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흙
일본에서 이름난 어느 소설쟁이를 기리는 대단한 전시관을 서울 노량진에 있는 헌책방 사장님이 읽던 일본 잡지에서 본 적 있다. 헌책방 일꾼 한삶을 마흔 해 넘게 일구는 사장님은 소설쟁이도 소설쟁이라 할 테지만, 이만 한 전시관을 마련한 일본도 일본이라 할 만하다고 들려준 이야기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아마 이때가 처음이었을까, 또는 더 예전에도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소설쓰는 이문열 님이 연 서당이라 할까 서원이라 할까 글터라 할까 싶은 자리를 차린 이야기를 어느 잡지에선가 읽은 적 있다. 소설쓰는 이문열 님을 어떻게 바라보건 말건, 책 하나로 얻은 돈으로 책과 글이 어우러지는 터전을 일군 일이 참 놀랍다고 느꼈다.
내가 책을 쓸 수 있고, 내가 쓴 책으로 돈을 벌 수 있으면, 이 돈으로 무슨 일을 할 때에 나 스스로 즐거우며 책으로 태어난 나무한테 고마우며 내 책을 읽은 사람한테 빛이 될 만한가를 헤아려 본다. 나는 시골마을 땅을 사면 좋을까. 시골마을 논과 밭, 여기에 문닫은 시골마을 작은학교를 사들여 이곳에 내 책들을 건사하고, 우리 식구들과 앞으로 태어날 먼 뒷사람들 삶을 보듬을 흙땅을 건사하면 좋을까.
돈을 앞세우고 정치권력 거머쥔 이들은 흙일꾼한테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잔뜩 뿌렸다. 온누리 흙일꾼은 돈쟁이와 권력쟁이 서슬에 밀려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안 쓰는 흙일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흙하고 동떨어진 곳에서 돈만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도시사람은 흙으로 빚은 목숨인 내 몸뚱이를 잊은 채, 더 값싸거나 더 몸에 좋다는 먹을거리를 찾을 뿐이다. 삶을 잊거나 잃으며, 사랑 또한 잊거나 잃는 톱니바퀴나 쳇바퀴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내가 살아가는 밑힘이라면 무엇이든 흙에서 비롯하리라 생각한다. 좋은 밥도 좋은 물도 좋은 햇살과 바람도 흙과 함께 살가이 빛난다고 생각한다. 내가 쓸 수 있는 글 한 줄은 흙에서 비롯한다. 내가 찍을 수 있는 사진 한 장은 흙에서 꽃을 피운다. 내가 건넬 수 있는 말 한 마디와 우리 집 살붙이들하고 얼크러질 하루 또한 노상 흙에서 샘솟는다.
책은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든 다음 빚는다지. 나무는 흙에 뿌리를 내려 기나긴 해 무럭무럭 자라야 한다지. 곧, 나무란 흙이요, 책이란 나무이자 흙인 셈이다. 내가 내 이름을 박은 책을 내놓아 널리널리 팔아서 돈을 벌 수 있으면, 아주 마땅히 시골마을 흙땅을 장만해야 알맞으리라. 시골마을 흙땅이 포근한 햇살과 따사로운 흰눈과 너그러운 구름과 해맑은 무지개와 시원한 달빛과 보드라운 풀잎으로 곱게 빛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즐거이 누릴 삶이 되리라. (4345.3.16.쇠.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