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가운 상말
604 : 녹음방초승화시
.. 5월이라고 그야말로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이다. 꽃은 나뭇잎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다. 병꽃과 철쭉 그리고 팥배나무 꽃이 피어 있지만 이파리에 숨어 있다 .. 《호원숙-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샘터,2006) 22쪽
“나뭇잎의 기세(氣勢)”는 “나뭇잎 기운”이나 “나뭇잎이 올라오는 기운”이나 “나뭇잎이 드리우는 기운”으로 다듬습니다. “피어 있지만”은 “피었지만”으로 손질하고, “숨어 있다”는 “숨었다”로 손질합니다.
녹음방초승화시 : x
녹음방초(綠陰芳草) : 푸르게 우거진 나무와 향기로운 풀이라는 뜻으로, 여름철의
자연경관을 이르는 말
- 봄이 가고 여름이 돌아와 녹음방초의 계절을 맞게 되었다
국어사전에 실린다 해서 모두 한국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국말은 아니나 한국사람이 익히 쓰는 낱말도 국어사전에 실립니다. 거꾸로, 한국말이지만 굳이 국어사전에 안 실어도 될 만하다 싶은 낱말은 국어사전에 안 실리기도 해요.
‘녹음방초’는 국어사전에 실립니다. ‘녹음방초승화시’는 국어사전에 안 실립니다. 하나는 왜 국어사전에 실리고, 다른 하나는 왜 국어사전에 안 실릴까요. 두 말마디는 어떠한 말로 여겨야 할까요.
국어사전에 안 실린 ‘녹음방초승화시’는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국말이 아닌 만큼 국어사전에 실을 까닭이 없습니다. ‘녹음방초’는 한국말일까요? 이 말 또한 한국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낱말은 국어사전에 실립니다. 아무래도 사자성어이기 때문일까요?
한문 ‘녹음방초승화시’는 “나뭇잎이 푸르게 우거진 그늘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나을 때. 첫여름을 나타내기도 함.”을 뜻한다 합니다. 한문 ‘녹음방초’도 여름을 가리키지만, ‘녹음방초’는 ‘여름철’을 두루 일컫습니다. ‘녹음방초승화시’는 조금 달라, 여름 가운데 ‘첫여름’만 가리킨다고 합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돌아와 녹음방초의 계절을 맞게 되었다
→ 봄이 가고 여름이 돌아와 나뭇잎이 푸르게 우거진다
→ 봄이 가고 여름이 돌아와 나뭇잎이 푸르다
→ 봄이 가고 여름이 돌아와 나뭇잎이 싱그럽게 푸르다
→ 봄이 가고 여름이 돌아와 푸른 나뭇잎이 짙고 맑다
…
먼 옛날, 한국사람 가운데 양반이나 사대부나 임금이라는 자리에 있던 이들은 한문을 썼습니다. 이웃한 중국이라는 나라를 섬기며 중국사람이 쓰는 말글을 우러렀습니다. 먼 옛날, 한국사람 가운데 양반이나 사대부나 임금이라는 자리에 서던 이들은 ‘녹음방초’와 ‘녹음방초승화시’ 같은 말마디를 읊었습니다. 이러한 말마디는 옛날 옛적 한적이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고,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한편,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권력이나 계급하고 동떨어진 자리에서 살던 이들은 한국말, 곧 한겨레말을 썼습니다. 한겨레말은 한글로 적을 수 있다지만, 예나 이제나 권력이랑 계급, 여기에 오늘날은 지식을 손에 쥔 이들까지, 한겨레말을 한글로 적어 버릇하지 않습니다.
― 여름 : 첫여름 + 한여름 + 늦여름
더없이 마땅합니다만, 여름이 한창이면 ‘한여름’입니다. 봄이 한창이면 ‘한봄’입니다. 여름에 막 들어서면 ‘첫여름’입니다. 겨울에 막 들어서면 ‘첫겨울’입니다. 여름이 막바지라면 ‘늦여름’이나 ‘막여름’입니다. 가을이 저물 무렵이라면 ‘늦가을’입니다.
한국말은 ‘여름’이고 ‘첫여름’입니다. 여름이기에 여름이라 말합니다. 첫여름을 맞이했으니 첫여름이라 이야기합니다. 참말 그뿐입니다. 더도 없고 덜도 없습니다. 삶을 삶 그대로 말할 뿐입니다. (4345.2.19.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