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 들판 마음똑똑 (책콩 그림책) 9
무라나카 리에 글, 고야마 코이코 그림, 김지연 옮김 / 책과콩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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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꽃그릇에서나 싹이 틉니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10] 고야마 코이코·무라나카 리에, 《양말 들판》(책과콩나무,2011)

 


 어느 꽃그릇에서나 싹이 틉니다. 애써 무얼 심지 않더라도 어느 꽃그릇에서나 싹이 틉니다. 다만, 바람이 드는 곳에 있는 꽃그릇이어야 합니다. 바람이 들지 않는 곳에 갇힌 꽃그릇이라면, 이 흙에서는 싹이 돋기 어렵습니다.

 

 흙 속에서 곱게 잠자며 기다리던 풀씨가 몇 있다면, 바람이 들지 않을 뿐더러 깜깜한 곳에 있는 꽃그릇이라 하더라도 싹이 틀 수 있어요. 보드라운 흙은 자그마한 씨앗한테 힘을 북돋우거든요. 따사로운 흙은 조그마한 씨앗한테 새숨을 불어넣거든요.

 

 사람들이 씨앗을 심은 논밭에서 싹이 돋습니다. 사람들이 씨앗을 심지 않은 논밭에서 풀삭이 돋습니다. 풀싹이 돋으면 푸성귀나 곡식이 제대로 영글지 못할까 걱정하면서 김을 맵니다. 푸성귀랑 곡식 싹만 살리고 다른 풀싹은 뽑거나 베거나 갈아엎습니다.

 

 김을 매고 또 매어도 풀싹은 끝없이 올라옵니다. 따사롭고 너그러운 흙은 수없이 많은 씨앗을 품에 안거든요. 사람들이 아무리 풀을 뽑아도 풀은 사람한테 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시멘트나 아스팔트를 덮더라도 풀은 견디거나 기다립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자동차를 몰며 배기가스를 내뿜어도, 사람들이 아무리 공장을 돌려 더러운 바람과 물을 내뿜어도, 풀은 씩씩하게 새로 돋고 다시 돋습니다.


.. 실컷 뛰놀고 돌아가는 길, 공원에 들러 양말을 벗었어요. “으아, 새까맣다.” “지저분한 걸레 같아.” “너무 더러워.” 조심조심 잘 벗어야 해요. 비닐봉지에 넣어서 유치원까지 가지고 가야 하니까요 ..  (8쪽)


 사람이 먹지 못할 풀은 없습니다. 사람한테 도움이 안 될 풀은 없습니다. 사람한테 싱그럽지 못할 풀은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몇 가지 푸성귀만 가릴 뿐입니다. 그냥저냥 사람들 스스로 온갖 풀이 어떻게 내 몸을 살찌우거나 돌보는가를 잊을 뿐입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한테 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풀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중학교에서 아이들한테 풀을 기르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고등학교에서 아이들한테 풀을 먹도록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대학교에서 아이들한테 풀을 사랑하도록 일깨우지 못합니다.

 

 옛 시인 김수영 님이 읊은 〈풀〉을 학교에서 문학으로 배우곤 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풀이 어떻게 눕는가를 아이들이 몸소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이 나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에서는 풀이 눕는 모습을 볼 만한 빈터가 아주 적거나 없습니다. 서울 여의도에, 서울 종로에, 서울 압구정동에, 서울 명동에, 서울 신촌에, 서울 혜화동에, 서울 대방동에, 서울 어디에 풀이 숨쉴 만한 터가 있을까요.

 

 부산에는, 대구에는, 대전에는, 청주에는, 익산에는, 원주에는, 순천에는, 거제에는, 풀이 얼마나 홀가분하게 제 결과 무늬와 빛깔과 내음을 건사할 터가 있는가요.


.. 다음날, 화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화분은 그대로였어요. “선생님, 양말에 물 줘도 돼요?” “선생님, 그럼 나중에 양말꽃이 피는 거예요?” “글쎄요, 뭐가 나올지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해요.” ..  (12쪽)


 아이를 낳는 어버이들이 으레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 살아가다가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를 낳는 어버이들이 어버이가 되기까지 풀하고 멀찍이 떨어져 지내다가, 아이를 낳고 나서도 풀하고 좀처럼 가까이 지내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는 어버이들이 풀을 어디에서 얻어 어떻게 손질하면서 어떻게 밥거리로 삼는가를 도무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자가용이 풀을 짓밟습니다. 농약과 풀약이 풀뿐 아니라 풀이 깃든 흙을 망가뜨리거나 죽입니다. 수많은 전기전자제품과 공산품이 풀밭을 밀어냅니다. 수많은 전기전자제품과 공산품이 이윽고 쓰레기가 되어 풀밭을 쓰레기터로 바꿉니다.

 

 그림책 《양말 들판》을 두 아이를 옆에 앉히고 읽으며 생각합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두 아이 어버이인 나부터 풀을 잘 모릅니다. 두 아이 어버이인 나부터 풀을 더 잘 알거나 살피거나 맞아들이도록 애쓰기보다는 책을 더 자주 읽고 글을 더 자주 씁니다. 풀이 자랄 터에 쓰레기가 널렸어도 제대로 치우지 않습니다. 풀씨가 자라는 모습을 아이들하고 살그머니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나무씨 심을 마땅한 보드라운 흙을 살뜰히 돌보지 않습니다.

 

 풀과 나무가 자랄 흙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감이며 능금이며 배이며 살구이며 복숭아이며 즐길 수 없습니다. 풀과 나무가 자라며 씨를 맺는 흙을 보살피지 않으면서 쌀이며 보리이며 수수이며 서숙이며 맛나게 먹을 수 없습니다.


.. 민호는 손가락으로 흙을 파냈어요. “앗!” 민호는 엄마 양말에서 힘없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싹을 톡톡 건드려 보았어요 ..  (27쪽)


 고야마 코이코 님이 그림을 그리고, 무라나카 리에 님이 글을 넣은 그림책 《양말 들판》은 꽤 볼 만합니다. 들판을 잊고 찻길과 건물만 지을 줄 아는 오늘날 어른들한테 이야기 한 자락 예쁘게 들려줍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사랑해야 하는가를 찬찬히 알려줍니다. 흙 없이 목숨을 잇는 사람은 없습니다. 흙 없이 숨을 쉬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집을 지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흙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그림책 《양말 들판》입니다. 들판은 양말을 신고 거닐며 ‘한 번 겪어(체험)’ 볼 수 있을는지 모르나, 한 번 겪으며 그칠 들판이 아니에요. 언제나 곁에 둘 들판이요, 늘 맨발로 디딜 들판이에요.

 

 꽃그릇에는 양말을 심지 않아도 싹이 돋습니다. 꽃그릇에는 씨앗을 심지 않더라도 싹이 납니다. 배를 먹고 남은 씨앗을 심으면 돼요. 능금을 먹고 남은 씨앗을 심으면 돼요. 아마, 배씨와 능금씨는 어린이집 아이들이 어른이 될 무렵에야 비로소 다시 열매를 맺을는지 몰라요. 씨앗을 심은 아이들은 잊을 테지만,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을 무렵에는 비로소 우람한 나무를 마주하면서 씨앗이 어떤 꿈이요 사랑이며 목숨인가를 뒤늦게 깨닫도록 도울는지 몰라요.

 

 우리가 다 함께 하면 좋겠어요. 나한테 돈이 많건 적건, 흙을 밟을 만한 땅뙈기를 조금씩 장만하면 좋겠어요. 한 평이든 열 평이든 백 평이든, 천천히 흙땅을 장만해서 이곳에 풀싹이 마음껏 자라도록 하든, 내 꿈을 담은 자그마한 씨앗을 심든 하면서, 내가 늙은 뒤에 머물 고운 쉼터가 되도록, 내 아이들이 자라서 즐거이 집을 지을 만한 예쁜 자리가 되도록, 먼먼 뒷날 이 지구별에서 아름다이 살아갈 사람들 꿈이 돋을 기쁜 보금자리가 되도록 마음을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느 꽃그릇에서나 싹이 틉니다. 어느 마음밭에서나 사랑이 자랍니다. 어느 마을에서나 풀과 나무가 따순 눈길·넉넉한 손길·싱그러운 마음길인 사람을 기다립니다. (4344.12.15.나무.ㅎㄲㅅㄱ)


― 양말 들판 (고야마 코이코 그림,무라나카 리에 글,김지연 옮김,책과콩나무 펴냄,2011.3.25./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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