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지붕에 살며시 쌓인 눈
지난가을 끝무렵, 남녘땅 고흥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고 나서 처음으로 지붕에 살며시 쌓인 눈을 봅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무렵은 지붕에만 살짝 쌓이더니, 새벽에 내다보니 마당에도 살짝 쌓입니다. 그러나 이 눈을 밟아도 발자국이 나지 않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거의 없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언제 눈이 나려 살짝 쌓였느냐는 듯이 모두 녹아 말끔히 마르겠습니다.
눈이 없어 눈을 쓸 일이 없습니다. 눈이 없이 물이 얼 근심이 없습니다. 눈이 없어 보일러 기름 끌탕이 적습니다. 눈이 없으니 눈싸움 눈사람 눈놀이 모두 없습니다. 꽁꽁 얼어붙는 냇물이나 논바닥에서 지치기를 할 수 없습니다. 눈이 없는 만큼 눈으로 즐기는 삶은 없습니다.
영화로 나온 〈말괄량이 삐삐〉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그리 멀지 않던 예전 사람들은 누구나 겨울날 얼굴이랑 손이랑 발이랑 몸뚱이랑 발갛게 얼어붙으면서 눈을 만지고 놀았습니다. 눈을 다루는 멋스러운 그림책이 없더라도, 눈밭에서 뒹구는 사람과 짐승이 얼크러진 예쁜 만화영화가 없더라도, 스스로 눈사람이 되고 눈아이가 되어 눈이야기 잔뜩 일구었습니다.
눈을 뭉치자면 장갑을 끼지 못합니다. 맨 손바닥으로 뭉쳐야 제대로 뭉칠 수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왜 장갑을 끼면 눈을 못 뭉치는지 지식으로는 몰랐으나, 그냥 몸으로 알아서, 눈놀이를 할 때면 누구나 장갑을 벗었습니다. 나중에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며 학교에서 지식으로 배운 다음 겨우 알지만, 이때에는 눈놀이를 하는 눈아이에서 멀리 동떨어집니다. 오직 시멘트 학교 건물 전깃불 밑에서 눈이 나빠지면서 참고서랑 문제집을 외워야 했으니까요.
눈이 있어 눈아이가 됩니다. 눈이 없어 들아이가 됩니다. 눈이 있으면 눈놀이를 하고, 눈이 없으면 들에서 들놀이를 해요.
눈이 있는 나라에서는 눈으로 놀겠지요. 눈이 없는 나라에서는 달리 있는 무엇으로 신나게 놀겠지요.
그러나, 눈이 있고 거센 바람이 있으며 매서운 추위가 있는 조금씩 북쪽으로 올라가는 곳에 살림집이랑 마을이랑 있는 아이들은, 또 어른들은 눈이 있어도 눈을 누리지 않고 바람이 있어도 바람을 맞지 않으며 추위가 있어도 추위를 즐기지 못해요. (4345.1.4.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