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산 아이 플루리나 아이세움 그림책 저학년 6
알로이스 카리지에 그림, 셀리나 쇤츠 글, 이지연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아름다이 살아가는 꿈을 꽃피우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33] 알로이스 카리지에·셀리나 쇤츠, 《여름 산 아이 플루리나》(아이세움,2002)

 


 윌리엄 스타이그 님 이야기책 가운데 《도미니크》가 있습니다. 나는 이 책을 2006년에 옮긴 판으로 읽었는데, 1981년에 일찌감치 《용감한 도미니크》라는 이름으로 나온 적 있습니다. 1981년이라면 내가 일곱 살 적인데, 그무렵 이 책이 재미있거나 좋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다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이 있었나 궁금합니다. 1981년부터 서른 해가 넘도록 이 책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아직 못 보았습니다. 윌리엄 스타이그 님이 내놓은 이야기책을 이야기한다면 2006년에 나온 《도미니크》를 들겠지요.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간 1982년에 내 어버이나 둘레 어른 가운데 나한테 《용감한 도미니크》를 선물한 분이 있었다면 나는 기뻤을까요. 어릴 적부터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나는 아름다운 어린 나날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우리 집 아이는 1981년판 《용감한 도미니크》와 2006년판 《도미니크》를 나란히 놓고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집 아이는 두 가지 책 모두 거들떠보지 않고 스무 살이나 서른 살까지 살아갈 수 있으며, 앞으로 스무 해나 서른 해 뒤에는 2006년판 《도미니크》가 사라질 수 있어요. 스무 해나 서른 해 뒤에는 《용감한 도미니크》이든 《도미니크》이든 사람들 마음과 생각에서 아주 잊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잊혀지는 책을 헌책으로 찾아서 읽도록 한다면, 또는 새로운 판이 예쁘게 나와서 읽을 수 있다면, 이렇게 만나는 책은 얼마나 기쁘거나 놀랍거나 반갑다 할 만할까요.

 

 좋다는 책 한 권 읽으면서 마음을 아름다이 돌볼 수 있습니다. 좋다는 책 한 권 읽지 못한다지만 마음을 얼마든지 아름다이 보살필 수 있습니다.

 

 내 어린 나날을 돌아보노라면, 나는 그리 좋다 할 만한 책을 읽은 일이 드물지만, 내 어린 나날이 슬펐다거나 심심했다거나 고달팠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책이 없어도 놀이동무가 많았습니다. 책을 읽지 못했으나 마음껏 뒹굴며 놀 수 있었어요.


.. 머나먼 스위스 두메 마을에 여러분 또래의 여자 애가 살고 있습니다. 이름은 플루리나예요. 산골짝에 여름이 찾아오면 플루리나네는 살던 집을 떠납니다. 보세요! 플루리나가 아침 일찍부터 오빠 우즐리랑 부모님이랑 함께 살림살이를 수레에 싣고 염소 떼를 몰고 사뿐사뿐 여름 목장으로 올라가고 있어요 ..  (4쪽)

 


 책으로 배운 이야기는 없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책으로 익힌 삶이란 없다 할 만합니다. 집안에서는 집일이나 심부름을 합니다. 집밖에서는 끝없이 달리고 뛰며 놉니다. 내가 집안에서 들은 이야기는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입니다. 내가 집밖에서 들은 이야기는 동무들끼리 주고받는 놀이 얘기입니다.

 

 돌이키면, 어머니한테서 돈을 받아 주먹에 땀이 돋도록 꼭 움켜쥐고 가게로 달려가서 다시 집으로 씽 달려오던 심부름이 책 하나입니다.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형하고 나하고 기름통을 둘씩 들고는 기름집에 가서 보일러 기름을 사오던 심부름이 책 둘입니다. 밥을 먹고 나서 스스럼없이 설거지를 하던 형을 바라보며 아차 내가 먼저 해야 하는데 하고 깨우치던 일이 책 셋입니다. 개구진 놀이를 하던 나나 다른 동무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런 개구진 짓이 얼마나 재미없고 바보스러운지 아느냐면서 똑똑하고 차분하게 짚어 주던 6학년 적 부반장 아이 말마디가 책 넷입니다. 닭똥 냄새 물씬 나는 사육장 청소를 나랑 둘이서 군말 없이 하던 내 동무 매무새가 책 다섯입니다.

 

 좋은 책은 우리 곁 어디에나 있습니다. 좋은 책은 내 삶 어느 자리에나 있습니다.

 

 좋은 책은 좋은 삶입니다. 좋은 책은 좋은 이야기입니다. 좋은 책은 좋은 웃음이요 좋은 눈물입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바닷물이 좋은 책입니다. 새하얀 구름과 소낙비 몰고 다니는 뭉게구름이 좋은 책입니다. 무지개가 좋은 책이고 수없이 반짝거리는 까만 하늘 뭇별이 좋은 책입니다. 우지끈 내리치는 벼락이 좋은 책입니다. 짠내 가득한 갯벌에서 살아가는 조개와 게가 좋은 책입니다. 바닷가 갈매기와 멧골짝 우람한 나무가 좋은 책입니다.


.. 그때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마치 “도와 주세요! 살려 주세요!” 하고 외치는 소리 같아요. 우는 소리,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 아주 작은 짐승만이 낼 수 있는 소리입니다. 산 아이 플루리나는 바위에서 벌떡 일어나 덤불 속을 샅샅이 뒤져 봅니다. 저것 좀 보세요. 여우예요! 틀림없어요. 여우가 새를 물어 가고 있어요! 플루리나가 야단을 칩니다. “이 못된 녀석, 어서 그 새 이리 내놓지 못해! 명령이야!” ..  (8쪽)

 


 널따랗고 새까만 아스팔트길은 좋은 책이 못 된다고 느낍니다. 골목길에서까지 싱싱 달리는 자동차는 좋은 책이 못 된다고 느낍니다. 쉰 층 백 층 뾰족하게 솟는 높다란 건물은 좋은 책이 못 된다고 느낍니다. 멧골짝부터 졸졸 흐르는 냇물이 아니라 도시 한복판에서 수도물 힘으로 흐르는 겉으로만 맑아 보이는 도랑물은 좋은 책이 못 된다고 느낍니다. 먹고 나면 비닐쓰레기를 잔뜩 남기는 과자들 그득그득 쌓인 커다란 가게들은 좋은 책이 못 된다고 느낍니다.

 

 좋은 책 하나를 찾는 마음이라면 좋은 삶 하나로 내 나날을 꾸리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내 가슴속에서 길어올리고, 좋은 이야기를 옆지기하고 오순도순 나누며, 좋은 이야기를 아이들하고 도란도란 새로 피워내는 삶이 곧 좋은 책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날이 차츰 추워지는 가을에 비로소 도시를 떠났습니다. 날이 차츰 추워지는 가을부터 비로소 시골에 삶터를 마련했습니다. 나는 시골살이를 제대로 몰랐으니 가을에 삶터를 옮기고 맙니다. 시골살이를 조금이라도 짚으려 했다면, 새봄이 찾아올 때에 삶터를 옮겨, 새봄부터 땅뙈기를 일구어 내 보금자리에서 내 먹을거리 마련할 길을 찾겠지요. 겨울을 앞둔 가을날 시골로 들어선다면, 내 땅뙈기를 집 옆에 얻더라도 겨우내 푸성귀를 일구지 못해요. 날씨가 풀려 씨앗이 뿌리내려 잎을 틔울 봄까지 기다리며 푸성귀를 사다 먹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아버지요 어버이라고 느낍니다. 어른이 되어 종이로 된 책은 많이 읽었어도, 몸뚱이로 아로새길 삶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읽었더라도 옳게 삭히지 못했기에 슬기롭다 할 만한 길을 못 찾곤 합니다. 다만, 나 스스로 참 어리석거나 어설픈 길을 걸었으니, 아이들한테는 다른 길을 보여주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지 몰라요. 어쩌면, 어리석거나 어설픈 길을 걸은 나머지, 아이들한테까지 어리석거나 어설픈 길을 똑같이 보여주거나 이야기할는지 모릅니다.


.. 플루리나는 새끼새를 놓아주고 싶지 않습니다. 우즐리가 화를 냅니다. “불쌍한 새를 놓아줘. 안 그러면 새장 안에서 죽고 말 거야.” 플루리나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 새끼새를 안고 엉엉 울면서 절벽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끼새를 쓰다듬어 줍니다. 아, 플루리나가 이 조그만 목숨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요. 플루리나는 차마 제 손으로 새끼새를 놓아주지 못합니다 … 이별이란 아이들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  (18쪽)

 


 알로이스 카리지에 님 그림과 셀리나 쇤츠 님 글이 어우러진 그림책 《여름 산 아이 플루리나》(아이세움,2002)를 읽습니다. 스위스 두메에서 살아가는 두 아이 플루리나와 우즐리는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마을에서 살고, 봄부터 여름까지는 멧골에서 삽니다. 이 아이들과 어버이는 살림집이 둘이에요.

 

 참 좋네. 참 좋겠구나.

 

 어, 그러고 보니, 우리 식구도 이렇게 두 살림집을 꾸릴 수 있습니다. 아직 살림돈이 모자라고 생각이 깊지 못한 아버지 때문에 두 살림집을 꾸릴 엄두를 못 냈지만, 겨울날에는 마을집에서 지내고 여름날에는 멧골집에서 지낼 수 있어요. 마을집은 겨울날 따스히 보내며 쉬거나 책을 가까이하는 터로 삼고, 멧골집은 드넓은 멧자락 품에 안기며 내 가슴을 확 틔우는 마당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 이제 마차에 짐을 다 실었습니다. 마차를 타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지나 집으로 가는 시골길로 내려갑니다. 우즐리가 고삐를 잡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플루리나는 아무도 몰래 산을 향해 손을 흔듭니다. 새끼새에게도 손을 흔듭니다! ..  (26쪽)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마을집과 멧골집을 오가며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천천히 자랍니다. 스스로 밥을 짓고 스스로 옷을 지으며 스스로 집을 짓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길을 스스로 익힙니다. 어버이가 이모저모 가르치거나 물려주기도 할 테지만, 어버이 또한 당신이 어릴 적에 당신 어버이한테서 배우며 함께 살아갔듯, 당신 아이들한테 똑같이 삶과 꿈과 일과 놀이와 사랑과 믿음을 고이 나누겠지요.

 

 멧골아이 플루리나와 우즐리는 따로 학교에 다니는 듯하지 않습니다. 아니, 겨울철 마을집에서는 학교에 나갈는지 몰라요. 학교에 나가서 마을 동무하고 어울릴 수 있겠지요. 봄부터 이른가을까지는 멧자락에서 풀과 나무와 구름과 하늘과 새와 들짐승하고 어우러지면서 살아가고 배워요. 저녁이 되면 집에서 어버이하고 밥상 앞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성경책을 읽겠지요. 유럽 나라이니까요.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여름 산 아이 플루리나》에 나오는 두 아이처럼 살아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고 여길 만합니다. 이렇게 학교나 학원하고 동떨어진 채 자연하고만 지내는 아이란 없다고 할 만합니다. 텔레비전이나 동화책이나 문제집이나 논술책하고는 등진 채 멧골과 푸나무와 멧새랑 어우러지는 아이란 없다고 할 테지요.

 

 플루리나랑 우즐리는 손전화를 모르고 셈틀을 모릅니다. 오늘날 한국땅 아이들은 손전화를 잘 알고 셈틀을 잘 다룹니다. 플루리나랑 우즐리는 밥을 하고 옷을 기우며 집을 손질할 줄 압니다. 오늘날 한국땅 아이들은 무엇을 잘 할 만할까요.

 

 전철을 탈 줄 알고, 카드를 긁을 줄 알며, 영어로 얘기할 줄 아는 오늘날 한국땅 아이들은 어떤 꿈을 누구랑 어디에서 어떻게 꽃피우는 아름다운 나날을 누릴 수 있을까요. (4345.2.3.쇠.ㅎㄲㅅㄱ)


― 여름 산 아이 플루리나 (알로이스 카리지에 그림,셀리나 쇤츠 글,이지연 옮김,아이세움 펴냄,2002.4.10./7500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2-03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2-03 11:31   좋아요 0 | URL
올해로 서른여덟이에요.

가장이라는 짐보다는,
식구들하고 살아가는 앞길을 얼마나 제대로 생각했느냐 하는 대목에서
찬찬히 짚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하고 느껴요.

아마, 지난 여섯 해보다 더 많이 헤매면서
올 한 해 길찾기를 하는 갈림길이 아닌가 싶어요~ @.@

2012-02-03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2-03 11:34   좋아요 0 | URL
도시나 시골이나 어느 삶터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느껴요.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는 까닭이라면,
도시이든 시골이든
나 스스로 어떤 삶터에 있는가를
제대로 느끼지 않으면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즐겁고 맑게 살아가는 길을 생각하지 못하고 말아요.

그런데 이제 거의 모든 도시 거의 모든 살림집에서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찾을 즐거움을
스스로 살피지 않고,
이런 흐름이 더 짙어지기에
자꾸 이렇게 글을 써야 하지 않느냐 싶기도 해요.

어느 구석에선가
예쁘고 즐거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그래서 한쪽으로만 쏠리는 삶이 아니라
골고루 살아가는 길을 찾는다면
좋으리라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