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건축 1 - 비원
임응식 지음 / 광장 / 1979년 6월
평점 :
절판




 자연에서 쉴 수밖에 없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68] 임응식, 《韓國의 古建築 ① 秘苑》(광장,1976)



 1970년대 끝무렵에 커다란 판으로 나온 얇은 사진책 묶음 “韓國의 古建築” 1번은 《秘苑》(광장,1976)입니다. 1970년대 끝무렵이란 새마을운동에 따라 시골마을 옛집이 거의 사라질 즈음입니다. 서울이나 크고작은 도시 커다란 기와집이나 궁궐이나 성곽은 문화재로 삼아 이럭저럭 건사하지만,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은 깡그리 무너지거나 허물려야 했어요. 대통령이 노랫말까지 붙여 ‘새마을운동’을 널리 퍼뜨리기에, 시골마을 흙길은 시멘트길로 바뀝니다. 소가 일구고 소가 갈던 논밭은 기계가 일구고 기계가 갑니다. 소는 흙에서 난 밥을 먹고 흙으로 거름을 돌려줄 뿐 아니라 제 몸뚱이인 고기까지 내줍니다. 기계는 기름을 먹고 배기가스를 내보낼 뿐 아니라 어느 만큼 나이를 먹으면 고스란히 쓰레기가 됩니다. 풀약 없이 흙을 일구고 비료 없이 곡식을 거두던 시골마을은 사라집니다. 참말 송두리째 사라집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풀약이나 비료가 따로 없더라도, 비닐이나 비닐집이 굳이 없더라도, 모두 한 끼니 밥을 먹는 걱정이 없었습니다. 나라와 땅임자한테 바치는 세금이 만만하지 않았더라도 그럭저럭 밥술은 들 만했습니다. 이제 이 나라 흙일꾼은 나라와 땅임자한테 세금을 톡톡히 바치면서, 풀약과 비료와 기름과 기계를 대느라 더 많은 품과 겨를과 돈과 땀을 바쳐야 합니다. 이러면서 참다운 밥과 싱그러운 물과 달콤한 바람을 맞아들이지조차 못해요.

 “韓國의 古建築”은 1번부터 7번까지 궁궐이나 성곽을 다룹니다. 이 가운데 꼭 하나, 강운구 님 《내설악 너와집》이 있으나, 이 나라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 이야기는 끼어들지 못합니다. “韓國의 古建築” 9번과 10번 은 제주섬 살림집 이야기라 하는데, 책으로 나왔는지 못 나왔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아직 저는 “韓國의 古建築” 9번과 10번은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주섬 살림집 또한 “韓國의 古建築”이라는 테두리에 깃듭니다. 어쩌면, 책이름부터 ‘옛 건축’이라는 낱말이니까,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은 이 테두리에 낄 수 없다 할 텐데요, ‘건축’이라는 한자말은 ‘짓집기’나 ‘지은 집’을 일컫습니다. 절집도 집이요 살림집도 집입니다. 기와집도 집이며 풀집도 집이에요. 임금님 살던 집도 집이면서 흙일꾼 살던 집도 집이에요.

 곰곰이 살피면,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면서 가장 뿌리깊으면서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가장 살가운 한편 가장 고맙고 거룩한 집이란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입니다. 이를테면, 2010년대에는 크고작은 도시에 가득한 아파트나 빌라가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이 될는지 모릅니다. 1950∼80년대에는 이때에 걸맞게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살림집이 있겠지요.

 골목동네 작은 사람들이 작게 일구는 텃밭과 꽃그릇 또한 ‘좋은 건축’입니다. 임금님이 쉬던 뒤뜰에 마련된 연못만 좋은 건축일 수 없습니다. 시골마을 흙일꾼이 알뜰히 일구는 논밭 또한 아름다운 건축입니다. 우람한 성곽이나 산성만 아름다운 건축일 수 없습니다. 바닷가 김밭과 미역밭과 조개밭, 이른바 뻘밭 또한 어여쁜 건축입니다. 멧자락 나물밭과 풀숲 또한 훌륭한 건축입니다. 나무마다 열매를 떨구어 오랜 나날에 걸쳐 이룬 나무숲 또한 거룩한 건축이에요.

 “후원은 창덕궁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대궐의 후원을 말하는데, 이곳은 정무에 시달리던 역대 임금들이 생활의 여가를 자연과 더불어 휴식하며 즐기던 곳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정원이다 … 창덕궁 후원이었던 비원은 왕이 생활의 여가를 자연과 더불어 휴식하고 즐기는 곳이었으므로 궁궐의 외전이나 내전과는 기본의장이 다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비원의 건물들은 지형과 산록의 모양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건립되었고 이에 수반된 연못들도 자연풍경에 따라 만들어져 은근하고 아담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42쪽/김원).”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나라일에 바쁘며 지친 임금님이 쉬던 뒤뜰이라는 ‘후원’이자 ‘비원’이라고 하는데, 나라님은 궁궐 한켠에 ‘숲을 따로 만들어서 쉬어야’ 했다고 합니다. 자연스레 살아숨쉬는 터가 아니라 사람들이 일부러 가꾸어 쉬도록 한 터라고 해요.

 자연 그대로 살리면서 풀숲과 나무밭과 연못 한켠에 조그맣게 논이랑 밭을 두었으면 참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먼 옛날 임금님이랑 신하가 아침저녁으로 푸성귀 잎을 솎고 김을 매거나 논물을 살필 줄 알았다면 아주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한쪽에는 닭을 치고 소한테 풀을 뜯길 수 있겠지요. 염소를 두어 젖을 짤 수 있으며, 돼지나 개가 다른 한쪽에서 살아갈 수 있어요.

 나부터 내 삶터를 돌아보면, 아직 내 손으로 씨앗을 심어 밭을 돌보거나 나무를 가꾸지는 못합니다. 추위를 앞둔 늦가을에 새 보금자리로 옮겼으니 씨앗을 심기에 너무 늦었달 수 있습니다. 올해를 묵고 이듬해부터 씨앗을 심을 만한지 모르지만, 우리 집 뒷자락 빈터 쓰레기를 고르고 물골을 낸 다음 씨앗을 심으며 가만히 기다려도 좋으리라 꿈을 꿉니다. 바람이 고요히 잠들고 햇살이 따스히 내리쬐는 날, 첫째 아이랑 함께 호미로 땅을 쪼아 씨앗 몇 알 심고 싶습니다.

 나도 옆지기랑 아이하고 우리 집 뒷자락을 뒤뜰이나 뒷밭이나 뒷터로 삼아 쉬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나무를 씨앗으로 심어 천천히 돌보고 싶습니다. 우리 살붙이는 씨앗을 심어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리는 모습을 누리고, 우리 살붙이가 낳아 돌볼 아이들과 이 아이들이 새로 돌볼 아이들은 우리 살붙이가 처음 씨앗을 심은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 아름드리가 될 모습을 누리면 돼요.

 사진책 《秘苑》을 다시금 들여다보면서 생각합니다. 임금님이건 흙일꾼이건 쉬어야 일을 합니다. 일을 한 다음에는 쉬어야 합니다. 오늘날 회사원이건 공무원이건 대통령이건 교사이건 노동자이건 쉬어야 합니다. 기자이건 판사이건 쉬지 않고서는 다시 일하지 못합니다.

 쉬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쉬는 나날인가요. 쉬는 터는 어떻게 마련하거나 찾아야 좋을까요. 어떠한 곳을 찾아가야 비로소 느긋하게 쉴 만한가요.

 극장에서 쉴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놀이공원이나 서울 명동이나 동대문 같은 데에서 쉴 만한지 궁금합니다. 술집이 늘어선 골목이나 여관이 줄지은 골목에서 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찜질방에서 쉬나요. 횟집에서 쉬나요. 포장마차에서 쉬나요. 노인정에서 쉬나요.

 사람이 사진기를 만들어 자연을 사진으로 담는 까닭은, 사람 스스로 빚은 물건과 사람 스스로 빚은 물건을 다루는 사람 모두 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영갑 님은 제주섬 오름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쉬었습니다. 안승일 님은 삼각산 한라산 백두산을 오르내리며 쉬었습니다. 전민조 님은 섬을 떠돌면서 쉬었습니다. 강재훈 님은 시골 분교를 찾아다니며 쉬었습니다.

 나는 헌책방 책밭이랑 골목길 텃밭을 찾아다니며 쉬었다든지, 시골집에서 아이들하고 복닥이면서 쉰다 할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내 옆지기는 이 시골집에서 느긋하게 쉴 만한지 곱씹어 봅니다. 쉬는 사람일 때에 쉬는 자연이며, 쉬는 자연은 쉬엄쉬엄 따사로운 사랑을 쓰다듬습니다.

 자연에서 쉴 수밖에 없던 임금님입니다. 억지로 애써 뒤뜰을 만들지 않고서는 버틸 재주가 없습니다. 자연에서 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억지로 애써 4대강을 손질한다며 법석을 떨밖에 없습니다. 자연에서 쉴 수밖에 없는 사진쟁이입니다. 패션사진을 하건 다큐사진을 하건 사진기와 사람이 너그러이 쉴 사진을 함께 누리지 못한다면 아무런 빛도 그림자도 꿈도 사랑도 사진이야기로 갈무리하지 못합니다. (4344.11.20.해.ㅎㄲㅅㄱ)


― 韓國의 古建築 ① 秘苑 (임응식 사진,김원 글,광장 펴냄,1976.9.1./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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