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디즈니 만화로 가장한 미 제국주의의 야만
아리엘 도르프만 외 지음, 김성오 옮김 / 새물결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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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을 수 없는데 느끼거나 좋아할 수 없다
 [책읽기 삶읽기 81] 아리엘 도르프만·아르망 마텔라르,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새물결,2003)



 책을 읽습니다. 글을 읽습니다. 신문을 읽고 잡지를 읽습니다.

 옆지기 마음밭은 어떠할까 가만히 어림하면서 마음읽기를 해 봅니다. 내 아이들 몸은 어떠한가 곰곰이 되짚으면서 눈빛읽기를 해 봅니다.

 읽으려 하기 앞서 느낄 일이겠지요. 무언가 알려고 하기 앞서 사랑할 일이겠지요.

 마음이 어떠한가를 읽는다면, 이렇게 읽은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때에 좋을까요. 마음읽기는 하지만 마음맺기를 하지 않는다든지, 마음읽기는 실컷 하면서 마음나눔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값이나 보람이 있을까요.

 아이들 눈빛은 읽지만 아이들 눈빛에 어리는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슨 뜻이 있을는지요. 아이들 눈빛을 알아채거나 느끼면서 아이들하고 사이좋게 어우러지거나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좋아하지 못한다면 무슨 빛줄기가 있을는지요.

 책읽기는 하나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책읽기를 한다 할 때에는 내 손으로 쥔 책에서 얻은 앎조각이 흩어진 부스러기로 남지 않게끔 알뜰히 그러모아 내 삶을 새로 다스리면서 남달리 거듭나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책읽기를 하면서 내 삶을 읽습니다. 내 삶을 읽으면서 내 삶을 북돋웁니다.

 옆지기나 아이나 동무 마음을 읽는다면, 마음읽기로 그칠 노릇이 아니라, 옆지기나 아이나 동무 마음을 읽으며 맞아들인 이야기를 내 마음밭에서 찬찬히 아로새기면서 다 함께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찾아 소매를 겉어붙이며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더 즐거이 살아가려고 읽는 책이고 마음입니다. 더 참다이 살아내려고 읽는 책이요 마음입니다. 더 어여삐 얼크러지자며 읽는 책이면서 마음이에요.


.. 진정한 지식을 얻으려면 맹목적인 시각에 사로잡히거나 딱딱하고 과장된 전문용어를 동원해 호된 신고식을 치르도록 하는 것을 더이상 지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지고하신 영혼의 사제들은 다름아니라 그러한 신고식을 통해 사고와 표현에 대한 배타적인 특권을 합법화하고 보호하려 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널리 팽배해 있는 오류들을 고발할 때조차 연구자들은 혼자만 아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바로 자신들이 파괴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신비화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  (49쪽)


 읽을 수 있기에 느낍니다. 읽을 수 있기에 좋아합니다. 읽을 수 있기에 고개를 숙이면서 배웁니다. 읽을 수 있어 고개를 숙이면서 배우기에, 오늘 내가 살아가는 하루를 신나게 누리면서 밝은 꿈누리에 젖어듭니다.

 새벽나절 도랑물에 언손 녹이며 오줌기저귀를 빨래하는 동안 생각합니다. 아침나절 다시금 도랑물에 언손 부비며 똥기저귀를 빨래하는 내내 헤아립니다. 시월을 갓 넘긴 멧골자락 도랑물이 이러하다면 십일월이나 십이월은 훨씬 차갑습니다. 나는 오늘 하루만 이렇게 도랑 찬물에 기저귀를 빨며 손이 시리지만, 먼 옛날 사람들은 기저귀 빨래를 어떻게 해야 했을까 떠올립니다. 전쟁이 일어나 여느 사람들 보금자리가 쑥대밭이 되었을 때에도 갓난쟁이들은 똥을 누고 오줌을 눌밖에 없는데, 한국전쟁 같은 때에 기저귀 빨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려 봅니다.

 전쟁통에는 기저귀로 쓸 천이나마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전쟁통에는 빨래할 물이나마 얻을 만했는가 궁금합니다. 전쟁통에는 애써 빨래한 기저귀를 어느 만큼 넉넉히 말릴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전쟁이 터져 괴로운 나라가 지구별에 있습니다. 이 괴로운 나라에서는 집과 마을을 잃고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이 퍽 많습니다. 이들은 난민수용소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 모입니다. 난민수용소를 돕는다고 할 때에는 으레 먹을거리와 옷가지를 갖다 주는데, 난민수용소에서 새로 태어나 자라는 갓난쟁이들은 기저귀를 어떻게 쓰는지 궁금합니다. 난민수용소에서는 한 번 쓰고 버리는 종이기저귀를 구호품으로 줄까요. 난민수용소 갓난쟁이들은 며칠에 한 번씩 몸을 씻을 수 있을까요.


.. 월트 디즈니를 그저 사업가로만 생각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우리는 모두 영화와 시계, 우산, 음반, 비누, 흔들의자, 넥타이, 전등 등 그의 캐릭터들을 이용한 대규모 상품 판촉에 익숙해져 있다 … 디즈니는 캐릭터들에게서 진짜 과거를 제거하는 동시에 현재 처한 곤경과 관련해 자성할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관점을 빼앗버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줄곧 그가 빠져 있던 세계와 다른 세계는 전혀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 동등한 인물들 사이의 연대는 금지되어 있는 까닭에 이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고는 경쟁뿐이다 … 디즈니는 어린이를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이기 위해서 동물을 이용한다 … 디즈니에 의하면 저개발 국가 국민들이란 어린애 같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다루어야 하고, 이러한 규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엉덩이를 까내려 흠씬 두들겨 주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말을 들을 테니까! ..  (53, 71, 80, 89. 107쪽)


 나는 대통령 후보 지지율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경제성장율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땅값이라든지 무슨무슨 운동경기나 문화예술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식시세표나 방송편성표가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아이들과 살붙이가 사랑스레 몸을 누여 살아갈 만한 보금자리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돌아보는 일이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집식구 웃음꽃과 이야기꽃이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추위가 천천히 찾아들면서 풀벌레 울음소리가 잦아드는 시골자락 서늘한 바람을 느끼는 나날이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아마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시월로 접어들어 뚝 끊긴 풀벌레 울음소리 이야기는 다루지 않겠지요. 구월까지 풀벌레가 얼마나 어여삐 노래를 베풀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다룰 마음이 없겠지요. 나뭇잎이 하나둘 지면서 멧자락과 들판에 가랑잎이 뒹구는 이야기는 다룰 사람이 없겠지요.

 신문을 펼치든 방송을 켜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시골자락 어느 시골 할매가 나락을 말릴 때에, 옆에서 함께 일하는 시골 할배하고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더라 하는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지 않습니다. 가을이 무르익는 때에 멧새는 어떤 먹이를 좋아하는가 하는 이야기는 방송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신문을 안 읽습니다. 신문을 못 믿습니다. 시골자락 할매 이야기와 멧골 멧새 이야기를 다루지 않거나 다룰 뜻이 없는 신문은 손사래칩니다. 연예인을 꿈꾸는 아이들이 목청 높이 부르는 노래는 나오지만, 풀벌레가 곱게 부르는 노래는 다루지 않는 방송은 보고 싶지 않으며, 집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아요.


.. 어린이들은 도널드 덕과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도널드의 처지가 아이들 자신의 삶과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도널드를 읽거나 접하게 되는 방식 자체가 바로 도널드 덕이 온갖 현안을 해결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모방하고 미리 보여주기 때문이다 … 이 세계에서는 나이가 더 많거나 더 부자라거나 혹은 더 아름답다는 단순한 사실이 권위를 부여한다. 그리고 운이 나쁜 캐릭터는 복종을 당연시한다 … 어느 쪽이든 모두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다. 즉 여자가 가진 유일한 힘은 전통적인 요부의 힘으로, 그녀는 교태라는 형태로 그것을 행사한다. 그리고 수동적이고 가정적인 본성을 벗어나는 어떠한 다른 역할도 허용되지 않는다 … 결국 디즈니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바로 겉모습이다 ..  (64, 75, 82, 196쪽)


 신문은 무슨 이야기를 담을 때에 신문이라 할 만할까요. 방송은 어떤 이야기를 다룰 때에 방송이라 할 만한가요. 신문이나 방송은 우리 삶과 사랑과 사람을 어느 만큼 차분히 짚으면서 살뜰히 보여주는가요.

 아리엘 도르프만 님과 아르망 마텔라르 님이 빚은 인문책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새물결,2003)를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미국은 ‘도널드 덕’을 앞세워 신문과 방송을 거머쥔다고 합니다. ‘도널드 덕’을 바라보는 사람들 생각과 마음을 어느 한쪽으로 몰아세운다고 합니다. 길들이는 언론이요, 길들여지면서 눈이 머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도널드 덕’ 한 가지만 이야기하는데, ‘도널드 덕’뿐 아니라 ‘미키마우스’이든 ‘뽀로로’이든 ‘케로로’이든 이와 마찬가지예요. 모두들 사람들 눈과 마음과 생각과 몸을 길들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몰아세웁니다.


.. 유행의 첨단을 걷는 칠레의 부르주아 계급이 극도로 세련된 모델들에게 미니스커트와 맥시스커트, 핫팬츠를 입히고 번들거리는 부츠를 신겨서는 가난한 농촌 지역의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는 풍경’, 아니면 전원적인 풍경 속의 알라칼루페 인디오 부족 사이에 세워놓고 잡지 사진을 찍듯이, 미국에서 제작된 만화들은 도시 문명에 의해 파괴된 사회 조직 형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강박관념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디즈니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정복을 정당화함으로써 끊임없이 자기를 정화하는 정복자이다. 하지만 대도시의 이해를 대변하는 한편, 그러한 만큼 이 도시의 생산력 발전에 내재하는 여러 모순의 산물이기도 한 지배계급의 문화적 상부 구조가 어떻게 저개발 국가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그와 같은 인기를 획득하는 것일까? 도대체 디즈니가 왜 그토록 위협적일까? ..  (232쪽)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아갈 때에는 신문이나 방송은 부질없습니다. 애써 신문을 펼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텔레비전을 켜지 않아도 됩니다. 따사로이 사랑하며 어깨동무하는 사람들 고운 이야기가 흙땅과 흙집에서 솔솔 피어납니다.

 흙을 밀거나 짓밟으며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은 도시에서는 신문이나 방송을 안 살필 수 없습니다. 흙이 없어 먹을거리를 거두지 못합니다. 흙이 없기에 돈을 얻어 돈으로 먹을거리를 장만해야 합니다. 돈에 따라 움직이고 돈에 따라 생각하며 돈에 따라 살아갑니다.

 시골에서도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깔리면, 시골자락 사람들도 신문을 펼치거나 방송을 켜기 마련입니다. 시멘트는 신문을 부르고, 아스팔트는 텔레비전을 찾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텃밭을 일굴 줄 안다면, 따로 신문이나 방송하고 사귀지 않습니다. 텃밭 흙을 사귀고 텃밭 푸성귀를 사랑할 테니까요.

 나는 흙과 바람과 물과 햇볕과 풀과 나무와 새와 벌레와 짐승을 사랑하는 조그마한 목숨붙이인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4344.10.5.물.ㅎㄲㅅㄱ)


―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아리엘 도르프만·아르망 마텔라르 씀,김성오 옮김,새물결 펴냄,2003.6.20./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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