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투성이 사진을 찍으며 진흙투성이 죽음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4] 사와다 교이치(澤田敎一), 《泥まみれの死》(講談社,1985)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쓴 《보도사진가》(타임스페이스,1991)를 읽으면 사와다 교이치(澤田敎一) 님 이야기가 짤막짤막 나옵니다. 두 사람이 동갑내기라 했으니 사와다 교이치 님 또한 1936년에 태어난 셈인데, 사와다 교이치 님은 1970년 10월 28일에 베트남에서 숨을 거둡니다. 미국이 베트남으로 쳐들어가서 싸움이 터진 뒤로 일본 사진기자는 모두 열다섯 사람이 숨을 거두었다 했는데(미국 사진기자는 스물한 사람이 숨을 거두었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도 열다섯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각해 보면, 베트남전쟁 때에 죽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도 베트남전쟁 때에 베트남에 가서 사진을 찍었답니다. 사진을 왕창 찍고는 도쿄로 돌아와 사진잔치를 벌이며 “약간 자랑스러운 말투로 설명을 덧붙였다(《보도사진가》 178쪽)”고 했는데,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사진잔치 강연을 마치고 내려오며 사와다 교이치 님 얼굴을 보고는 “자신의 우쭐대던 태도가 부끄러워졌다”고 밝힙니다. 이때 사와다 교이치 님은 구와바라 시세이 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에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는데, 당신은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뒷날 펴낸 《보도사진가》라는 책을 볼 수 없었을 테니, 이이가 남우세스러워했는지 어떠했는지는 몰랐겠지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사와다 교이치 님은 베트남전쟁 때에 온몸을 던져 사진을 찍었고, 온몸을 던져 찍은 사진에는 숱한 상장이 돌아왔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은 숱한 상장을 받았으나 한결같이 베트남전쟁터로 뛰어들어 사진을 찍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지 않고서야 사와다 교이치 님 사진 또한 그칠 수 없었겠지요. 아니, 이 전쟁이 끝난다면, 전쟁 뒤끝 베트남 삶터와 사람과 삶자락을 살며시 사진으로 담았겠지요.
서른다섯이 될 무렵 더는 사진기 단추를 누를 수 없게 된 사와다 교이치 님은 당신 젊은 나날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일본사람으로서 미국군이 아닌 ‘해방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겠지요. 오늘날 미국이 이라크로 쳐들어갈 때에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어야지, 이라크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이라크군하고 함께 움직이며 사진을 찍는 기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아니 뼛가루 하나 남기지 못하는 채 언제 죽었는 지조차 모르며 죽고 말 테지요. 애써 찍은 사진은 하나도 빛을 못 볼 테지요.
베트남에서 싸움판이 끝난 지 꽤 긴 해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인 사진기자’ 사진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 해방군’하고 함께 움직인 사진기자 사진은 좀처럼 들여다보기 힘듭니다. 어쩌면 베트남 해방군은 숱한 사진기자를 거느리기 힘들었다 할 만한지 모르며, 이동안 베트남 해방군은 굳이 사진을 안 찍었는지 모르지요. 한국땅에서는 알기 힘들지만, 베트남에 가 보면 해방군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이룬 열매를 어느 만큼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르고요.
사진책 《泥まみれの死》(講談社,1985)를 펼칩니다. 《진흙투성이 죽음》 또는 《고달픈 죽음》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사진책은 사와다 교이치 님 옆지기인 ‘사와다 사타(澤田サタ)’ 님이 엮어서 내놓습니다. 당신 옆지기가 떠난 지 열다섯 해가 지난 어느 날 내놓은 《泥まみれの死》에는 미국군과 함께 움직이면서 미국군 테두리에서 느낀 베트남전쟁을 찬찬히 보여주기도 하지만, 미국군 테두리에서 바라본 베트남전쟁이라기보다는 ‘전쟁이란 무엇인가?’와 ‘전쟁터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가?’와 ‘전쟁터 군인은 어떠한 삶인가?’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잠을 자고 밥을 먹습니다.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총소리가 멎을 때에는 두 다리 뻗으며 쉬거나 노래를 부릅니다. 총에 맞아 다치면 아파서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립니다. 총알이 머리나 염통을 꿰뚫었으면 그만 고개를 픽 떨굽니다. 총알이 빗발치면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탱크 뒤이든 건물 뒤이든 바싹 달라붙으며 두려움이 덜덜 떱니다.
미국군과 함께 움직이면서 전쟁사진을 찍은 사와다 교이치 님이기 때문에 ‘미국군이 포로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며시 엿봅니다. ‘해방군을 도와주었다’는 빌미 때문에 애꿎게 죽은 사람들 모습을 일본 사진기자 눈길로 바라봅니다. 총에 맞아 죽어야 하는 가녀린 베트남사람, 미국군 주먹에 얻어맞는 슬픈 베트남사람을 일본 사진기자 눈매로 함께 들여다봅니다. 손바닥만 한 사진책 겉에는 장갑차 꽁무니에 밧줄을 이어 ‘해방군 한 사람 주검’을 질질 끄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박습니다.
베트남에 간 미국이라는 나라 군인은 누구를 왜 어떻게 죽여야 했을까요. 평화를 지키는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될까요. 자유를 찾는 일이 사람을 괴롭히거나 주검을 갖고 노는 일이 될까요.
일찌감치 숨을 거둔 사와다 교이치 님은 더 말할 수 없지만 더 사진을 찍을 수도 없습니다. 죽은 이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이 곁에 있었거나 죽은 이를 살짝 스쳤던 사람들이나 죽은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이 ‘새로운 말’을 남길 뿐입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은 죽고 나서 ‘로버트 카파 상’을 받았다는데, 이 상이란, 이 이름이란, 이 훈장이란, 참 덧없구나 싶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이 로버트 카파 님보다 일찍 태어나 일찍 죽었으면 ‘사와다 교이치 상’이 생겨서, 로버트 카파 님이 ‘사와다 교이치 상’을 받는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요.
사진기자 사와다 교이치 님은 진흙투성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괴로우며 고달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을 비롯해 수많은 베트남사람과 숱한 미국사람이 베트남 들판과 숲과 도심지에서 진흙투성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너나없이 괴로우며 고달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전쟁은 누가 왜 일으켰을까요. 전쟁이 일어난 동안 누가 돈을 벌었을까요. 전쟁터에 찾아간 군인은 왜 월급을 받아야 할까요. 사람을 죽이는 짓을 하는데에도 돈을 벌 수 있다니 이 무슨 평화요 자유요 민주라 할 만한가요. 미국은 군수산업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며 오늘날에는 또 얼마나 돈벌이를 하는가요. 미국이 벌인 싸움터에 종군기자로 뛰어든 사람들이 찍은 사진은 우리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가요. 전쟁사진이란, 전쟁터를 보여주는 사진이란, 보도사진이란, 보도사진가란, 목숨을 바치며 총알받이가 되어 숨을 거둔 사진기자가 남긴 사진이란, 오늘날 한국땅 여느 도시내기들한테 무슨 이야기로 아로새겨질 수 있을까요. (4344.4.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