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와 글쓰기


 새벽 다섯 시 십이 분에 일어나서 마당으로 나옵니다. 하얗게 동이 튼 하늘을 올려다보며 푸른 잎사귀 나부끼는 숲을 바라봅니다. 깊은 시골이건 얕은 시골이건, 아침에 일어나거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에는 푸른 빛깔을 맞아들입니다.

 텃밭 가장자리에 쉬를 누고 들어가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텃밭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날마다 무당벌레를 잡고 또 잡아도 새 무당벌레가 잔뜩 보입니다. 토마토 잎이나 줄기에 붙어 갉아먹는 녀석, 감자 잎이나 줄기에 붙어 뜯어먹는 녀석을 톡톡 쳐서 흙바닥에 떨군 다음 작은 돌로 뭉갭니다. 우리 살림집 텃밭은 참 조그맣고, 조그마한 텃밭 푸성귀는 몇 가지 안 됩니다. 널따란 밭을 일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이 벌레란 얼마나 무시무시하거나 끔찍할까요.

 영화 〈로빙화〉를 보면 차밭 벌레를 잡으며 애먹는 흙일꾼이 어렵사리 풀약을 얻어 차밭에 좌아악 뿌릴 때에 시원하게 활짝 웃습니다. 흙일꾼뿐 아니라 고아명과 고차매 남내도 활짝 웃습니다. 돈이 없어 여태껏 손으로 벌레를 하나하나 잡아서 죽였는데, 이제 벌레 걱정에서 조금은 시름을 덜었거든요. 새로 온 곽운천 선생님이 아이들을 이끌고 차벌레 잡이를 거들기도 했으나, 이렇게 몇 차례 거든대서 잡아 없앨 수 있는 차벌레는 아닙니다. 잡으면 또 있고, 다 잡았다 싶으면 또 기어오르는 차벌레입니다. 풀약 안 쓰는 깨끗한 농사를 이루기란 가난하고 힘겨우며 일손 모자란 집에서는 아득한 꿈입니다.

 흔히들, 풀 먹는 일, 이른바 ‘채식’이란 ‘몸뚱이 큰 목숨을 먹지 않으려 하’면서 ‘목숨을 더 사랑하는 일’이라 여깁니다만, 풀을 먹는대서 목숨을 안 먹는 일이 아닙니다. 고기를 먹어도 목숨을 먹는 일이고, 풀을 먹어도 목숨을 먹는 일입니다. 고기가 되는 짐승을 잡을 때에 고기짐승이 끔찍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든지, 눈물을 흘리는 눈망울을 바라보아야 한다든지,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내며 살을 발라야 한다든지, 이러한 모습이 보기 나쁘다 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푸성귀를 길러 먹을 때에도 풀을 다듬습니다. 풀을 다듬고 씻어서 손질합니다. 목숨이 깃들지 않은 풀은 메말라서 먹을 수 없습니다. 풀이든 고기이든 모두 목숨이요, 모두 다른 목숨이 내 몸으로 스며들며 내 목숨이 어이지는 흐름입니다.

 더욱이, 사람 몸을 더 아끼거나 살린다 하는 유기농이나 무농약이나 저농약이 될 때에는 수많은 벌레를 잡아서 죽어야 합니다. 온갖 목숨을 죽이고 나서야 바야흐로 풀먹기를 할 수 있습니다. 시금치 한 묶음, 감자 한 알, 오이 하나, 배추 한 뿌리를 먹기까지 얼마나 많은 벌레를 죽여야 하는지 헤아리지 못한다면, ‘목숨을 더 사랑하려는 뜻에서 한다는 풀먹기’가 어떠한 뜻이나 값이 되는가를 모르는 셈입니다.

 좋거나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대단하거나 놀랍다 싶은 줄거리를 다루는 글이라 해서 아름답지 않습니다. 지식을 보여주거나 밝히는 글은 부질없습니다. 삶을 깨닫고 스스로 삶을 사랑하는 하루하루 즐길 수 있도록 어깨동무를 하는 글이 되어야 비로소 사랑스럽습니다.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랑을 빛내는 책 하나입니다.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랑을 빛내는 책을 살가이 이루는 글입니다. (4344.5.1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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