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한 줄, 사랑스레 읽던 책
앤소니 드 멜로 님 삶을 그러모은 이야기책 《사랑으로 가는 길》(삼인,2012) 132쪽에, “남에게나 자신에게나 깨어 있어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그때 당신은 사랑이 무언지를 알 것입니다.” 하고 읊는 대목이 있습니다. 밑줄을 천천히 긋습니다. 곰곰이 헤아립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에서 한 해 삼백예순닷새 언제나 함께 지내는 옆지기를 바라볼 때이든, 두 사람 사랑으로 낳은 아이들하고 여러 해째 같이 얼크러지내며 서로서로 마주할 때이든, 꾸밈없이 서로를 느끼며 어깨동무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랑이 꽃송이처럼 피어나는구나 싶어요. 더 오래 함께 있대서 사랑이 꽃송이처럼 피어나지는 않는다고 느껴요. 아주 살짝 눈을 마주치더라도 마음을 나누고 읽으며 보듬을 수 있으면, 멀리 떨어진 채 살아야 하더라도 사랑이 곱게 꽃송이처럼 피어난다고 느껴요.
우니타 유미 님이 빚은 만화책 《토끼 드롭스》(애니북스,2008) 둘째 권 65쪽에, “우선은 장래보다 코우키의 현재를 지켜봐 주고 싶어요. 한 2년 정도 지나면 같이 있고 싶어도 자기들이 피해 다니게 될 테니까요!” 하고 외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밑줄을 예쁘게 긋습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를 사랑스레 돌보며 살아가는 젊은 어머니가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 걱정하기’보다는 ‘아이랑 오늘 하루 더 즐거이 어울리며 놀고 웃으며 떠들겠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이와 바로 오늘 사랑을 꽃송이처럼 피우고 싶을 뿐이라는 넋을 느끼며 참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생각을 담은 책을 읽으며 즐겁습니다. 사랑을 들려주는 책을 읽으며 기쁩니다. 삶을 곱게 누리면서 이야기 한 자락 어여삐 보듬는 책을 읽으며 흐뭇합니다.
나는 어떠한 책이든 사랑스레 바라보면서 읽고 싶습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지식을 얻거나 저런 정보를 쌓고 싶지 않습니다. 돈을 한껏 잘 버는 솜씨를 굳이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이름을 널리 드러내는 재주를 애써 북돋우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마을 어느 골목을 나들이 할 수 있으면 퍽 좋더라 하는 말마디에 귀를 쫑긋 세우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어느 논둑길을 걷더라도 즐겁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들새 소리를 듣습니다. 휘파람새인가, 직박구리인가, 노랑할미새인가, 찌르레기인가, 어떤 새인가 하고 귀를 기울입니다. 갓난쟁이는 품에 안고 다섯 살 개구진 아이는 앞세워 걸리며 봄나무를 바라봅니다. 막 꽃송이 터뜨린 매화나무를 바라봅니다. 아직 새눈 조그마한 모과나무를 바라봅니다. 천천히 꽃송이 터뜨리는 동백나무랑 후박나무를 바라봅니다. 네 식구 나란히 시골마을 곳곳을 두 다리로 걷는 나날을 즐깁니다. 면 소재지까지 사십 분 남짓 천천히 걸어갑니다. 우체국에 들러 편지 한 통 부치고는 다른 길로 에돌아 오십 분 남짓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멧골짝 안쪽에 깃든 절집 언저리까지 한 시간 반 남짓 걸어 오르다가는 풀숲에 깃듭니다. 네 식구 모두 벌러덩 드러누워 풀과 가랑잎과 흙 기운을 골고루 나누어 받습니다. 한창 뒹굴며 노는 동안 멧새 지저귀는 소리를 고즈넉하게 듣습니다. 골짝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들이를 하는 동안, 우리 집 마당에 드리운 빨랫줄에 넌 갓난쟁이 기저귀며 식구들 옷가지며 따순 봄햇살 마음껏 들이마시며 보송보송 마를 테지요.
한 시간 사십 분 남짓 다시 천천히 멧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흙길은 흙길대로 즐겁고, 시멘트길은 시멘트길대로 즐겁습니다. 마늘밭 풀 매는 이웃 할머님한테 인사합니다. 시골집 두루 도는 우체국 일꾼한테 인사합니다. 나와 온 식구한테는 종이에 아로새긴 책도 사랑스럽고, 저마다 얼굴에 아로새긴 웃음도 사랑스럽습니다. 까무잡잡 싱싱한 빛 구수한 흙땅 곳곳에 새로 돋는 봄풀과 봄꽃 모두 사랑스럽게 읽는 책입니다. 봄까지꽃, 별꽃, 광대나물꽃, 냉이꽃, 제비꽃 모두 귀엽게 맞이하는 책입니다. 먼 멧등성이 따라 노랗다가 발갛다가 하얗다가 파랗게 빛나는 아침녘 햇살과 하늘 모두 고맙게 마주하는 책입니다. 내 삶에 한 줄 사랑스레 아로새기는 책은 바로 좋은 보금자리에서 누리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4345.3.27.불.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