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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코의 술 애장판 6
오제 아키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누구를 사랑하면서 일을 하나요
[만화책 즐겨읽기 111] 오제 아키라, 《나츠코의 술 (6)》
무엇을 남기는 삶일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옆지기를 만나고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누리면서, 내가 남길 가장 아름다운 한 가지라면, 돈도 책도 집도 아닌 사랑과 꿈과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내가 옆지기와 아이들을 만나지 않았을 때에도 이 한 가지를 깨달았을까 하고 돌아보면, 절로 고개를 젓습니다. 어쩌면 숱한 갈림길과 가시밭길과 에움길을 거치며 깨달았을는지 몰라요. 오래 걸리거나 더디 걸리더라도 이 길로 왔을는지 모릅니다.
사랑이 없는 돈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책은 읽을 값어치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없는 집은 메마르며 재미없습니다.
곰곰이 돌이키면, 나는 사랑을 담아 돈을 벌고 나누며 누리는 길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나부터 꿈을 아끼고 북돋우며 책 하나 예쁘게 빚는 길을 좀처럼 살피지 못했습니다. 나 스스로 좋은 이야기 알뜰살뜰 꾸리며 집살림 돌보는 길을 아직 살가이 느끼지 못합니다.
- “잊을 수 없어요. 공중살포가 있던 그날 아침. 길가에 널려 있던 죽은 나비며 곤충들, 나무에서 떨어져 버둥거리던 작은 새. 농약을 뒤집어쓰고는 눈 통증이며 구역질, 두통을 호소하던 아이들.” (17쪽)
- “논의 턱도 없애고 좁은 논두렁을 넓혀 트랙터나 콤바인을 사용하기 쉽게 만드는 거야. 벼농사에 있어서 에너지 절약, 생산 단가 절감 사업이랄까.” “그, 그럼 이거, 좋은 건가?” “좋긴 개뿔! 보고도 모르겠냐, 나츠코! 저 기계가 논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저건 비옥한 흙이고 메마른 흙이고 가리지 않아!” (23쪽)
글을 쓸 때이든 흙을 만질 때이든 자전거를 탈 때이든 길을 걸을 때이든 늘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면서 글을 쓰나. 나는 누구를 생각하며 흙을 만지나. 나는 누구와 살아가며 자전거를 타나. 나는 누구와 꿈을 나누며 길을 걷나.
낮나절, 나를 뺀 세 식구가 고요히 잠든 모습을 십 분 남짓 바라보았습니다. 네 식구 가운데 세 식구가 고요히 잠드니 이 집안이 이렇게 고요하구나, 그야말로 고요하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홀가분하고 고요할 때에 그동안 미룬 내 글쓰기를 다스려 볼까, 그동안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내 사진을 갈무리해 볼까 싶었는데, 막상 글을 쓰거나 사진을 갈무리하려다 보니 금세 졸음이 쏟아집니다. 옆지기와 두 아이가 잠을 즐기기까지 이래저래 복닥이며 치다꺼리하느라 힘을 많이 쏟았으니, 나 또한 곁에 나란히 드러눕고 싶더군요.
그러면 아예 네 식구 다 드러누워 더없이 조용한 집안이 되도록 할까 생각하며 나도 둘째 곁에 누워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운 지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첫째 아이가 칭얼거리며 깹니다. 아이고, 이 녀석, 쉬 마려우면 그냥 일어나서 예쁘게 쉬를 하면 좋으련만, 꼭 그렇게 징징거려야 하니. 그러나, 참말 첫째 아이는 모처럼 낮잠을 자며 고단함을 씻는데, 어째 쉬가 마려워 꿈과 잠을 모두 깨고 일어나야 하니 이렇게 눈물나도록 징징거려야 할밖에 없는지 몰라요. 아쉬우니까, 서운하니까. 그래, 슬프니까.
둘째 아이는 누나가 징징거리는 소리를 내니 눈을 번쩍 뜹니다. 누나 따라 동생도 징징거립니다. 쉬를 다 눈 첫째를 누여 이불을 여밉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달래고는 곧장 둘째한테 달려가서 품에 안고 어릅니다. 토닥토닥 두들기고 나즈막하게 자장노래 부릅니다. 첫째 아이 징징거림은 이내 잦아듭니다. 둘째 아이도 천천히 눈을 감습니다. 아주 곯아떨어졌다 싶을 무렵 비로소 방바닥 이부자리에 내려놓습니다. 이제 나도 겨우 방바닥에 등을 댑니다.
- “게다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포장 정비로) 길을 넓히는 만큼 논의 면적은 작아졌어. 손해를 본 건지 이득을 본 건지.”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 일에 나라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이런 일이 30년 가깝게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어.” “물론 좋아라 기뻐하는 녀석도 있지. 농기구 메이커와 토목업자들.” (28∼29쪽)
- “난 모르겠어, 진키치. 정말 모르겠어. 고다 씨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작물을 짓는 사람이, 왜 외톨이 섬처럼 고립되어야 하는 거지? 공중살포만 해도 그래. 매년 몇 번씩은 꼭 일어나는 헬리콥터 추락사고. 몇 명은 꼭 농약을 뒤집어쓰고 병에 걸리거나 죽거나 하는데, 어째서.” “쌀의 연간 생산량 3조 8천억 엔. 그리고 농기계 값이 8천 억! 농약 값 천 8백 억! 비료 등 그 외 비용을 전부 합치면 1조 엔 이상! 알겠냐, 나츠코? 쌀은 생산량의 1/4이 기업의 먹잇감이 되는 거야!” (35∼36쪽)
한갓지게 쉬자 생각하면서도 한갓지게 쉬지 못합니다. 이틀째 고뿔에 시달리는 둘째 곁에 누워 가만히 지켜보며 누웠다 싶더니, 마당에 널어 놓은 빨랫대가 갑자기 분 바람에 쿵 넘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 번 일으켜 바로 세우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이윽고 또다시 바람이 휭 불며 쿵.
시계를 봅니다. 멧등성이 너머 해가 어느 만큼 걸렸는가 올려다봅니다. 히유 한숨을 쉬고는 빨래를 걷습니다. 더 두어 햇살 더 먹도록 할 수 있지만, 아이 곁에서 자칫 잠들다가는 지는 햇살 차가운 기운을 받을까 싶습니다. 기저귀를 걷고 옷가지를 걷습니다. 오늘 빨래한 이불도 걷어서 갭니다.
문득 울타리 너머 마늘밭을 바라봅니다. 이웃 할머니는 김매기를 하십니다. 아침에 나오셔서 여태 김매기를 하십니다. 쉬엄쉬엄 하신다지만 김매기를 하느라 하루 예닐곱 시간 밭뙈기에서 지내십니다. 할머니가 젊은 아주머니라면 더 일찍 김매기를 마무리지었을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같은 사회 흐름이라면, 굳이 김매기를 안 하고 풀약을 칠 수 있겠지요. 나라에서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이니 한중자유무역협정이니 맺으면서 농사짓기마저 국가경쟁력을 들먹이고 더 값싼 공산품 수출을 들먹이잖아요.
- “나, 꼭 공중살포를 중지시킬 거예요! 아이들을 위해, 벼를 위해, 흙을 위해. 이것만은 꼭.” (42쪽)
- “그렇지. 나도 농약을 많이 뿌릴수록 부지런하고 훌륭한 농사꾼이라고 믿었었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됐지? 난 내 동생을 죽게 했어. 그게 벌써 5년도 더 된 일이지. 동생이 죽은 후로 전국 각지에서 농약 중독 사고가 줄을 이었어.” (57쪽)
할머니들은 먼먼 옛날부터 풀약 없이 두 손으로 김을 잡았습니다. 할머니들이 풀약이나 비료를 쓴 나날은 아주 짧습니다. 1960년대에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이 나라 시골마을에 비로소 풀약이랑 비료가 들어왔습니다. ㅂ씨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ㅈ씨 군사정권과 ㄴ씨 군사정권이 이어지는 동안 온 나라 시골마을은 아주 풀약이랑 비료로 망가졌습니다. 이동안 푸성귀 값이랑 곡식 값은 꽁꽁 묶입니다. 시골사람 땀방울 밴 푸성귀와 곡식 값은 하나도 못 오르면서 공산품과 공공요금 값은 끝없이 치솟습니다.
마늘밭 할머니를 바라보다가 우리 집 마당 가장자리 꽃밭에서 새잎을 돋우는 산초나무를 바라봅니다. 산초나무도 겨울을 견디고는 새잎을 내려 합니다. 온 들판 풀과 나무는 새잎 푸르게 내놓으며 봄누리 빛깔을 알록달록 가꿉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ㅂ씨와 ㅈ씨와 ㄴ씨 군사정권을 지나 민주정권이라 하는 나날을 보내는 요즈음까지, 이 나라 푸성귀 값이랑 곡식 값이 ‘공산품과 공공요금 값’과 어깨동무하며 올랐을 때에, 이 나라 사람들은 밥을 굶어야 했을까요. 쌀값이 너무 비싸 끼니를 걸러야 했을까요.
아직까지 쌀 10킬로그램에 2만 원이 채 안 되기까지 합니다. 농약을 안 친 쌀이라 하면 10킬로그램이 4만 원쯤 합니다. 유기농으로 거둔 쌀이라 하면 10킬로그램이 5만 원 남짓 받겠지요. 그런데, 참말 얼마 앞서까지만 하더라도 ‘농약 안 친 쌀’이든 ‘똥오줌 거름(유기농)으로 거둔 쌀’이든 값을 더 받아야 한다고 여긴 한국사람이 대단히 적었어요. 아직까지도 무농약 유기농 쌀이 농약 왕창 뿌리고 비료 가득 먹인 쌀보다 값을 더 받아야 하는 대목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도시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냥 값싸게 먹을 만한 쌀’을 사다 먹으려 할 뿐입니다.
스스로 갉아먹는 셈이에요. 스스로 깎아내리는 셈이에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똑같은 땀방울(노동력)이라고 하지요? 한 사람 목숨값은 숫자나 돈으로 따질 수 없다지요? 그러면, 도시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만 제 대접과 제 값어치를 받아야 할까요? 오늘날 우리 겨레는 무언가 크게 잊거나 잃지 않나요?
스스로 사랑할 삶을 잊거나 잃은 나머지, 한국땅 이웃을 사랑하지 못해요. 한국땅 이웃부터 옳게 바라보며 착하게 사랑하지 못하니, 한국땅으로 찾아오는 이주노동자를 옳게 바라보며 착하게 사랑하지 못해요. 한국땅 이웃뿐 아니라 내 보금자리 내 아이들 또한 옳게 바라보지 못하잖아요. 내 아이들부터 입시지옥이 될 제도권학교에 밀어넣을 뿐이잖아요. 내 아이들부터 착한 삶과 참다운 슬기와 고운 넋을 보듬으면서 즐거이 살아가도록 이끌 어버이로 튼튼히 우뚝 서야 올바르잖아요.
- “저뿐인가요? 아무도 느끼지 못한 거예요? 하늘에서 농약을 뿌리고, 무차별적으로 벌레들을 죽이고, 공중살포가 안전하니 편리하니 말하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될 일이 아닐까,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렇게 감상에 젖어선 벼농사를 지을 수 없어.” “감상이 없다면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죠? 이 손으로 흙을 갈고, 모를 키우고, 논에 심고, 뜨거운 여름, 땀을 흘리며 그 성장을 확인하고, 가을, 황금빛으로 익은 벼이삭을 보는 기쁨! 그리고 그 벼를 베는 흥분!” (62∼63쪽)
모든 시골마을 할머니들이 손으로 예닐곱 시간 김매기를 하지는 않아요. 훨씬 더 많은 여느 시골마을 할머니들은 할아버지와 둘이서 풀약을 쳐요. 젊은이들은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서로 툭탁툭탁 치고받으며 돈을 더 벌려고 악다구니예요. 젊은이들은 ‘무농약 유기농’ 푸성귀와 곡식을 일구려고 일흔이나 여든 할머니 할아버지가 얼마나 허리 구부정해지며 흙을 일구는지 헤아리지 않아요. 초등학교에서 흙일을 가르치나요? 중학교에서 무농약 흙일을 가르치나요? 고등학교에서 똥오줌을 거름으로 삼는 흙일을 가르치나요?
아이들 머리에 집어넣는 지식은 화학비료랑 똑같다고 느껴요. 아이들 몸에 집어넣는 예방주사는 화학농약이랑 똑같다고 느껴요. 아이들 마음에 집어넣는 도시 물질문명은 화학항생제랑 똑같다고 느껴요.
나부터 아직 참답고 착하며 곱게 추스르지 못하지만, 아이들하고는 사랑스럽고 즐거우며 애틋한 이야기꽃 피우는 나날을 누리고 싶어요. 우리 스스로 곱게 살아가는 나날을 빚고 싶어요. 우리 스스로 흙에서 먹을거리 한 줌 일구고 싶어요. 차근차근 흙을 살리고, 집을 살리며 몸과 마음을 살리고 싶어요. 한두 해 사이에 뚝딱 해치우는 흙일이 아닌, 두고두고 가꾸면서 사랑하는 흙일을 익히고 싶어요. 아이들이 물려받을 사랑이란 어버이인 나부터 날마다 기쁘게 맞아들이는 사랑으로 피어날 수 있기를 빌어요.
- “그렇지 않아! 2만 8천 엔이면 다들 의욕을 불태우고 공중살포도 반대해. 그 어려운 유기농 재배도 하겠다고 나서고. 농약 문제니 농사짓는 기쁨 따윈 관심도 없이 모든 것이 후다닥 결정되고 말았어. 농사도, 술을 빚는 것도, 마을을 일으켜세우는 것도, 돈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이 다 해결되는 거야. 공중살포가 중지된 건 기쁘지만, 조금도 이겼다는 느낌이 안 들어. 다들 돈을 좇아 움직이는 것뿐. 무엇 하나 달라진 건 없어.” (215쪽)
오제 아키라 님 만화책 《나츠코의 술》(학산문화사,2011) 여섯 권째를 읽습니다. 만화책 《나츠코의 술》은 책이름처럼 ‘술’을 이야기하는 만화인데, 여섯 권째가 되도록 술 이야기보다 흙일 이야기가 훨씬 자주 더 많이 나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만화는 ‘놀랍고 아름다운 일본술’ 이야기는 거의 들려주지 않고 ‘수수하고 투박한 흙일’ 이야기만 들려주는구나 싶어요. 게다가, 여섯 권째에 이르니, 흙일을 하는 사람 스스로 누구를 사랑하며 흙을 아끼려 하느냐 하는 대목을 짚어요.
좋은 술은 좋은 쌀에서 나오니까요. 좋은 쌀은 좋은 흙에서 나오니까요. 좋은 흙은 좋은 땀에서 나오니까요. 좋은 땀은 좋은 삶에서 나오니까요. 좋은 삶은 좋은 사랑에서 나오니까요. 아, 그러면 좋은 사랑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4345.4.6.쇠.ㅎㄲㅅㄱ)
― 나츠코의 술 6 (오제 아키라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10.25./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