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하나씩 살피며 산다


 한국땅 어버이들은 언제부터 어린이책을 전집으로 왜 사는가 궁금합니다. 한국땅 출판사들은 언제부터 어린이책을 전집으로 만들어 버릇하며 파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나라만 전집책이 이토록 많은지 궁금합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전집’이라는 이름이라든지 ‘전집’과 같은 책꼴은 이웃한 일본에서 태어났겠지요. 일본에서 일본 어린이한테 읽히려고 만든 전집을 몰래 베끼거나 훔쳐서 한국 어린이한테 팔던 흐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는지 모릅니다.

 ‘세계명작’이라든지 ‘세계문학전집(또는 세계문학선집)’이라든지 ‘어린이명작동화’ 같은 이름은 죄다 일본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저학년문고’나 ‘고학년문고’라는 이름 또한 일본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사람은 어린이책을 전집으로 얼렁뚱땅 묶어 얼렁뚱땅 팔아치우지는 않습니다. 일본에도 퍽 덜 떨어진 전집책이 있을 테지만, 한국에서 옮긴 일본 전집책은 매우 훌륭합니다. 오랫동안 많은 돈과 많은 품을 들여 찬찬히 일군 아름다운 일본 전집책이기 일쑤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본 전집책을 요리조리 가위질하거나 베껴서 수십 해 동안 팔아먹었습니다.

 요즈음은 도둑질을 섣불리 할 수 없기 때문에 저작권 계약을 해서 일본 전집을 번역해서 내곤 합니다. 드문드문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 전집책을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느 전집책이든, 나라밖에서는 ‘이 전집책만 보면 다른 책은 애써 안 보아도 된다’고 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에서 만드는 전집책’이란, ‘낱권 하나만 보아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깊이 살필 수 없다’고 느껴서 만드는 책입니다. 과학동화이든 수학그림책이든, 낱권 하나가 아니라 열 권이나 스무 권이나 서른 권이나 마흔 권으로 잘게 나누어 묶으면서, 아이들이 차근차근 실타래와 고리를 잇는 동안 시나브로 과학이나 수학 밑바탕을 깨닫거나 들여다보도록 이끌려고 합니다.

 곧, ‘나라밖 전집책’은 ‘낱권책이 하나하나 모여 열 권이나 서른 권이나 쉰 권으로 이루어진 책뭉치’라 할 수 있어요. 아주 두툼하다 싶도록 커다란 ‘낱권책 하나’라 할 만합니다.

 좋은 전집책이든 좋은 낱권책이든, 이러한 책을 내놓은 출판사 이름으로 책을 살피거나 살 수는 없습니다. 퍽 드물지만, 아주 훌륭한 책길을 꿋꿋하고 씩씩하게 걷는 곳이 있습니다만, 모든 출판사가 모든 책을 알알이 여민다고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내 아이이든 이웃집 아이이든 모든 책을 똑같이 좋아하거나 즐기지는 않아요. 더 좋아하는 책이 있고, 덜 좋아하는 책이 있습니다. 한 출판사를 아주 단단히 믿더라도, 한 출판사 책에 매이지 말고, 아이 눈길이 닿으며 사랑스러운 마음밥을 얻을 책을 골라야 합니다.

 이렇게 책을 고르자면, 아이한테 좋을 책을 살핀다는 생각보다는, 먼저 어른인 나부터 내가 어린이라면 어떠한 책을 즐겁게 100번이나 1000번쯤 되읽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른인 내 눈썰미로 살피는 책이 아니라, 어른인 내가 어린이라고 여기면서 나 스스로 이 책을 몇 번이나 되읽을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장만할 만한 좋은 어린이책은 책방(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에 선 채로 다 읽고 나서 장만할 만한 책이어야 합니다. 책방에 선 채로 다 읽었으니 안 사도 된다 여기면, 이러한 책은 굳이 살 까닭이 없습니다. 책방에 선 채로 다 읽었기에 사야겠다고 느낄 만한 책을 사야 합니다.

 어른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책도 열 번 스무 번 되읽을 만하다 싶은 책을 찾아서 장만해야 아름답습니다. 되읽을 값어치가 없다고 느끼면, 나로서는 그닥 아름다울 책이 못 됩니다. 되읽을 값어치가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우리 집에 오래도록 꽂아 둘 책으로 무엇이 좋을까 하고 곱씹어야 합니다.

 어떠한 책이든 ‘출판사나 이름값이나 베스트셀러이냐 아니냐’를 살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책이든 ‘우리 집 책시렁에 열 해나 스무 해나 서른 해쯤 넉넉히 꽂힐’ 책이라고 생각하며 살펴야 합니다. 우리 집을 자주 옮긴다고 한다면, 이삿짐을 싸고 묶고 하면서 하나도 짐덩어리로 느끼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다고 바라보는 책을 장만해야 합니다.

 아이도 어버이도 ‘아주 좋은 전집책이나 낱권책’이 아니라, ‘참으로 아름답고 좋구나 하고 느낄 책’ 하나를 마주하려는 마음이어야지 싶습니다. 좋은 책을 하나하나 찾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넉넉하리라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냄비 하나 아무렇게나 장만하지 않습니다. 냄비 하나를 한두 해만 쓰고 버리겠습니까. 열 해뿐 아니라 스무 해나 서른 해를 즐겁게 쓸 좋은 냄비를 장만해야지요. 자전거 한 대를 서너 해쯤 타다가 내다 버릴 자전거로 장만하겠습니까. 자전거 한 대는 내 아이가 즐겁게 탔다가 동생이나 이웃한테 예쁘게 물려줄 만큼 튼튼하고 좋은 녀석으로 장만해야지요. 책상도 밥상도 걸상도 매한가지예요. 두고두고 쓸 물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책꽂이 또한 쉰 해나 백 해를 버틸 튼튼하며 좋은 책꽂이로 갖추어야 합니다.

 나는 내 아이를 한두 해만 사랑하고 떠나보낼 마음이 아닙니다. 나는 내 아이를 예순 해 여든 해 고이 지켜보면서 늙고 싶습니다. 예순 해 여든 해를 고이 지켜보다가 아이보다 일찍 눈을 감고 싶기에, 내 아이가 마주할 책 하나란 오래오래 아이 마음밭에서 싱그러이 꽃을 피우는 어여쁜 책이 될 수 있게끔 찬찬히 살펴서 고릅니다. (4344.4.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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