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질을 하다가
옆지기가 “이제 돈을 좀 많이 벌어 봐요.” 하는 말을 하기에,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재주라면, 글을 쓰고 책을 내어 널리 읽히는 일. 그러면, 나는 사람들이 많이 읽어 줄 만한 글을 써야 하는가.
아니다. 나는 사람들한테 널리 읽힐 만할 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과 이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한테까지 두루 물려주면서 맑은 빛을 누릴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많이 팔아서 많이 버는 돈이 아닌, 삶다운 삶을 누리도록 이끌거나 돕는 글을 일구어, 이 글을 발판으로 우리 살림살이가 참다이 나아질 수 있는 길을 가야 한다는 소리이다.
도마질을 하다가 또 생각한다. 열 몇 해째 쓰는 이 도마를 열 몇 해쯤 앞서 4만 원쯤 주고 샀지 싶다. 그러나 이 도마는 네 식구 살림으로 쓰기에 퍽 작다. 나 혼자 살면서 장만했기에 한 사람, 때로는 집에 놀러온 한두 사람한테 밥을 차리기에 알맞춤한 도마이다. 네 식구 여느 살림으로 쓰자면 도마가 한결 커야 한다. 새 도마는 진작 장만해야 했는데, 좀처럼 도마 값으로 쓸 돈을 마련하지 못한다.
칼 한 자루 아무 칼이나 장만할 수 없다. 그릇 하나이든 수저 한 벌이든 아무렇게나 장만할 수 없다. 오래도록 쓸 살림이요, 오래도록 쓰다가 아이들이 물려받을 수 있는 살림인데, 이 살림을 쓰는 동안 언제나 기쁘며 좋아야 한다.
누군가는 도마나 칼이나 그릇이나 수저가 어떠하든 밥만 잘 먹는다 이야기하리라. 누군가는 도마이든 무어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른 데에 눈길을 두겠지.
나는 옆지기하고 함께 느낀다. 곰곰이 따지면 옆지기한테서 하나하나 천천히 배우면서 함께 느끼지 않느냐 싶은데, 오늘 이곳에서 네 식구 함께 나눌 밥을 마련하는 어버이로서 내 도마와 내 칼과 내 푸성귀를 사랑스레 다루어 좋은 마음을 품을 수 있으면 흐뭇하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도마질일 수 없잖은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글쓰기이거나 책쓰기가 될 수 없잖은가.
그예 꿈을 꾼다. 네 식구가 여섯 식구가 되고, 여덟 식구가 되며, 열두 식구도 되고 스무 식구도 될 앞날을 꿈꾼다. 앞으로 우리 식구들이 어디에서 어떤 살림을 돌보면서 얼크러지면 아름다울까 하고 꿈을 꾼다. 타샤 튜터 할머니는 당신 그림과 책을 팔아 십만 평 땅을 사서 돌보았다는데, 나는 내 글과 사진과 책을 팔며 땅을 얼마만큼 장만해서 우리 식구들 흐뭇한 나날을 누리도록 할 수 있을까.
옆지기가 밤새, 또 새벽까지 울며 보채는 아이한테 젖을 물리고 따스히 토닥이면서 잠재운다. 나는 어버이로서 아이를 얼마나 보드라이 얼싸안으면서 따사로이 잠재울 수 있을까. 할아버지가 되어 아이를 아끼기 앞서, 아버지일 때부터 아이를 아껴야 넉넉히 큰 도마에 식구들 밥차림 고이 내놓을 수 있으리라. (4345.1.8.해.ㅎㄲㅅ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