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힘들며 어지러워
엿새를 새 보금자리 찾으러 돌아다닌 탓인지, 토요일에 드디어 시골집으로 돌아온 뒤부터 몸이 아프고 힘들며 어지럽다. 아프고 힘들며 어지러우니 집일을 하지 못한다. 밥하고 빨래하며 쓸고닦는 집일을 옆지기가 한다. 옆지기라고 몸이 썩 좋지는 않을 텐데, 이 시골자락 작은 집에서 숲이 내뿜는 기운을 고이 받아들이면서 천천히 여러 일을 맞아들이지 않나 싶다. 그저 눕거나, 일어나서 움직이더라도 천천히 하느작거린다. 몸무게가 조금 줄어 66킬로그램을 살짝 넘을락 말락 한다. 좀 말랐다고 하던 고등학생 때에 65킬로그램이었는데, 몸이 가벼워진다는 느낌이 아니라 힘이 없다는 느낌일 뿐이다. 첫째를 낳아 백일을 치르며 잠을 거의 못 자던 때에 67킬로그램이었다. 이런 아프고 힘들며 어지러운 몸으로 멀거니 하루를 보낸다. 옆지기가 밥을 차려도 거들지 못한다. 설거지를 하기도 만만하지 않다. 기저귀 빨래랑 수건 빨래 몇 점을 해 보는데, 그럭저럭 할 만하지만 도맡아서 할 기운까지는 안 되리라 느낀다. 저녁을 먹고 나서 곧바로 자리에 드러눕는다. 일곱 시간을 내리 뻗었다가 빗소리가 여러 시간 그치지 않아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방에 불을 넣는다. 창문은 옆지기가 일찌감치 닫았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며 어지럽더라도 한두 줄을 끄적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여겨 셈틀을 켜지만, 골이 지끈거려 글을 쓰지 못한다. 그래도 버티고 앉는다. 새로 내려는 책 하나에 담을 글을 추스른다. 한창 하다가 더 일하면 머리가 빠개질는지 모른다 싶어 그치기로 한다. 둘째가 태어나기 앞서부터 막 태어나서 두 달을 넘기기까지 이럭저럭 용케 홀로 집일을 도맡으며 살아냈는데, 하루를 곁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리에 서다 보니, 집일을 도맡을 때보다 집일을 못하면서 골골거릴 때가 훨씬 고단하면서 괴롭구나 하고 느낀다. 늘 그렇겠지. 더 튼튼한 사람은 더 일을 하더라도 금세 기운을 되찾기 마련이지만, 더 여리거나 아픈 사람은 일을 덜 하거나 안 하더라도 기운을 좀처럼 되찾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튼튼한 사람이건 여리거나 아픈 사람이건 밥 한 그릇씩 먹어야 한다. 때로는 여리거나 아픈 사람이 밥을 반 그릇이나 한 그릇 더 먹어야 한다. 여리거나 아파 튼튼한 사람만큼 일몫을 못한다면 일삯을 적게 받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나라인 이 나라를 헤아려 본다. 참으로 아프고 힘들며 어지럽다 보니까, 성경에 나오는 말마디가 새록새록 아로새겨진다. 일을 더 많이 했대서 일삯을 더 줄 수 없다는 말마디. 일을 더 할 수 없으면서 딸린 식구가 있는 사람한테 외려 더 일삯을 준다는 말마디. 나는 내 아픈 옆지기한테 이제껏 얼마나 사랑을 나누었고, 내 작은 아이들한테 어느 만큼 사랑을 쏟았을까. (4344.8.8.달.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