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코의 술 애장판 4
오제 아키라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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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씨앗은 참 작디작아요
 [만화책 즐겨읽기 89] 오제 아키라, 《나츠코의 술 (4)》



 새벽이슬 맞은 논둑 풀포기 하나를 살짝 뜯어서 맛봅니다. 아버지가 풀포기 하나 바라보며 뜯자니, 곁에 선 네 살 아이가 “나도 먹을래.” 하면서 제 작은 손으로 작은 풀포기 하나 뜯어 입에 넣습니다. 이슬방울 맺힌 풀포기를 살살 씹습니다. 보드라운 풀잎사귀와 싱그러운 새벽이슬 내음이 물씬 퍼집니다.

 논둑 풀 이름은 모릅니다. 잎사귀부터 이렇게 작으니 꽃이 핀다면 꽃은 더없이 작겠지요. 꽃이 더없이 작으면 씨앗은 얼마나 더 작을까요.

 누가 씨앗을 뿌렸기에 자라는 풀이 아닙니다. 누가 김을 매거나 약을 쳐 주어 무럭무럭 자라는 풀이 아니에요. 풀은 작은 뿌리를 내리고 작은 잎을 틔우며 작은 꽃을 피우다가는 작은 열매를 맺은 다음 작은 씨앗 내놓습니다. 사람들이 느끼건 못 느끼건 제 숨을 잇습니다. 사람들이 허리 숙이거나 쪼그려앉아 들여다보건 안 들여다보건 제 푸른 내음을 퍼뜨립니다.

 아침이 밝습니다. 이슬이 마릅니다. 안개가 걷힙니다. 동이 트며 날은 차츰 따뜻해집니다. 한여름에도 한겨울에도 어둔 밤이 지나 밝은 낮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추운 한겨울이더라도 낮은 밤부터 따스합니다.

 따순 낮이 찾아오면 잎사귀를 천천히 여는 풀입니다. 밤에는 천천히 오므리며 잠들다가는 새벽부터 시나브로 잠을 깨는 풀입니다.

 사람도 밤에는 잠들고 새벽에 기지개를 켜며 아침에는 바지런히 제 일을 합니다. 제 삶을 꾸리는 한낮입니다.

 모든 목숨은 햇살이 비추는 따스함을 먹으면서 자랍니다. 늙은 짐승도 햇살을 먹으며 살아가고, 어린 짐승도 햇살을 먹으며 살아가요.

 햇살을 듬뿍 받은 풀을 작은 짐승이 먹습니다. 햇살 듬뿍 받은 풀 먹은 작은 짐승을 좀 덩치가 큰 짐승이 낼름 잡아서 먹습니다. 풀잎에 깃들어 풀잎을 야금야금 뜯는 벌레가 있습니다. 풀벌레는 풀짐승한테 풀과 함께 잡아먹히곤 합니다. 다른 벌레는 이 풀짐승이나 고기짐승이 죽고 난 주검을 야금야금 뜯습니다. 흙에서 태어난 목숨은 곱게 흙으로 돌아갑니다.


- “농민들도 만일 병충해에 당한다면, 하는 불만을 다 갖고 있습니다. 벌레 먹은 쌀은 아무도 사 주지 않으니까요.” “그 말은 소비자도 농약을 사용한 쌀을 원하고 있다는?” “그렇습니다.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농사를 잘 지어 하얗고 깨끗한 쌀을 수확한다, 이건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 “그리고 최근에 도복경감제라는 것도 개발되었어요.” “도복경감제?” “네에. 벼가 쓰러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벼의 세포를 줄여 키만 작게 만드는 약이죠.” “벼의 세포를 줄여요?” “농민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죠. 하하하하.” “그 말은, 기형 벼를 만든다는 건가요?” (8∼9쪽)
- “하지만 벼가 쓰러진 건 태풍 탓만은 아니야. 다들 화학비료를 퍼부어 가며 수확량을 늘리려 하니까. 그러면 분명 수확량은 늘지만 줄기와 뿌리가 튼튼하게 자라지 못한다고. 태풍이 오지 않았다 해도 결국 쓰러졌을 거야.” (158쪽)



 따순 날씨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자, 모든 목숨이 서로를 아끼는 사랑입니다. 뭇사람을 어여삐 여기는 하늘이 뭇사람 누구나 사이좋게 어울리기를 바라며 따순 날씨를 베풉니다. 비록 참 많은 사람들이 너무 어리석거나 어리숙하게 돈벌이 밥그릇에 얽매이지만, 이렇게 어리석거나 어리숙한 사람들 또한 어여삐 제 목숨을 사랑하거나 아끼기를 바라면서 따순 날이 이어집니다.

 따순 날은 따순 사랑입니다. 추운 날은 추위를 견디며 서로 살가이 보듬는 사랑입니다. 따순 넋을 따순 손길로 나누는 삶입니다. 추위에 꺾이지 말며 추위에 한결 튼튼해지라는 삶입니다.

 이제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남았다 할 만한 시골마을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구부정한 허리와 여린 힘으로 흙을 일굽니다. 시골에 젊은이가 없다지만, 면사무소나 군청이나 공공기관이나 학교에 찾아가면 모두들 젊은이입니다. 젊은이는 햇볕이 들지 않는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하루를 보냅니다. 맑거나 흐리거나 노상 책상 앞입니다.

 시골에 늙은네만 남아 걱정스럽다는 이야기를 싣는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이 많지만, 막상 이렇게 이야기를 외기만 할 뿐,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날, 시골로 돌아가서 늙은 어버이와 함께 흙을 일구는 젊은네는 드뭅니다. 아예 없다 해도 틀리지 않아요. 한 살이라도 더 젊을 적, 시골로 찾아가 내 예쁜 보금자리를 일구어 보겠다고 꿈꾸는 사람은 참 적습니다. 아예 없지 않습니다만, 마땅한 보금자리 하나 마련하기 벅찹니다.


- “내가 하려는 일이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란 걸 알았어. 아니,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모두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걸 알았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츠코.” “고작 25평짜리 논의 잡초를 뽑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야. 내가 직접 해 보니 실감이 나더라. 재배회를 만들면 모두에게 그 몇 배나 되는 고생을 강요하게 돼.” (24쪽)
- “아, 어느새. 이 감자가 너무 맛있다 보니. 그럼 염치불구하고. 어느 채소 가게에서 사온 건가요?” “다 내가 직접 지은 거야. 당신이 싫어하는 유기농 재배로. 훌륭한 농작물은 예술이야. 난 그렇게 생각해.” (56쪽)



 시골 작은 면에는 일거리가 얼마 없습니다. 시골 작은 군이라 해서 일거리가 많지 않습니다. 시골에 빈 터가 많고, 시골 논밭이라 하더라도 일손이 빠듯합니다.

 곰곰이 생각하며 꿈을 꿉니다. 면사무소 일꾼과 군청 일꾼이 한갓지게 책상을 지켜 앉기보다, 아침 두 시간, 낮 두 시간, 이렇게 하루 네 시간 면내 시골마을 논밭이랑 군내 시골마을 멧자락이나 바다를 돌면서 일손을 함께하면 얼마나 좋으랴 꿈을 꿉니다. 모두들 자전거를 몰아 가까운 논밭에서 일을 하면 얼마나 즐거우랴 꿈을 꿉니다. 면사무소나 군청을 찾는 손님이 있으면, 면사무소나 군청에서 전화를 걸고, 논일이나 밭일이나 멧일이나 바닷일을 하던 면사무소 일꾼이나 군청 일꾼은, 이 전화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자전거를 몰아 당신들 면사무소나 군청으로 돌아와서 민원을 다룬다면, 얼마나 재미있으랴 꿈을 꿉니다.

 면사무소가 아예 논밭 한가운데 자리하면 좋겠습니다. 여느 때에는 면사무소 둘레 논밭에서 구슬땀을 흘리면 좋겠습니다. 군청이 바닷가 앞이면 좋겠습니다. 여느 때에는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거나 낙지를 잡으면 좋겠습니다.

 저녁에 하루일을 마무리지을 때에는 한 시간쯤 일찍 일터를 나서서,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한 병을 꽂고는, 시골마을 어르신 댁에 날마다 한 곳씩 찾아가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는 당신 보금자리로 돌아가면 참 아름답겠다고 꿈을 꿉니다.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누군가 한 사람 소매를 걷고 애쓰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 “그래, 그 녀석은 초짜야. 벼농사 따위 알지도 못하지! 하는 짓도 다 엉망진창이고! 그 초짜가, 농사라곤 지어 본 적도 없는 젊은 여자가, 농사꾼인 내게 좋은 쌀을 지어 보자고 했다고! 이건 뭔가 거꾸로 된 거 아니야?” (32쪽)
- “논은 꼴도 보기 싫다면서, 그래서 난.” “이제 좋아졌어.” “저, 정말 괜찮겠어? 잘 생각해 보라고. 농사꾼 마누라가 얼마나 힘든지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45쪽)
- “이 낟알 중에 붉게 변한 쌀이 들어가는 게 아닐까요?” “뭐야, 너. 벼멸구 걱정하고 있는 거냐? 흥. 이렇게 잘 영근 낟알에 그런 게 들어 있을 리 없지.” “하, 하지만.” “나츠코, 논에는 벼멸구뿐만 아니라 온갖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네에, 거미에 지렁이, 우렁이 같은 기분 나쁜 벌레들이 잔뜩.” “그게 뭐가 기분 나쁘냐. 난 다들 예쁘기만 하던데. 거미는 하루에 벼별구를 5마리고 10마리고 먹어치우지. 벌레 한 마리 없는 깨끗한 논일수록 무서운 거야. 약으로 아주 씨를 말렸다는 거니까. 이로운 벌레와 해로운 벌레의 싸움 속에서 벼는 자라는 거다. 그게 논의 법칙이야.” (192∼193쪽)



 오제 아키라 님 만화책 《나츠코의 술》(학산문화사,2011) 4권을 읽습니다. 작은 힘으로 작은 논에서 작은 쌀을 거두는 작은 사람 이야기를 읽습니다. 《나츠코의 술》은 틀림없이 ‘술 만화’이지만, 2권부터 4권까지 술 이야기는 아예 안 다룹니다. 2권부터 4권까지 오로지 ‘술을 빚을 밑거름이 될 쌀을 짓는 이야기’만 다룹니다.

 《나츠코의 술》 4권을 덮고 5권을 읽기 앞서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좋은 술은 틀림없이 예술입니다. 틀림없이 예술인 좋은 술이란 바로 좋은 삶입니다. 좋은 삶이 담겨 좋은 술로 태어납니다.

 좋은 술이 되자면 좋은 쌀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쌀 또한 틀림없이 예술입니다. 좋은 쌀이 되자면 좋은 흙에서 좋은 볍씨를 뿌려 좋은 땀을 흘리는 좋은 흙일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나오는 술을 떠올립니다. 이름난 술 회사에서 만든다는 술을 헤아립니다. 글쎄, 한국땅 한국술은 얼마나 좋은 사람들이 좋은 흙에서 좋은 땀을 흘리며 거둔 좋은 곡식으로 빚는 좋은 술이라 할 만할까요.


- “피었다! 꽃이 이렇게 작으니 못 알아봤지!” “난 금방 알아봤는걸. 그렇지 않아도 오늘쯤 피지 않을까 싶었어. 이삭이 좀 부풀어 보였거든. 나츠코 씨, 정말 여기서 나고 자란 거 맞아? 어릴 때 한 번도 못 본 거야?” “호.” “왜, 왜?” “촌뜨기!” (66쪽)
- “쯧쯧. 한 포기 벨 때마다 그렇게 쳐다보다간 언제 일을 끝내려고.” “나츠코 입장에서 보면 무리도 아니죠. 저 녀석이 키운 벼인걸요.” “그야 나도 알지. 그냥 쌀이 아니지. 이건.” (173쪽)
- “아, 벼에 아직 낟알이 붙어 있어요, 할아버지!” “바보야, 그네에 걸리지 않는 뿌리 쪽 낟알은 필요없어. 제대로 영글지 않은 쭉정이라고.” “그, 그래도 몇 알은 영근 게 있을지도.” “크하하. 없어, 없어. 어차피 봄에 염수선 하면 둥둥 다 떠오를 거다.” (194쪽)



 씨앗은 작습니다. 사람 몸피와 견주면 씨앗은 작습니다. 사람 몸피와 따로 견주지 않더라도 씨앗은 작습니다. 우람한 느티나무를 이루는 씨앗이든, 빨갛게 흐드러지는 단풍나무를 이루는 씨앗이든, 맛난 감알이나 배알을 맺는 감나무 배나무 씨앗이든, 모든 씨앗은 참으로 작습니다.

 작은 씨앗에서 목숨이 태어납니다. 작은 씨앗에서 태어난 목숨에 사랑이 깃듭니다. 작은 씨앗에서 태어난 목숨에 깃든 사랑으로 저마다 아끼고 돌보는 예쁜 삶을 꽃피웁니다.

 작은 씨앗 낳는 목숨들이 작은 마을을 이룹니다. 작은 씨앗 낳는 목숨들이 이루는 작은 마을에서 작은 꿈을 피웁니다. 작은 꿈은 작습니다. 작은 꿈은 작게 이루는 열매입니다. 작게 이루는 열매는 작은 사람들 삶을 살찌우는 작은 밥입니다. (4344.11.29.불.ㅎㄲㅅㄱ)


― 나츠코의 술 4 (오제 아키라 글·그림,박시우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8.25./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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