 = 마음쓰기하는 마음, 마음쓰는 마음
한국글로 적자니 ‘배려’이기에, 얼핏 이 낱말을 한국말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配慮’는 ‘配慮’이지 ‘배려’가 아니에요. 한자말 ‘配慮’는 한국글로 적어도 한국말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한국말 시늉을 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말은 ‘마음쓰기’나 ‘마음씀’입니다.
이 대목에서 찬찬히 마음을 쓰면서 살펴봅니다. 누군가한테 “마음을 쓰는” 일이란,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쓰는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는 뜻으로 마음을 씁니다. 곧, 한국말 ‘마음쓰기’나 ‘마음씀’은 한자말 ‘配慮’를 쓰는 뜻하고 한동아리입니다. 다만, 국어사전에는 ‘마음쓰기’나 ‘마음씀’ 같은 낱말이 안 실려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살피도록 마련하는 국어사전에는 한국말을 안 싣고 한자말을 잔뜩 싣고 맙니다.
푸른책을 읽다 만난 “배려하는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이 대목은 이렇게 적어서는 옳게 뜻을 알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이 책 이 대목을 읽으며 글쓴이 뜻이 무언지 어렵잖이 헤아려요. 글쓴이가 무얼 말하려 하는지 읽습니다. 말투와 말법과 낱말은 엉성하지만, 뜻은 새깁니다.
뜻을 알 수 있다 하면서 한국말을 자꾸자꾸 얄궂게 쓰거나 엉터리로 씁니다. 뜻만 알 수 있도록 하면서 한국말을 제대로 익히거나 올바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푸른책에서 본 글월을 새롭게 적어 보겠습니다.
내 마음을 알 수 있도록 드러내 보이는 몸가짐이 바로 예의야
내가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 알 수 있도록 드러내 보이는 몸짓이 바로 예의야
넉넉한 마음을 알 수 있도록 드러내 보이는 매무새가 바로 예의야
‘配慮’이든 ‘마음쓰기’이든 내가 너한테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처럼 다듬습니다. 말투를 손질해서 “내가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나 “내가 어찌 마음을 쓰는가”나 “내가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뜻을 또렷하게 나타내도록 “넉넉한 마음”이나 “따스한 마음”이나 “좋은 마음”처럼 적어 봅니다.
나 스스로 어떤 마음일 때에 서로를 헤아리는 모습이 될까 하고 곱씹습니다. 나 스스로 어떤 마음이 서로를 아끼는 몸가짐이 될까 하고 되뇝니다.
뜻을 찬찬히 살핍니다. 글흐름과 말흐름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나부터 제대로 마음을 쓸 때에 내 말이 살아납니다. 내가 내 말넋을 북돋울 때에 겨레말이든 나라말이든 한국말이든 아름다이 빛납니다. (4345.4.21.흙.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