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62 : 알고 싶어 읽는 책


 내가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읽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가 다 아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책으로 읽을 수 있고, 다 알면서 재미가 있다고 느껴 책으로 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다 아는데 애써 책으로까지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다 아는 뻔한 이야기를 영화로 본다든지, 학교에서 강의나 수업을 들을 까닭이란 없어요. 내가 모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힘껏 책으로 읽습니다. 내가 배워야 할 이야기라서 학교를 찾아가 강의나 수업을 듣습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고개숙여 차근차근 새겨듣습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고맙게 받아먹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과 글로 조그맣게 이루어진 《숲으로》(진선출판사,200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이 밟은 숲을 밟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은 여느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깊디깊다 할 만한 숲속을 헤맸고 들판을 누볐습니다. “나는 흙 위에 남겨진 커다란 발자국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숲 속으로 이어진 희미한 길은 곰이 다니는 길이었습니다(13쪽).”는 말처럼, 사람길이 아닌 곰길을 걷거나 다람쥐길을 걷습니다. 연어길에 함께 서거나 사슴길에서 다리를 쉬며 하룻밤을 묵습니다. 사진책 《숲으로》는 여느 사람들 여느 눈썰미와 여느 삶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그러나, 《숲으로》는 아주 남다르거나 아주 새로운 이야기이지는 않습니다. 이제 사람 발길이 안 닿는 곳이 되었을 뿐,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터에서 다 다른 사랑을 나누면서 다 다른 삶을 일구던 곳 이야기를 밝힙니다. 더 좋은 삶이나 더 나은 삶이 아니라,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흐르는 땅과 사랑과 삶을 바라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니다. 더 큰 도시로 찾아듭니다. 도시로 몰려들어 물질문명을 마음껏 누립니다. 작은 도시에서 살거나 시골에서 지내더라도 물질문명을 똑같이 즐깁니다. 입으로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뿐 아니라 한국땅 원자력발전소를 근심하지만, 막상 몸으로는 전기를 안 쓰거나 덜 쓸 뿐 아니라, 전기를 써서 만드는 수많은 물질문명을 안 쓰거나 덜 쓰는 길을 살피지 않아요.

 숲이 숲다웁도록 하는 이야기를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답도록 하는 슬기를 깨닫지 않습니다. 삶이 삶답도록 하는 깜냥을 빛내지 않습니다. 사랑이 사랑답도록 하는 땀방울을 흘리지 않습니다.

 이즈막에 새로 나온 《원전을 멈춰라》(이음,2011)는 벌써 스물한 해 앞서 《위험한 이야기》(푸른산,1990)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스물한 해 앞서 이 나라 사람은 “위험한 이야기”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이라서 더 잘 느끼지 않습니다. 지난날보다 책으로 조금 더 읽을 뿐입니다. 위험한 이야기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고 싶어 읽는다기보다 원자력발전소가 뻥 하고 터지니까 읽습니다.

 무언가를 알려고 한다면 무언가를 머리에 앎조각으로 담겠다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알아차리면서 내 삶을 새롭게 일구겠다는 뜻이어야 비로소 알려고 애쓴 일이요, 배움이며 가르침입니다. 이 나라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알도록(살도록)’ 할 이야기를 먼저 스스로 ‘알려고(살려고)’ 애쓰는 교사가 몹시 드뭅니다. (4344.6.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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