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밥을 다 먹고 나서 몇 가지 그릇과 접시와 수저에 비누를 묻혀 물에 부시는 일은 설거지가 아니다. 고작 몇 가지 그릇과 접시와 수저에 비누를 발라 헹구고서는 집일을 제법 도왔다고 여길 수 없다. 밥을 다 먹고 나서 하는 그릇씻기는 밥을 하는 동안 하는 설거지하고 댈 수 없을 만큼 얼마 안 된다.

 밥물을 안치고 미역국을 끓이며 반찬을 마련하는 동안 책 한 줄이라도 읽자고 다짐하기를 몇 해이지만, 이제 이러한 다짐은 거의 떠올리지조차 못한다. 밥물을 안치기 앞서 미역을 끊어서 불려야 하고, 쌀을 씻어서 불린 다음 국거리와 반찬거리로 쓸 푸성귀와 여러 먹을거리를 손질한다. 무를 씻고 감자를 씻으며 당근을 씻는다. 감자를 썰고 무를 썰며 당근을 써는 사이사이 칼을 닦고 도마를 씻는다. 양파를 까서 썰 때에도 칼을 닦고 도마를 씻는다. 마늘을 절구로 찧었으면 절구와 절구공이를 씻어서 말린다. 불 셋을 쓰면서 밥과 국과 반찬을 하니까, 반찬을 두 가지 하려면, 반찬 한 가지를 끝내고 얼른 냄비 하나를 씻어서 다시 써야 한다. 다 불린 미역은 세 차례 물로 헹군다. 미역을 다른 그릇에 불렸으면 다른 그릇을 설거지하고, 체로 미역을 받으며 헹군다면 체도 설거지한다. 으레 기름 안 쓰고 물로 스텐냄비에 볶지만, 드물게 기름을 써서 볶았으면 기름기를 닦아내어 새 반찬을 하느라 손이 더 간다. 도마질을 하는 개수대가 정갈하도록 행주로 수없이 개수대 물기를 훔치고 물을 짜면서 다시 빨기를 되풀이한다. 밥이 거의 다 되면 쌀겨가루를 한두 숟가락 넣고 섞는다. 이무렵 국이 펄펄 끓으니 살짝 간을 보면서 소금을 더 넣을까 간장을 마무리로 넣을까 생각한다. 미역국에 조개나 새우살을 넣는다면, 얼린 조개나 새우살을 녹이며 헹구느라 손이 간다. 콩나물을 넣으면 콩나물을 큰 통에 담아 헹구느라 손이 갈 뿐더러 큰 통을 설거지해야 한다. 콩나물과 여러 푸성귀를 씻거나 헹구며 부스러기가 떨어지니, 개수대 찌꺼기받이를 들어내어 비우고 닦는다. 개수대 바닥과 옆을 쇠수세미로 닦는다. 밥에 쌀겨가루를 골고루 섞었으면 뚜껑을 덮고 몇 분쯤 기다렸다가 불을 끄고, 밥상을 닦는다. 반찬그릇을 꺼내고 마무리지은 반찬을 접시에 담는다. 반찬을 하느라 쓴 냄비와 주걱과 숟가락과 접시를 설거지한다. 국이 다 되면 불을 끄고 간장을 살짝 넣거나 말린명태껍데기를 잘라서 넣는다. 말린명태껍데기를 가위로 잘랐으면 가위를 설거지한다. 오이와 오이지를 알맞게 썰어 접시에 담는다. 칼을 다시 닦고 도마를 다시 씻는다. 두부를 데쳤으면 국자로 떠서 접시에 담아 칼로 작게 썬다. 도마에 얹어 자르고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하면 도마를 또 씻어야 해서 그냥 접시에 담아 칼로 자른다. 두부 데친 냄비를 얼른 설거지하고 칼을 다시 닦는다. 이제 칼 쓸 일이 더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반찬 담은 접시와 밥그릇과 수저를 밥상으로 나른다. 첫째 아이가 얌전하거나 상냥한 날에는 수저를 알뜰히 제자리에 놓아 주고 반찬뚜껑도 열어 준다. 첫째 아이가 말똥쟁이 노릇을 하는 날은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해내야 한다. 더욱이, 아이가 혼자 손을 뻗어 저 먹고픈 대로 먹으면 골이 아프다. 국을 국그릇에 하나하나 뜬다. 더운 여름날은 국이 쉬기 때문에 끼니마다 새로 끓이려고 애쓴다. 다 비운 국냄비와 국자를 설거지한다. 밥냄비를 밥상으로 옮기면서 아이 몫과 어머니 몫을 푼다. 아이한테 어머니도 먹자고 불러야지 하고 이야기하면서 잘 먹겠습니다 하는 말을 먼저 하면 아이도 따라서 말한다. 자리에 앉을 겨를 없이 다시 부엌으로 가서 흐트러진 부엌을 갈무리한다. 밥을 하며 쓴 연장은 모두 설거지를 하고, 행주로 개수대와 가스렌지를 닦는다. 마무리로 행주를 빨고, 행주를 빨며 개수대에 튄 물을 다시 닦고 행주를 꾹 짜서 펼쳐 넌 다음 손을 씻는다. 어제 먹고 남은 반찬을 유리그릇이나 스텐그릇에 담았다가 밥자리에서 새 접시에 담았으면, 유리그릇이나 스텐그릇을 마저 설거지한다.

 이렇게 밥을 차리며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밥을 먹고 나서 해야 할 설거지가 멧더미처럼 쌓인다. 집에서 설거지를 거들겠다는 사내들이라면 밥을 다 먹은 다음 하는 설거지가 아니라, 밥을 차리면서 설거지를 해야 옳다. 밥하는 사람 옆에 붙어서 밥하는 사람이 쓴 부엌 연장을 그때그때 잽싸게 설거지해서 말리거나 물기를 닦아서 건네야 맞다. 내가 쓴 밥그릇과 수저를 설거지했대서 설거지를 도왔거나 집일을 거들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이는 ‘설거지 돕기’나 ‘집일 거들기’가 아니라, 밥을 차리며 설거지를 한 집일꾼한테 지키는 아주 조그마한 ‘인사치레(예의)’일 뿐이다. (4344.7.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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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14 16:13   좋아요 0 | URL
매일 하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된장님께서 문장으로 풀어놓으신 것을 보니, 우리는 매일 엄청난 일을 하고 있군요! ^^

인사치례는 커녕
밥 차리면 재까닥 오기라도 하는 예의가 없는 사람도 저희 집에 있습니다. ㅎㅎ

숲노래 2011-07-14 17:14   좋아요 0 | URL
ㅋㅋ
그렇지요.
밥상에 차릴 때까지 밥상 앞에서 얌전히 앉아서 기다릴 줄 안다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첫째 아이도
둘째 아이도
부디 집일을 잘 거드는 아이로 자랄 수 있기를
날마다 빌어 마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