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선 나무
유경환 지음, 이혜주 그림 / 창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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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으로 쓰는 시 한 줄
 [어린이책 읽는 삶 14] 유경환, 《마주 선 나무》(창작과비평사,2002)

 


- 책이름 : 마주 선 나무
- 글 : 유경환
- 그림 : 이혜주
-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2002.11.30.)
- 책값 : 6500원

 


 (1) 삶이 드러나는 시


 모든 글에는 글을 쓴 사람 삶이 깃듭니다. 글쓴이 삶이 깃들지 않는 글이란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해 보았다든지, 어디를 가 보았다든지 하는 삶부터, 아이들이나 동무들하고 어울리는 삶까지 두루 담는 글입니다. 먹어 본 밥이 어떤 느낌이었나 하는 삶을 담고, 해 본 일이 어떠했다는 삶을 담으며, 만난 사람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하는 삶을 담습니다.

 

 아무개 삶이 가장 거룩하지 않습니다. 저무개 삶은 부질없지 않습니다. 저마다 아름다운 삶이요, 누구한테나 다 달리 고마운 삶입니다.


.. 나무들 / 손짓으로 말하고 있다 ..  (강변 나무들)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봅니다. 우리 시골마을인 전라남도 고흥에는 푸른잎을 떨구지 않은 나무가 많습니다. 보름쯤 앞서 서울마실을 하면서 바라보니, 서울 쪽으로 갈수록 나뭇가지가 앙상합니다. 늘푸른나무를 빼고는 아마 거의 모든 나무가 잎을 떨구었겠지요.

 

 인천에서 살던 때에는 동백나무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마 인천에도 동백나무를 돌보는 골목집이 있었을 텐데, 나는 골목동네 동백나무를 옳게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시골에서 얻은 작은 집 대문 옆에서 자라는 동백나무를 날마다 바라보면서, 비로소 아하 동백나무는 이렇구나, 동백나무는 추운 날 꽃을 피우는구나, 동백나무는 추운 날 잎을 떨구지 않고 이렇게 짙푸른 잎사귀를 뽐내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동백나무는 꽃을 피우고, 곁에서 자라는 후박나무는 아직 꽃을 안 피웁니다. 후박나무도 머잖아 꽃을 피우려고 꽃망울이 부풀었는데, 좀처럼 꽃잎을 벌리지 않습니다. 날이 더 추워야 꽃망울을 터뜨릴까요.


.. 울타리 / 나무들이 / 베를 짠다 / 할머니처럼 ..  (나무 울타리)


 이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들면 집 둘레에 자라는 나무들이 새 잎과 새 눈을 틔우겠지요. 온누리 숱한 나무가 새로운 풀빛 옷을 입겠지요.

 

 감 한 알 맛나게 먹고 나서 생각합니다. 이 감알을 작은 꽃그릇에 심어 볼까. 능금과 배도 한 알씩 사서 먹은 다음 능금씨와 배씨도 꽃그릇을 마련해서 심어 볼까. 이 씨앗에서 싹이 돋고 줄기를 올리면, 마당 한켠에 옮겨심어 볼까.

 

 왜 진작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지만, 아직 어리석은 내 삶이니까, 천천히 하나씩 깨달으리라 믿습니다. 어리석은 먼지를 시나브로 털면서 내 삶을 곱게 다스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천천히 자라듯, 어버이로서 천천히 무르익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날마다 말을 하나둘 익히듯, 어버이답게 나날이 넋과 얼과 뜻과 꿈을 조금씩 살찌우리라 믿습니다.


.. 아가 앞니 쪼끔 돋았다 / 새봄 연둣빛 / 속잎처럼 ..  (아가 앞니)


 글을 쓰는 사람은 글에 이녁 삶을 담습니다. 흙을 일구는 사람은 흙 묻은 손으로 논이랑 밭에 이녁 삶을 담습니다. 자가용을 모는 사람은 싱싱 붕붕 내달리는 찻길에서 이녁 삶을 드러냅니다. 손전화를 쥔 사람은 누군가하고 전화기로 이야기를 나눌 때에 이녁 삶을 보여줍니다.

 

 언제나 담는 내 삶입니다. 어디에서나 보여주는 내 삶입니다. 늘 드러나는 내 삶입니다. 노상 함께할밖에 없는 내 삶이에요.

 

 사랑하는 만큼 사랑스레 가꾸는 내 삶입니다. 아끼는 만큼 돌보는 내 삶입니다. 못마땅해 한다면 못마땅한 길을 걷는 내 삶입니다. 내팽개친다면 그야말로 아무 데서나 나뒹구는 내 삶이에요.


.. 이파리 퍼진 만큼 / 햇살 머물고 // 이파리 넓이만큼 / 햇살 담긴다 ..  (담쟁이 넝쿨)


 따뜻한 기운 올라오는 방바닥에 둘째 갓난쟁이 기저귀를 펼칩니다. 밤새 잘 마른 기저귀는 방바닥 따순 기운을 받으며 보송보송해집니다. 네 살 첫째 아이가 깨어나 쉬를 눈 다음, 이 기저귀를 함께 갤 생각입니다. 나는 이 빨래를 언제나 혼자 후다닥 개곤 했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집일을 혼자 하려고 들면 안 돼요. 함께 해야지요. 함께 누리고 함께 즐기며 함께 나누어야지요.

 

 밥할 때에 아이한테 자그마한 심부름을 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옆지기 말을 되뇝니다. 그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차려 주어서는 안 되는 줄 생각하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참말 그래요. 나는 집일을 도맡는다 하지만, 막상 집일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하나하나 알뜰히 짚지 못하는 삶입니다. 이러다 보니, 애써 집일을 도맡는다 하지만 더 알차며 푸근하게 돌보지 못해요.

 

 그러면 아이한테 무슨 일을 시킬까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합니다. 푸성귀를 헹구라고 해 볼까. 종지에 간장을 부어 보라고 할까. 주걱으로 밥을 푸라고 할까. 국자로 국을 뜨라고 할까. 국 간을 맞출 때에 숟가락에 소금을 얹으라고 할까. 찬찬히 돌아본다면 아이한테 맡길 만한 일이 많습니다. 콩나물을 헹구라고 시킬 수 있습니다. 작은 칼로 두부를 썰라 맡길 수 있습니다. 시켜 버릇하지 않으니까, 아이가 맡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혼자 후딱 해치우자는 생각에 사로잡히니까, 막상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면서 나 스스로 더 홀가분하거나 기쁘지 못했구나 싶어요.


.. 도토리 한 개 / 씨로 심었더니 / 떡갈나무 잎 두 쪽 / 나왔다 ..  (오늘)


 시골집 뒤꼍 낡은 집 허문 자리에서 슬레이트 조각을 주울 때에, 첫째 아이도 곁에서 아버지가 줍듯 따라서 줍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안 시켜도 스스로 심부름거리를 찾습니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 때에도 아이는 어느새 좇아나와 빨래를 집어 건네고, 빨래집게를 잡아서 내밉니다. 아이 키에 맞는 빨래대에 아이가 손수 빨래를 집어 널곤 합니다.

 


 (2) 못난 삶도 잘난 삶도 없어요


 겉치레라 해서 나쁜 삶은 아닙니다. 겉꾸밈에 치우친다 해서 못난 삶이 아니에요. 겉발림이 가득하기에 모자란 삶일 수 없습니다.

 

 유경환 님 동시집 《마주 선 나무》(창작과비평사,2002)를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책 뒤쪽에는 “참 맑은 마음, 참 깨끗한 시”라는 추천글이 적힙니다. 나는 이 추천글이 참말 옳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합니다. 글이 어떠할 때에 맑거나 깨끗하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삶이 드러나는 글인데, 이러한 추천글이라 한다면, 동시를 쓰는 유경환 님 삶이 맑거나 깨끗하다는 소리인지 궁금합니다.

 

 나는 어린이시이고 어른시이고 늘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맑게 살아갈 때에 맑다고 느낄 시를 씁니다. 맑지 않게 살아갈 때에 맑지 않다고 느낄 시를 씁니다.

 

 예쁜 낱말을 골라서 시를 쓰기에 예쁜 시가 되지 않습니다. 맑구나 싶은 낱말을 골라서 시를 엮는다고 맑다고 할 만한 시가 되지 않아요.


.. 졸음에 잠긴 / 간이역 // 기차가 들어오자 / 하품한다 // 할머니와 아이가 내리고 / 기차는 조용히 떠나고 // 매암 매암 // 남기고 간 기적 소리 / 매미가 / 따라 운다 ..  (매미)


 간이역은 졸음에 잠기지 않습니다. 서울역이나 용산역이나 부산역이나 대전역은 어떠할까요. 내가 느끼기로는 외려 서울역이나 부산역이 졸음에 잠겼습니다. 너무 힘겹고 너무 고단해서 졸음에 잠긴 서울역이로구나 싶어요. 하루 스물네 시간 잠잘 겨를이나 쉴 틈이 없어요. 늘 꾸벅꾸벅 조는 서울역이에요. 시골 간이역은 일할 때에 신나게 일하고 쉴 때에 느긋하게 쉽니다.

 

 왜 시골 간이역을 졸음에 잠긴다고 생각하거나 바라보거나 느낄까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 섣부른 생각이나 치우친 마음이 아닌가요.

 

 나는 이러한 시를 맑은 시라고 느낄 수 없습니다. 나는 이러한 글을 맑은 삶에서 우러나오는 맑은 시라고 여길 수 없습니다.


.. 들판 / 가득히 / 풀꽃 자리하였지만 // 뿌리 내린 / 넓이만큼밖엔 // 욕심이 / 없다 // 들판 가득히 / 풀꽃 덮인 까닭이 보인다 ..  (들꽃)


 풀꽃한테 욕심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잴 수 없습니다. 풀꽃은 꼭 풀이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릴 만한 자리에 풀포기 삶만큼 자랍니다. 봄에 먼저 돋는 풀이 있고, 여름에 잇따라 돋는 풀이 있으며, 가을에 천천히 돋는 풀이 있어요. 참 조그마한 자리에 수많은 풀이 끝없이 자랍니다. 흙은 이 풀 저 풀 골고루 밥을 내어주고, 햇살은 모든 풀에 따사로이 볕을 나누어 줍니다.

 

 아이들이 욕심 없이 자라기를 바라며 이렇게 풀꽃 시를 쓴다 하겠지요. 그러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어른들은 욕심이 없나요. 어른 스스로 욕심이 없기에 아이들한테 욕심 없이 내 자리를 찾으라는 동시를 써서 내밀 수 있나요.

 

 시험과 성적과 숙제와 체벌과 규칙으로 얽매인 학교에서 아이들은 참말 따스하거나 너른 꿈을 꾸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아이들한테 착한 꿈과 맑은 삶을 어른들이 얼마나 보여주면서 이끄는지 아리송합니다.


.. 가뭄 끝에 내린 / 벼 포기 잘 자란다 // 목말라 마신 빗물 / 짙푸르게 퍼진다 // 똑바로 줄 선 벼 포기 / 줄줄이 앞으로 나란히 // 우리도 일학년 때엔 / 저렇게 줄을 섰었지 ..  (줄줄이 앞으로 나란히)


 오늘날 여름에 가뭄은 없습니다. 오늘날 여름은 끔찍한 막비입니다. 하루이틀 사흘나흘 아닌 열흘 스무 날 서른 날 지치지 않고 퍼붓는 막비예요. 이 동시집 나온 2002년이라 해서 그닥 다르다고 느끼지 않아요.

 

 우리 어른들이 동시를 머리로 함부로 짓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벼를 노래하려면 참말 벼하고 함께 살아가는 매무새와 넋으로 벼를 그리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오늘날 논자락 벼포기는 기계로 심어요. 기계로 줄을 맞춰요. 몹시 억지스러운 줄이요, 기계다운 줄입니다. 이러한 줄이랑 일학년 운동장 줄서기를 견주는 일이란 얼마나 끔찍한가요.

 

 왜 아이들을 줄세워야 하나요. 줄세우던 일이 얼마나 애틋하게 그릴 만한 일이 될는지요.

 

 논자락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제아무리 기계로 심은 볏모라 하더라도 똑같이 생긴 볏모란 없습니다. 풀포기는 하늘을 바라보며 뾰족뾰족 서지 않습니다. 모든 풀은 하늘을 바라며 줄기를 올리지만 살짝살짝 옆으로 퍼집니다. 조금조금 옆으로 퍼지다가는 키가 커지면서 가만히 눕습니다. 다 다른 씨에서 다 다른 싹이 돋아 다 다른 벼가 돼요. 다 다른 사랑씨로 다 다른 아이가 태어나서 다 다른 삶으로 자라요.


.. 숲 속은 노래 연습실 / 새들 음정 같지 않다 // 숲 속은 노래 연습실 / 제각기 음정 고른다 // 숲 속은 노래 연습실 / 화음 안 맞아도 곱다 ..  (숲 속 노래방)


 새들은 지저귑니다. 새들은 노래한다고 합니다. 새들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주 마땅하지요. 다 다른 새이니까 다 달리 지저귀지요. 참새라 하더라도 같은 참새는 없어요. 까치라 하더라도 같은 까치란 없어요.

 

 아이들이 같은 아이들이겠어요. 어른들도 같은 어른들인가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에 걸맞게 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리면서 다 다른 목소리로 다 다른 말을 빚습니다.

 

 그야말로 “맑은 시”나 “깨끗한 시”라 할 때에는 예쁘장하게 보이는 말솜씨로 빚는 시가 아닙니다. 맑은 시는 맑은 넋으로 맑은 삶을 일구는 맑은 꿈에서 시나브로 피어납니다.

 

 동시집 《마주 선 나무》에 붙은 추천글을 더 읽으면 “자연 앞에 한없이 겸손하고 순수해지는 짧은 동시”라는 글줄이 있습니다. 아마 유경환 님은 자연 앞에 그지없이 고개숙이는 매무새로 짤막하게 동시를 썼달 수 있어요. 오래오래 자연 앞에 몸을 숙이면서 아이들하고 동시를 나누려 했달 수 있어요.

 

 자연 앞에 고개숙일 줄 알기에, “어느새 우리 마음도 아기처럼 해맑고 깨끗해진답니다” 하는 추천글처럼 유경환 님 동시를 읽을 만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달리 느낍니다. 아기들은 풀이나 나무하고 겨루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기를 낳는 어버이 또한 새나 벌레하고 다툼질을 하지 않습니다. 누가 높고 누가 낮지 않아요. 서로 돌보고 서로 아낍니다.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잣나무가 거룩하고 참나무는 덜 떨어지지 않아요. 소나무는 우쭐하고 대나무는 쭈뼛쭈뼛할 수 없어요.

 

 사람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은 사람을 사랑하면 즐겁습니다. 서로 착하게 아끼면서 참다이 얼싸안으면 기쁩니다.

 

 해맑은 사랑씨를 빚는 삶이라면 어느 어른이라도 해맑은 나날을 누리면서 해맑은 꿈과 빛줄기를 아이들하고 나눕니다. 동시라는 글줄만 해맑게 보일 수 없어요. 동시를 쓸 때에만 곱다 싶은 낱말을 고른다 해서 해맑게 거듭나지 않아요.


.. 겨울 느티나무 / 잔가지들이 / 조금씩 나누어 입는 / 햇볕 // 느티나무 밑에서 / 우리도 나누기를 배우자 // 한 뼘씩의 / 따순 하늘 // 한 줌 씩의 / 따순 볕 // 느티나무도 / 우리도 // 이렇게 겨울을 / 함께 나자 ..  (겨울 느티나무)


 나는 우리 아이들이 말재주를 배우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가르침이나 일깨움에 어설피 휘둘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따스하고 넉넉한 품을 아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삶으로 쓰는 시 한 줄인 줄을 느끼며 자라기를 바랍니다.

 

 삶을 쓰는 시이면서 삶으로 쓰는 시입니다. 삶을 찍는 사진이며 삶으로 찍는 사진입니다. 삶을 그리는 그림이나 만화이면서 삶으로 그리는 그림이나 만화예요.

 

 글매무새 가꾸기 앞서 삶매무새 가꿀 노릇입니다. 아니, 삶을 알뜰살뜰 일굴 때에는 내 글과 말을 알뜰살뜰 일굴 수 있어요. 삶을 착하고 참다이 돌볼 때에는 내 글과 말을 착하고 참다이 돌볼 수 있어요.

 

 우리 말글을 바르게 쓰는 지식을 배운다면 덧없습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익히는 일이란 부질없습니다. 말에 담는 넋을 삶으로 느껴야 합니다. 글에 싣는 사랑을 삶으로 깨우쳐야 합니다.

 

 아이들은 동시를 읽기 앞서 착한 삶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동시를 쓰기 앞서 착한 삶을 일굴 줄 알아야 합니다. (4344.12.1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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