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아이와 걷는 길
 [고흥살이 2] 자동차 거의 안 다니는 길에서 놀기



 빗방울이 들지 않으면 자전거를 끌고 면에 다녀오려 했습니다. 빗방울이 뚝뚝 듣다가는 후두둑 쏟아지기까지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자전거는 놓습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면으로 갈까 싶으나 버스 때가 맞지 않습니다. 집에서 면까지는 2.1킬로미터. 네 살 첫째 아이가 제법 잘 걸으니까 우산을 쓰고 걸어갈까 하고 생각합니다.

 비는 내리다 멎다 합니다. 아이는 혼자서 우산을 펴겠다고 합니다. 아직 혼자 우산을 끄지 못하지만, 단추를 꾸욱 눌러 혼자 우산을 펼 수 있습니다. 아이한테 우산은 제법 크고 무겁다 할 만하지만, 아이는 이 우산을 씩씩하게 들고 기운차게 걷습니다.

 아이 작은 손가방을 아버지 우산 고리에 겁니다. 아이는 저도 이렇게 하겠다며 제 손가방을 달랍니다. “너한테는 무거울 텐데?” 아이는 십 미터쯤 제 우산 고리에 작은 손가방을 걸친 채 걷다가 “아버지, 이거.” 하면서 제 우산을 들며 손가방 도로 가져가라 합니다.

 비가 멎을 때에는 아버지한테 우산을 들어 달라 합니다. 제 손가방을 달랍니다. 이렇게 이십 미터쯤 가다가 “아버지, 이거.” 하고 다시 부르더니 제 손가방을 들어 달랍니다. “나, 뛸래.” 



 짐 하나 들지 않고 홀가분하게 달리는 아이는 아버지보다 앞서 갑니다. 혼자 두 팔 휘휘 저으며 앞서 달리다가는 뒤를 돌아보며 살짝 멈추었다가는 다시 달립니다. 길가에 선 큼지막한 글씨판을 보고는 “저게 뭐야?” 하고 묻습니다. 길가에 선 ‘30’이라는 숫자를 보고는 “저 동그라미 뭐야?” 하고 묻습니다. “응, 서른이야.” “서른?” “서른.”

 빈 논에 앉아 이삭을 줍던 참새떼가 파르르 날아갑니다. 까치떼도 멧비둘기떼도 화다닥 날아갑니다. 그저 옆에서 걸어갈 뿐이지만, 이 새들은 저렇게 멀리까지 내뺍니다. 



 자동차가 거의 안 다니는 호젓한 길입니다. 문득 앞에 뭔가 드러누운 모습이 보입니다. 이 길바닥 한복판에 차에 치여 죽은 짐승 한 마리입니다. 내장이 터져 비져나오고, 이빨이 톡 튀어나옵니다. 자동차가 조금 더 천천히 달린다면 이 짐승을 치지 않을 텐데요. 밤이라 하더라도 싱싱 내달리지 않는다면 멧짐승이나 들짐승이 슬프게 죽지 않을 텐데요.

 옆으로 논이 길게 펼쳐진 길을 걷습니다. 논자락 길이지만 시멘트로 닦인 널따란 길입니다. 경운기나 짐차가 다니자면 이렇게 널따랗게 시멘트로 발라야 하겠지요.

 마을 사이를 지나갑니다. 아이는 쉴 사이 없이 여기에 쪼그려앉고 저기에 쪼그려앉습니다. 다 벤 논에 자라는 풀을 쓰다듬으면서 “풀아, 잘 있어.” 하고 인사합니다. 늦가을에 피는 들꽃을 내려다보며 “꽃아, 잘 있어.” 하고 인사합니다. 몇 걸음 못 떼면서 여기 바라보고 저리 들여다보느라 바쁩니다. 이것을 만지고 저것을 건드리느라 부산합니다. 



 호덕마을을 빠져나올 무렵, 시멘트를 깔지 않은 흙 논둑길을 봅니다. 아이랑 이 길로 접어듭니다. 아이는 또 쪼그려앉습니다. “이거, 반지 하는 풀이야.” 토끼풀 하나 톡 뽑으며 아버지한테 보여줍니다.

 호덕마을에서 나와 다시 찻길을 걷습니다. 아이는 찻길 한복판 노랗게 그은 금을 밟으며 달립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아무 자동차가 안 보입니다. 십 분 남짓 아무런 자동차 없는 길을 걷자니 앞에서 군내버스 하나 다가옵니다. 아이를 불러 길가에 섭니다. 버스를 바라보며 손을 흔듭니다. 빗줄기가 조금 굵어집니다. 아이는 풀섶에서 강아지풀 하나 뜯습니다. 옆에 억새가 있기에 억새도 뜯어 보라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뜯은 강아지풀은 아버지한테 건네고, 제 작은 두 손으로 억새풀 하나 뜯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다가는 시든 꽃송이를 보고는 이 꽃송이를 셋 꺾습니다. 강아지풀이랑 억새풀은 한손에 쥐고, 시든 꽃송이 줄기 셋은 다른 손으로 쥡니다. 아버지는 우산을 펴서 아이한테 받칩니다. 빗줄기가 더 굵어집니다. 파리 한 마리 아이 우산 밑으로 들어옵니다. 



 이제 면에 들어서는 큰길입니다. 호덕마을과 동백마을을 지나 봉동마을로 나가는 찻길에는 드나드는 자동차 거의 없지만, 도화면으로 오가는 큰길에는 자동차가 제법 있습니다. 자동차가 여럿 오가니 아이가 외치는 소리가 잘 안 들립니다. 빗방울은 거셉니다. 아이는 얼른 걸을 생각을 하지 않고 종알종알 이야기를 합니다. 걸음을 재촉합니다. 큰길에서 벗어나 마을길로 접어듭니다. 이제 차소리에서 풀려납니다. 자동차 드나드는 길이란 걸을 만한 길이 못 됩니다.

 우체국에 들릅니다. 아이 신과 양말이 몽땅 젖었습니다. 양말을 벗깁니다. 신은 그대로 신깁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걷습니다. 가게에 들러 파리끈끈이를 사고, 빵집에 들릅니다. 면사무소에 들러 서류 하나 받습니다. 빗줄기는 더 거세집니다. 아이를 안고 택시 타는 곳으로 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택시를 탑니다. 아이는 졸음이 가득한 눈이지만 끝까지 졸음을 참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살짝이나마 잠들지 않습니다. 실컷 놀고 실컷 자며 실컷 다시 놀다가 밥을 실컷 먹으면 좋을 텐데. (4344.11.19.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