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 Children's Playing House
편해문 지음 / 고래가그랬어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널리 사랑받지 못하고, 그만 절판된 사진책 하나를 기리며, 이 사진책 하나를 되새기는 느낌글을 새로 적바림합니다. 부디 되살아나거나 새로운 사진책 하나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사진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31] 편해문, 《소꿉》(고래가그랬어,2009)

 


  한국에서 사진을 찍는 어른이 한국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담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저희끼리 노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지 못합니다. 아이들한테는 사진기가 없고, 아이들은 즐거이 놀 뿐 이런저런 모습을 애써 사진으로 찍어 남겨야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오늘 하루 신나게 놀고, 이듬날 하루 새롭게 놀며, 글피에 다시금 더 놀면 돼요.


  한국에서 사진을 찍는 어른이 한국땅 어린이가 노는 모습을 더러 사진으로 옮기곤 했지만, 막상 아이들을 오래도록 지켜보거나 찬찬히 살펴보거나 꾸준히 함께하면서 사진을 찍은 적은 아직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제 골목놀이 하는 어린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골목놀이 하는 어린이가 아주 많았을 뿐 아니라, 이 아이들이 사진기를 꺼리지 않던 지난날, 이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살포시 옮긴 어른은 매우 드물었어요. 아주 없었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때때로 드문드문 한두 장 ‘귀엽다’ 여겨 찍기는 하더라도, ‘한국 어린이 놀이’를 이야기로 엮어 사진책 내려던 어른은 없었다고 느껴요.

 

 


  스스로 사진쟁이라 일컫던 어른은 으레 큰도시에서 살았습니다. 서울이나 대구나 부산이나 인천 같은 큰도시에는 사진모임이 있었고, 사진모임에 몸담지 않더라도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는 곳곳으로 ‘사진마실’을 다니는 어른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 놀이터를 찾아다닌다든지, 큰길 안쪽 호젓한 골목길로 접어들면서 한두 시간, 서너 시간, 너덧 시간 아이들하고 얼크러지며 놀다가 사진을 찍던 ‘한국 사진쟁이 어른’은 왜 찾아볼 수 없을까요.


  1980년대이든 1970년대이든 1960년대이든, 이무렵에 사진을 찍던 어른이 없었다면, 이 나라 아이들 놀이 이야기 또한 사진으로 옮길 수 없었다 하겠지요. 그런데, 이무렵이든 1990년대이든 2000년대이든 2010년대이든 사진을 찍는 어른은 많아요. 많디많은 한국 어른들은 스스로 제 나라 제 땅 제 이웃 어린이를 돌아보지 않아요. 으레 나라밖으로 나갑니다. 나라밖 아이들을 마주합니다.


  어린이놀이를 살피는 편해문 님은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이녁은 사진쟁이가 아닌 까닭에 어린이놀이를 눈과 마음과 몸으로 살필 뿐, 굳이 사진기로 아이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한국땅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를 잃어버린 탓에 한국땅 어린이놀이를 찾으려고 힘썼으니, 한국땅 어린이놀이를 사진으로 담는 일이란 꿈꾸기 힘들겠지요. 편해문 님은 사진책 《소꿉》(고래가그랬어,2009)을 내놓았는데, 한국땅 아이들이 스스로 잊고 만 놀이를 북돋우거나 되살리다가, 나라밖 ‘작은’ 나라에서는 아이들이 아직 마음껏 놀고 신나게 뒹구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사진쟁이 아닌 사람으로서 사진기를 들며 사진을 찍고는, 사진책까지 내놓습니다.

 

 


  사진책을 한참 들여다봅니다. 2009년에 처음으로 장만해서 들여다보고, 이 사진책이 새책방 책시렁에서 사라지고 난 이즈음 다시 한 권 장만해서 더 들여다봅니다. 아이들 얼굴만 바꾸면 한국에서 늘 마주하던 아이들 모습이요 아이들 놀이입니다. 아이들 얼굴은 다르지만, 어디에서나 똑같다 싶은 아이들 삶이며 아이들 사랑입니다.


  한국땅 아이들이 놀이를 잃거나 빼앗긴 탓에, 놀이하는 어린이 삶을 담은 사진책 또한 이 땅에서는 읽히지 못하고 사라져야 하는가 싶습니다. 한국땅 어른들부터 즐거이 웃고 까불며 놀 줄 모르니, 아이들 해맑은 웃음과 눈빛과 얼굴짓을 담은 사진책 하나 살뜰히 바라보며 아끼기란 힘든 노릇인가 싶습니다. 사진책 《소꿉》에 이어 “고무줄”이나 “땅금놀이” 같은 사진책이 잇달아 나오기를 빌었는데, 다른 놀이 사진책은 못 태어나고, 그만 《소꿉》마저 아스라이 사라지고 맙니다.

  바야흐로 한국땅에서 아이들이 온통 학교로 쫓겨나고, 학교로 쫓겨나서도 시험공부로 쫓겨나는데다가, 이윽고 대학바라기로 다시금 쫓겨나는 판입니다. 아이들이 일고여덟 살이 되면 ‘학교에 간다’고 말하지만, 이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고는 좀처럼 못 느끼겠어요. 오늘 이곳 이 아이들은 집이나 마을에서 ‘놀이’를 누리지 못하는 채 학교로 ‘쫓겨나’는 셈 아닌가 싶어요. 한국 아이들은 갓 태어날 적부터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제대로 뛰놀지 못하며, 제대로 흙을 만지지 못하다가, 온갖 탁아시설로 보내지고, 이렇게 보내지고 나서 금세 학교로 ‘등 떠밀리듯 쫓겨나’는 모양새로구나 싶어요. 그런데, 이렇게 학교로 쫓겨나더라도 학교에서 동무들을 사귀며 놀이할 틈이 없어요. 학교에서는 갖가지 시험공부가 아이들을 짓누릅니다. 특기이니 적성이니 무슨무슨 과외활동이니 방과후활동이니 참여학습이니 무어니 하면서 홀가분하게 놀이를 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제 언니 오빠 누나 형 들한테서 놀이를 물려받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늘 시험공부만 물려받습니다. 놀이를 잊은 채 어린 나날을 보내고, 시험공부만 짊어진 채 푸름이가 되어, 대학바라기로 얼룩진 젊은이가 됩니다.

 

 


  아직 이 나라 골골샅샅에서 아이들이 제가끔 놀이를 합니다. 골목놀이를 하는 어린이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시골 고샅에서 흙을 파먹는 아이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도시에서 골목놀이를 하는 아이들 곁에서 이 아이들 어버이부터 이들 놀이하는 아이를 사진으로 담지 않습니다. 시골 고샅에서 흙을 파먹는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가 스스로 기쁘게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 어버이는 아이들을 마냥 바라보기만 해도 배불러요. 구태여 사진을 찍지 않아도 마음에 꽉 들어찬다 할 만해요. 여느 어버이한테 ‘당신 사진쟁이가 되어 보시오’ 하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야기는 들려주고 싶어요. 아이들이 누리는 오늘을 아이들과 바로 이 자리에서 기쁘게 누리면서 사진 한 장으로 적바림할 수 있으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될 무렵, ‘어른이 된 아이가 마음껏 뒹굴며 뛰놀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으로 ‘어른이 된 아이’가 오래오래 해맑은 웃음과 낯빛을 알뜰히 아끼도록 도울 수 있어요. 사진쟁이가 되어 대단한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은 없으나, 아이들을 사랑하는 손길과 꿈길과 사랑길을 사진 한 장에 살그마니 옮겨,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낼 기나긴 나날 좋은 ‘놀이 넋’을 어버이로서 선물로 남길 수 있어요.


  내 아이한테 어마어마하다 싶은 돈을 물려주지 않아도 돼요. 내 아이한테 아파트나 자가용을 물려주지 않아도 돼요. 내 아이한테 부동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돼요. 내 아이한테 ‘네가 아이였을 적 예쁜 삶과 놀이와 몸짓이 이와 같았단다’ 하고 기쁘게 보여주는 사진 한 장 차곡차곡 찍어서 푼푼이 그러모은 사진첩 하나 물려주면 돼요.


  사진은 아이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사진은 어버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사진은 사진쟁이하고 함께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진은 삶을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사진은 삶을 꿈꾸는 어버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4345.3.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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