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은 암, 청춘은 청춘 - 오방떡소녀의 상큼발랄한 투병 카툰
조수진 글.그림 / 책으로여는세상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 여린 착한 사람들
 [만화책 즐겨읽기 124] 조수진, 《암은 암, 청춘은 청춘》

 


  마음 여린 착한 사람들이 아파서 힘들어 할 때에 참 슬픕니다. 마음 여린 착한 사람들이 아플 때에도 기운을 차리면 좋겠어요. 아프다고 괴로울 까닭이 없고, 아프니까 서러워야 하지 않아요. 아픈 일도 즐거운 삶이요, 아픈 나날도 고마운 하루예요.


  참말 몸이 아파 아무것 못하고 드러눕는 일이란 고달픕니다. 고달픈 나머지 몸이 더 축 처지기까지 해요. 아이들하고 더 살가이 놀기를 하나, 아이들 옷가지 빨래를 하나, 아이들을 씻기거나 먹이기를 하나, 집안을 치우거나 이불을 털기라도 하나, …… 참으로 깝깝합니다.


  그러나, 몸이 아픈 채 살아가며 내 둘레 좋은 사람들한테서 좋은 사랑을 받습니다. 때로는 좋은 사랑 아닌 모진 손길이나 거친 막말을 듣기도 할 테지요. 기쁜 삶을 즐거이 못 누리고, 아픈 삶이 더 아프고 피멍이 들는지 몰라요.


  꿈이 없는 나날이 될 수 있어요. 꿈하고 동떨어진 하루로 젖어들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꿈을 놓을 마음이 없어요. 앓아누워 손끝 하나 못 움직이며 끙끙거리지만, 내 둘레에는 틀림없이 나를 아끼며 믿고 돌보는 따스한 손길이 있다고 느끼며 기다리니까요.


- 밤새 노는 거, 친구들이랑 술 마시는 거, 맛집 찾아다니는 거, 그런 거 무지무지 좋아하고, 운동이라고는 고등학교 이후로 끝, 뾰족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다니고, 약속 없을 땐 집에서 TV만 보고 앉았던, 공부랑 일은 악착같이 하면서 건강 챙기는 일은 무조건 귀찮아했던. (10쪽)

 


  마음 여린 착한 사람들이 좋은 밥을 먹기를 꿈꿉니다. 나쁜 밥은 안 먹고, 나쁜 일은 안 하기를 꿈꿉니다. 무농약 유기농 곡식이라서 좋은 밥은 아니에요. 내 끼니를 내 땀을 흘려 거둔 곡식으로 챙길 수 있으면 좋은 밥이라고 느껴요. 내 손으로 내 땀을 흘리지 못하더라도, 내가 마련한 먹을거리를 내 좋은 사랑을 담아 차릴 수 있으면 좋은 밥이 된다고 느껴요.


  부디 가장 좋은 길을 걸어가면 좋겠어요. 일부러 덜 좋은 길을 가지는 않기를 빌어요. 애써 더 좋은 길을 찾아가면 좋겠어요. 구태여 나쁘거나 궂은 길에 휩쓸리지 않기를 빌어요.


  모두들 기쁜 사랑이 열매를 맺어 태어나잖아요. 누구나 고운 사랑이 씨앗이 되어 자랐잖아요.


  가장 좋은 말을 나누고, 가장 좋은 웃음을 나눌 때에 즐겁습니다. 가장 좋은 일을 찾아, 가장 좋은 힘을 들여 어깨동무할 때에 즐거워요.

 

 


- 회사를 다니면서 아플 때는 참 눈물나게 서럽더니만, 그만두고 나니까 또 좋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거 있지요. (39쪽)
- 환자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나 봐요.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어쩐지 마음을 쓰기도 하고, 또 누군가 잘해 주면 금방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요. (92쪽)


  마음 여린 착한 사람들이, 다툼도 미움도 시샘도 없이 살아가면 좋겠어요. 전쟁으로 지키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평화로 사랑하는 평화를 누리면 좋겠어요. 전쟁무기 잔뜩 갖추어 평화를 지킨다고 둘러대지 말고, 참말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를 사랑스레 돌보면서 평화를 누리면 좋겠어요.


  전쟁무기 만드느라 돈을 쓰지 말고, 마을을 살찌우고 가꾸는 일에 돈을 쓰면 좋겠어요. 전쟁무기 만드느라 머리를 쓰지 말고,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는 꿈을 키우는 데에 머리를 쓰면 좋겠어요. 전쟁무기 만드느라 공장을 세워 품을 팔지 말고, 내 보금자리를 보살피는 일에 품을 팔면 좋겠어요.


  시험점수 잘 따려 하는 일은 공부가 아니에요. 아니, 공부인지 모르지요. 다만, ‘배움’이나 ‘가르침’은 못 될 테고요. 슬기롭게 배울 이야기는 시험점수가 아니에요. 아름답게 나눌 이야기는 시험성적이 아니에요. 대학생이라서 일을 잘한다면, 고등학생이나 초등학생은 일을 못하나요. 대학생이 풀베기를 잘하나요. 대학생이 무농약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을 줄 아나요. 대학생이 농약을 만들고 항생제를 만들며 비료를 만들지 않나요. 대학생 아닌 사람이 손으로 모를 심고 손으로 낫질을 하지 않나요.

 

 


- 제가 암에 걸리기 전부터도 항상 언니는 절 무진장 돌봐줬어요. 그리고 요즘 언니는, 열심히 일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각종 암 관련 정보 검색 중. (136쪽)
- 그렇게 장만한 두 장의 두건. 일상의 행복은 작은 것에서 오는 건가 봐. 두건 두 장을 장만하고 금세 행복해진 오방떡 소녀! (207쪽)


  마음 여린 착한 사람들이 스스로 착한 벗님으로 살아가면 좋겠어요. 스스로 이웃하고 살가이 사귀고, 스스로 살붙이를 어여삐 아끼면 좋겠어요.


  남들을 탓하며 하루를 보내기에는, 내 좋은 하루가 너무 아깝잖아요. 남들이 따라오기를 기다리기에는, 내 기쁜 나날이 너무 아쉽잖아요. 나부터 스스로 내 삶을 일구면 좋겠어요. 나부터 스스로 내 넋을 아끼면 좋겠어요. 좋은 살림을 좋은 사랑으로 보듬으면서, 좋은 이야기를 좋은 말마디로 영글면 아름다우리라 믿어요.


  오늘 바로 이곳에서 살며시 손을 맞잡고 들길을 걷는 아이들이 예뻐요. 오늘 바로 이곳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옆지기가 예뻐요.


  좋은 삶일 때에 좋은 꿈을 꿔요. 좋은 사랑일 때에 좋은 책을 찾아서 읽고, 좋은 말로 좋은 편지를 써요. 좋은 눈빛으로 좋은 땀을 흘리고, 좋은 발걸음으로 좋은 마을을 일구어요.


- 당신들 잘못이 아니야. 단지, 무슨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 거야, 난. (16쪽)

 

 


  조수진 님 만화책 《암은 암, 청춘은 청춘》(책으로여는세상,2009)을 읽습니다. 만화를 그린 조수진 님은 끝내 암으로 죽습니다. 이 책이 나오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조용히 흙으로 돌아갑니다.


  암은 암이고 젊음은 젊음이라 했는데, 곰곰이 더 살피면, 암도 내 젊음이면서 내 삶이에요. 슬픔도 내 삶이면서 내 젊음이에요. 웃음도 기쁨도 괴로움도 고단함도 모두 내 삶이자 내 젊음이에요.

  따로 의사한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지 않더라도, 조수진 님 스스로 왜 암이라 하는 병에 걸렸는지 알아요. 그렇지만, 조수진 님은 이 까닭을 찬찬히 더 깊이 파고들면서 다스리지는 못했어요. 병원을 다니고 항암치료를 받기는 했지만, 이제껏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던 조수진 님 어여쁜 삶을 어여삐 사랑하는 길로 접어들지는 못하고 말아요.


  밥 한 그릇 더 좋게 챙겨서 먹고, 일이든 사랑이든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곳에서 이루는 길을 찾아나서기까지는 나아가지 못해요. 겨우 할 수 있는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벗어나 일산 호수공원 옆에서 지내는 데에서 그치거든요. 억지로 돈을 퍼부어 지은 못물이 아닌, 봄에는 봄빛을 담고 겨울에는 겨울빛을 실으며 천천히 이루어진 냇물과 멧자락과 들판이 어우러지는 삶터를 찾아나설 수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요. 스스로 좋은 삶터를 꿈꾸고, 스스로 좋은 삶길을 걸어갔다면 한결 즐거울 텐데요.


  그러나, 조수진 님 또한 초·중·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앞만 보고 달렸어요. 다른 길은 하나도 못 보면서 살았어요. 나는 조수진 님을 탓할 수 없어요. 조수진 님이 더 넓고 깊이 꿈꾸지 못한 대목이 슬플 뿐이에요.


  다만, 앞만 보고 달리던 길에서, 암이라는 병이 도드라지면서 비로소 돈벌이와 악다구니 같은 도시살이에서 조금은 풀려났어요. 이러면서 만화를 그렸고, 이 만화에 조수진 님 삶을 찬찬히 실었어요. ‘잘나’지도 않으나 ‘못나’지도 않은 삶을, 스스로 바라보며 느끼는 대로 담았어요. 아쉬울 수밖에 없지만, 스스로 이루고 싶은 꿈을 담지는 못했어요. 암이 잦아들면 무엇을 하며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암이 그대로 몸속에 녹아들면 이때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이런저런 꿈까지 그리지 못했어요.


  몸에 깃든 병을 스물다섯 살에 알아채어 스무 해 가까이 아픈 채 살다 떠난 홍윤 님이 남긴 《별 다섯 인생》이라는 책을 읽으면, 이 책에는 아파하는 슬픔도 틀림없이 있지만, 아파하는 삶을 스스로 아끼며 좋아하는 꿈도 나란히 있어요.

 


- 한 번은 제가 어떤 요양원에서 얼마 동안 지내면서 그곳에 자주 방문을 와서 찬양을 불러 주고 말씀을 나누는 젊은 전도사님을 혼자서 좋아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함께 요양원에 있던 어떤 언니가 그걸 알고는, “넌 좋아하는 사람의 짐이 되고 싶니?”라고 묻더군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뭐랄까, 제 자신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그렇지만! 울 언니는 단호하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정신이 아파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보다는 몸은 아프더라도 마음이 훌륭한 사람이 더 나은 거야!” (221쪽)


  미우라 아야코라 하는 일본사람은 일찌감치 ‘죽은 목숨’이었다지만 참 오래오래 살았어요. 권정생이라 하는 한국사람은 참말 젊은 나이에 ‘죽은 목숨’이었다지만 참 오래오래 살았어요.


  두 사람 모두 더없이 아파 미칠 노릇인 몸뚱이를 늘 붙잡으면서 날마다 아파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아파 미칠 노릇이면서 즐거움에 겹고 웃음이 넘치는 글을 남겼어요. 아플 때에는 아무것 못하고 자리에 드러눕지만, 겨우 손끝을 움직일 만하다 싶으면 글조각을 여미었어요.


  마음 여린 착한 사람들은 스스로 더 높이지 않고 스스로 더 낮추지 않아요. 언제나 스스로 가장 좋아할 만하고 가장 사랑할 만한 길을 찾아요. 늘 오늘 하루가 마지막일 수 있거든요. 노상 오늘로 삶을 마감할 수 있거든요. 날마다 가장 좋은 삶을 누리려 애써요. 글 한 줄을 쓰더라도 온힘과 온사랑 가득 담는 마지막 글이 되도록 했어요.


  《암은 암, 청춘은 청춘》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멧새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으며 만화를 그릴 수 있었다면, 여름바람이 후박나무 잎사귀 스치며 춤추는 노랫가락을 한 번이라도 들으며 만화를 그릴 수 있었다면, 가을햇살이 벼이삭 따사로이 보듬는 손길을 한 번이라도 곁에서 나란히 누리며 만화를 그릴 수 있었다면, 하얀 눈송이가 온 들판 고요히 덮고 흰별 숱하게 빛나는 밤하늘을 한 번이라도 바라보면서 만화를 그릴 수 있었다면, 《암은 암, 청춘은 청춘》이라는 만화책은 한 권으로 끝맺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4345.3.11.해.ㅎㄲㅅㄱ)


― 암은 암, 청춘은 청춘 (조수진 글·그림,책으로여는세상 펴냄,2009.5.18./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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