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 읽기
나는 책을 그닥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입시지옥이니까 세 해를 죽은 사람처럼 지내라 하던 고등학생이 되고부터 이 끔찍한 수렁에서 견딜 구멍을 찾다가 책읽기 하나를 살짝 엿보았습니다. 좋아서 들어선 책읽기는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인천 시내 일곱 군데 있던(1991년 무렵)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는 척하면서 열람실에서 옛날 신문과 여러 가지 책을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부터는 헌책방이라는 곳을 비로소 몸으로 느껴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헌책방에서 하루 내내 놀았습니다. 다섯 학기를 다닌 다음 그만둔 대학교에서는 오직 술과 짝짓기에 얼이 빠진 사람들 꼴이 보기 싫어 구내서점과 도서관에서 알바를 했고, 남는 틈에 서울 시내 헌책방을 돌아다녔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사귀면서 사랑다운 살가운 삶을 누릴 수 있다면, 나한테 책읽기란 애써 찾아들지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아니, 다른 모습으로 책읽기가 찾아들었겠지요.
처음 책읽기 구멍을 비집고 들어갈 때에는 인문책이라 하는 책이랑 문학책만 파고들었습니다. 대학교에 살며시 몸을 둘 때에는 우리들을 이토록 못살게 굴며 괴롭히는 사회와 교육 얼거리를 파헤치고 싶어 교육책과 어린이책을 파고들었습니다. 대학교 그만두고 오직 신문배달만 하며 살림을 꾸리는 동안 문학책은 더 읽지 않기로 다짐하고, ‘남자 아닌 여자가 쓴 책’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이 나라 뼈대와 살점을 비틀거나 비뚤어지게 하는 힘은 으레 남자한테서 나오는구나 싶어, 아주 아름답다 싶은 남자 글쟁이가 아니라면 남자가 쓰는 글은 영 미덥지 않았어요. 글솜씨가 투박하거나 글재주가 없더라도, 수수하면서 따사로이 들려주는 ‘여자가 쓴 책’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여자가 쓴 책이라 하더라도 돈·힘·이름에 눈이 먼 사람이 쓴 책은 몹시 너절합니다. 더없이 슬프도록 안쓰럽습니다. 사랑을 말하지 못하고 삶을 밝히지 못하며 사람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글도 아니요 그림도 아니며 사진 또한 아닙니다.
나한테는 아무 스승이 없습니다. 나한테 스승이 될 만한 어른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꾸 책읽기로 숨어듭니다. 내 둘레에서 몸뚱이와 마음밭으로 길동무가 되거나 이슬떨이가 될 어른이나 이웃이나 동무를 좀처럼 못 만나니까요.
네 해 즈음 이오덕 님 글과 책을 갈무리하는 일을 하면서, 이토록 치우치지 않고 이토록 곧게 한길을 씩씩하게 걸은 사람이란 매우 드물지만 아예 없지는 않다고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이오덕 님 둘레에서 고물을 받아먹거나 챙기는 사람들은 하나도 곧지 않고 하나도 맑지 않으며 하나도 정갈하지 않았어요. 글이든 책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문학이든, 사랑과 삶과 사람이 맨 먼저예요. 사랑과 삶과 사람을 밝히지 못한다면 어떠한 문학상이든 문학단체이든 덧없어요. 교수가 되려고 글을 쓰겠습니까. 작가가 되려고 글을 쓰겠습니까. 돈을 벌려고 글을 쓰겠습니까.
글을 쓰다가 교수도 되고 작가도 되며 돈도 벌 수 있어요. 그러나 글쓰기 꿈이나 앞날은 교수·작가·돈이 아니에요. 참다운 사랑과 착한 삶과 고운 사람이에요.
옆지기를 만나 아이 둘을 함께 낳아 살아가며 책읽기 흐름이 크게 달라집니다. 마음 둘 자리 없어 하루에도 두서너 군데 책방마실을 하며 오직 책을 사고 책을 읽으며 책을 쓰거나 만드는 일만 하며 수렁에서 허덕이다가, 비로소 삶을 일구며 사랑을 꽃피우고 사람이 되는 길로 한 발짝 내딛습니다. 그동안 머리맡에서 생각조각으로 맴돌던 ‘책읽기 = 삶읽기’, ‘삶읽기 = 책읽기’, ‘글쓰기 = 삶쓰기’, ‘삶쓰기 = 글쓰기’를 시나브로 하나씩 받아들입니다.
내 아이한테 세 해 남짓 기저귀 빨래를 해서 대지 못한다면 어버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기저귀 빨래란 어떤 이름표입니다. 기저귀 빨래를 한대서 훌륭하지는 않아요. 기저귀 빨래를 몸으로 맞아들이면서 삶책을 읽습니다.
곧, 아이들과 살붙이한테 밥을 차려 내놓으며 수천 수만 수억 해에 이르러 찬찬히 이어오는 목숨꿈을 읽고 목숨빛을 들려줍니다. 갓난쟁이한테 젖을 물리면서 수천 수만 수억 해에 이르러 물결처럼 고이 흐르는 목숨무늬를 읽고 목숨결을 들려줘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인문책을 좀처럼 읽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말하는 여느 인문책은 인문책답지 않다고 느껴 애써 읽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 말하는 ‘인문책을 읽자’ 하는 외침말에 실리는 인문책은 참 인문책이라기보다 지식책이기 일쑤입니다. 인문책에서 ‘인문’이란 “사람들 사랑스러운 삶”이에요. 사람책이요 사랑책이며 삶책이지 않다면 인문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한자라는 껍데기에서 스스로 풀려나 내 얼굴 내 몸뚱이 내 뼉다귀 내 발바닥 내 핏줄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읽을 ‘인문책’이란 어떤 모습 어떤 빛깔 어떤 그림일 때에 아름다운가를 느끼리라 믿어요. 이리하여, 나는 여느 인문책이 몹시 따분하며 뻔한 마무리로 나아가기만 한다고 깨닫습니다. 지식과 정보를 어수선하게 뒤엉켜 놓으며 사람들 눈길을 값싸게 사로잡으려 한다고 느낍니다.
살이 되고 삶이 되며 사랑이 되고 피가 되는 인문책이란 삶책입니다. 살아가며 언제나 곁에 두며 되읽는 책입니다. 되읽을 만하지 않다면 애써 장만할 값이 없고, 아이한테 물려줄 만하지 않다면 굳이 읽을 뜻이 없으며, 조그마한 내 집 책시렁에 꽂으면서 흐뭇할 만하지 않다면 딱히 책이라 이름붙일 보람이 없습니다.
밤새 바람이 제법 드세게 불더니 남녘땅 고흥에도 눈이 조금은 내리며 마당과 지붕과 동백나무 잎사귀와 마늘밭에까지 아주 얇은 이불 하얗게 넓게 드리웁니다. (4345.1.4.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