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실이 - 김은미 에세이집
김은미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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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아름다이 살아가고픈 꿈
 [책읽기 삶읽기 82] 김은미, 《꼬실이》(해드림,2010)



 우리 살붙이 새로 둥지를 틀 시골집을 계약합니다. 마을 어르신 네 분이 모여 지켜봅니다. 이튿날 아침, 등기이전을 하려고 집임자요 땅임자가 사는 동광양으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길을 달립니다. 집임자요 땅임자인 분은 땅만 등기를 해 놓고 집은 등기를 해 놓지 않았습니다. 옛날부터 이와 같았는데 이제껏 몰랐답니다. 법무사를 찾아가서 서류를 마무리하려다가 이 대목에서 걸려, 집 등기를 하기 앞서 갖출 서류를 새로 만들어야 하기에 동광양에서 고흥읍으로 돌아오고, 도화면사무소를 찾아가며, 다시 고흥읍으로 갑니다. 아침 일곱 시에 시골마을에서 길을 나섰는데, 저녁 여덟 시가 넘어서 겨우 마을로 돌아옵니다.

 땅은 등기가 되었으니 집은 그냥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내가 눈을 감거나 옆지기가 눈을 감은 다음, 이 집에서 우리 아이들이 고이 살아간다 할 때에, 또는 우리 아이들이 이 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간다 할 때에, 어버이 된 내가 집 등기를 제대로 마무리짓지 않으면 나중에 아이들이 또 골머리를 앓으면서 길에서 여러 날을 흘려야 합니다. 먼 뒷날을 곰곰이 그립니다. 아이들이 하루하루 슬프게 길에서 보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버이인 내가 여러 날 길에서 보내자고 다짐합니다. 밥 먹을 틈 없이 버스에 택시에 군청에 면사무소에 설계사무실에 한전에 우체국에 몰아쳐야 하지만, 나한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살붙이 살아가려는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로 돌아가는 군내버스를 타려다가, 고흥읍내 정류장 옆에 있는 조그마한 표파는곳 선간판을 봅니다. 저기에서 표를 끊는가 보구나. 맞돈 1900원을 내도 되지만 표를 끊고 싶습니다. 표파는곳에 섭니다.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니 종이에 고무도장 찍은 표입니다. 표값은 1800원. 시외버스 타는 데에서 군내버스를 타면 1900원이고, 여기에서는 1800원입니다. 한 장을 끊습니다. 곧이어 석 장을 더 끊습니다. 석 장은 두고두고 간직하려고 끊습니다. 누리끼리한 똥종이에 고무도장으로 1800 숫자를 찍은 조그마한 종이표가 애틋해, 이 버스표 석 장을 예쁘게 돌보고 싶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된 나이에는 이 종이표가 틀림없이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그무렵 ‘얘들아 너희 아버지가 이 마을에 살려고 막 들어와서 바쁘게 돌아다닐 때까지 이곳에서는 이 종이표를 끊어 버스를 탔단다.’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 식구 가운데 누구 하나 들어오지 않아도 굶는 꼬실이는 간밤 내내 자는 척, 사실은 기다리기만 했을 거다 … 어쩌다 아주 넓은 풀밭에 데려가면 그때야 사방을 뛰어다니느라고 잠시도 쉬지 않았지만 그럴 일이야 한 해 한 번이나 제대로 있을까 … 참 행복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며칠이건 몇 달이건 혹은 운 좋게 몇 해건 우리에게 허락될 그동안을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하자 … 언젠가는 헤어지고 말 것이지만, 추억으로 힘을 얻게 될 것이니 ..  (24, 100, 192, 201쪽)


 시골집 계약서를 쓰고 나니 마을 어르신들이 “잘 왔네, 축하하이. 이제 한 동네 사람이 된 거여.” 하면서 활짝 웃습니다. “마을에 살면 마을에 맞는 행동도 해야 하고 힘들 수도 있지만, 우리 마을이 보기보다 인심이 더 좋으니 걱정할 것 없으이.” 하면서 막걸리를 사발에 따릅니다. 마을에서 할머니로서는 가장 젊다는 이장님네 예순다섯 할머님이 술안주로 단감을 깎습니다. 단감은 이장님에 마당 가장자리 돌울타리 곁에서 자라는 감나무한테서 얻습니다.

 4일과 9일은 고흥읍 장날입니다. 10월 14일 어제, 새벽 세 시부터 빗방울이 들었습니다. 아침 여섯 시 무렵에는 주룩주룩 비가 내립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 되고 보니, 마을 분들은 들일을 나가지 않는답니다. 모두들 일할 때와는 다른 정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는 이른아침부터 읍내 나가는 버스를 탑니다. 들일을 쉬니 바깥 볼일을 봅니다. 마침 장날이기도 하고요.

 “우리 마늘이 임자 잘못 만나 불쌍하다 불쌍하다 했는데 비가 오긴 오네.” 나락 베기 앞서 밭자락 푸성귀를 거두고 한 차례 갈이를 하고 조금 있다가 마늘을 심습니다. 마늘을 심을 때에는 마을 할머님들이 서로 품앗이를 합니다. 젊은 날부터 함께 일하고 서로 돕습니다.


.. 예의니 도리니 하는 것으로 눈막음은 하지만 기실 병약하거나 늙은 사람들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 사람들은 죄다 한마디씩 한다. “어머, 이제 늙었나 봐. 하긴 오래 살았지. 확실히 늙은 티가 확 나네.” 등등 주절거리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누가 자기한테, 자기 어머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기분이 어떨까. 짐승에게는 도대체 배려라는 게 없는 게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 잠시 토닥토닥 두들겨 주다가 소파에 재워 놓고 눈을 감았다. 어떤 세상일까. 해가 눈부신 건 질색을 하는 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깜깜한 것이 하염없이 지속된다는 게 쉽게 견딜 일 아니다 … 간혹 나를 난감하게 하는 고집, 부릴 만하겠다 싶다 ..  (37, 45, 118쪽)


 이장님 댁에서 사흘 묵습니다. 우리 살붙이 지낼 집을 계약하기까지 묵도록 작은방을 내어주십니다. 밥도 ‘한 그릇 더 놓을’ 뿐이라면서 함께 먹습니다. “우린 시골이라 이렇게 풀만 먹어요.” 하면서 늘 드시는 밥차림 그대로 함께 먹습니다. 이 밥상을 옆지기가 함께 받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떠올립니다.

 꼭 알맞춤한 작은 집, 작은 마당, 작은 밭과 논, 작은 일손, 작은 마을입니다. 먼 옛날, 또는 가까운 지난날, 이 마을에 빈집이 없이 가득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북적였을까요. 마을 모든 집이 가득 찼다 하더라도 웬만한 도시하고 견주면 그야말로 조그마한 마을 아니었을는지요. 예나 이제나 이 마을은 그저 작은 마을이요 작은 사람들이면서 작은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나와 우리 살붙이는 이 작은 마을에 또다른 작은 사람이 되면서 작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즐거우리라 느낍니다.

 많이 벌어 많이 쓸 까닭이 없어요. 넉넉히 벌어 넉넉히 쓸 까닭이 없어요.

 꿈을 꿉니다. 알맞게 벌어 알맞게 알맞게 누리면서 살아갈 꿈을 꿉니다. 즐겁게 일해서 즐겁게 일한 만큼 버는 그대로 우리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랑 나누면서 살아갈 꿈을 꿉니다.

 나부터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즐길 때에 우리 아이들 또한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즐길 수 있으리라 느끼면서 살아가는 꿈을 꿉니다.


.. 슬프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목숨은 계속 살아지고 다시 다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결코 잊지는 않지만 헤어질 그 즉시처럼 인생이 자근자근 아프지는 않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런 마음을 다시 품게 된 것은 먼저 보낸 그 아이와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다 … 그 몫의 자리가 있고 그 몫의 사랑이 있다. 꼬실이가 죽고 나서 다른 개를 데려다 기르면서 꼬실이한테 미안한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으니까 …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는지 계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승들의 마음을 읽는다는 커뮤니케이터 아니더라도 나는 녀석의 마음을 대개 읽을 수 있다 ..  (128, 129, 151쪽)


 집살림을 하는 아주머니로 살아가는 김은미 님이 ‘막둥이 꼬실이’ 이야기를 적바림한 《꼬실이》(해드림,2010)를 읽습니다. 이야기책 《꼬실이》는 열여덟 나이까지 살아낸 꼬실이 마지막 삶을 돌아본 나날을 담습니다. 곁에서 사랑스러웠고 언제나 함께였던 막둥이가 조용하면서 얌전하게 눈을 감은 삶을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함께 살았으니 즐겁습니다. 서로 아꼈으니 사랑입니다. 나란히 밥을 먹고 잠을 잤으니 한식구입니다. 즐거운 삶에 따로 더 바랄 일이 없겠지요. 아끼는 사랑에 군더더기를 붙일 까닭이 없겠지요. 고운 한식구를 예쁘게 되새기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새롭게 맞이할 수 있겠지요.


.. 그렇게 계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헌책을 떠올렸다. 닳은 겉장, 바뀌기 이전 맞춤법, 조악한 인쇄, 금방이라도 낱장이 흩어질 것만 같은 제본 등, 하지만 100년 가까운 시간이 그 안에 꼭꼭 박혀 있을 터였다. 아버지 젊은 날에는, 우리가 한창 자라던 중장년 시절에는 우리든 누구든 그 책을 들추고 읽었으면 하고 초조하신 적도 있었으리라. 이렇게 좋은 경험, 참고할 것, 깊은 생각이 많은데 왜 아무도 주의 깊게 읽으려 하지 않나 괘씸하기도 하셨을 게다. 그렇지만 그 한 해, 아버지는 당신 혼자 넘기고 되넘기면서도 충분히 만족하신 듯이 보였다 ..  (55쪽)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퍽 널리 쓰입니다만, 나는 이러한 말이 퍼지는 일이 썩 달갑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으레 입으로만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욀 뿐, 정작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작게 살아가려 하지 않거든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남녘땅 한강과 낙동강과 금강과 섬진강을 쇠삽날로 망가뜨리는 일을 하지 말아야지요. 작게 작게 살려야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이루면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얼마나 많이 팔아먹어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가 따위를 읊지 말아야지요. 도시사람도 텃밭을 일구든 주말농장을 하든 스스로 흙을 만지고 아끼면서 내 먹을거리를 조금이나마 내 손으로 일구는 삶으로 바꾸어야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자가용하고 헤어지거나 자가용을 좀 덜 타야지요.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야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아파트를 이제부터라도 작게 지어야지요. 적은 돈으로도 살 만한 아파트를 짓고, 높직하게 올려세우지 말며, 알맞춤한 돈으로 살림집 마련해 알맞춤한 돈으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보살피면서 내 나날을 알맞춤하게 누려야지요.


.. 의지하고 믿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는 함께 배워 왔지요 … 막둥이 보낸 지 겨우 하루 지났다. 장난감이 부서진 게 아니라 사랑하는 식구가 죽은 거다 ..  (209, 260쪽)


 작은 아름다움이 아닌 큰 아름다움을 바라면서, 아니 아름다움조차 아닌 큰 것만 바라면서 ‘아름다움’이라는 낱말을 뒤에 붙이는 일은 몹시 슬픕니다. 아름다움은 크거나 작다고 가르지 못합니다. 큰 아름다움이 없고 작은 아름다움 또한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움이에요.

 작은 삶이 없고 큰 삶이 없습니다. 작은 사랑 또한 없으며 큰 사랑 따로 없어요. 그런데, 참말 이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름다이 살아가고픈 꿈’을 밝히기 힘듭니다. 따로 ‘작고’라는 꾸밈말을 앞에 달아 ‘작고 아름다이 살아가고픈 꿈’을 밝혀야 하는데, 이렇게 밝혀도 ‘작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을 찾기가 만만하지 않아요.

 《꼬실이》를 적바림한 김은미 님이 막둥이를 아끼면서 사랑한 나날 그대로, 저마다 제 고운 옆지기를 아끼면서 사랑하는 나날을 누릴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나는 내 옆지기와 살붙이를 곱게 아끼면서 사랑하는 길을 내 몸과 마음을 함께 살찌우면서 걷자고 헤아립니다.

 군말 한 마디 붙입니다. 이야기책 《꼬실이》는 애틋하고 아름다운데, 책 짜임새와 엮음새는 영 허술합니다. 출판사 일꾼이 제대로 마음을 기울이지 못해 퍽 서운합니다. 부디 사랑을 읽고 사랑을 나누어 주셔요. (4344.10.15.흙.ㅎㄲㅅㄱ)


― 꼬실이 (김은미 글·사진,해드림 펴냄,2010.12.31./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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