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너 살 아이와 영어 그림책 읽기
오늘날 숱한 두서너 살 아이들이 일찍부터 영어 그림책을 읽으며 영어를 배운다는 이야기를 얼핏설핏 들으면서 우리 집 아이를 가만히 떠올려 본다.
우리 집 아이는 돌이 되기 앞서부터 영어 그림책을 보았다. 영어로 된 그림책뿐 아니라 일본말로 된 그림책을 보았다. 일본말로 된 그림책에다가 독일말이나 프랑스말로 된 그림책을 함께 보았다. 때로는 러시아말이나 스페인말로 된 그림책을 나란히 보았다.
아이가 어릴 적부터 글을 깨우치도록 무언가 가르칠 생각에서 여러 가지 그림책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아직 우리 말로 옮겨지지 못한 좋은 나라밖 그림책이라면 헌책방에서 마주할 때에 즐겁게 장만해서 보여주었다.
때로는 한국에 옮겨진 그림책을 굳이 나라밖 책으로 보여주곤 한다. 한국말로 옮겨진 그림책은 빛느낌이 너무 안 좋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바빠빠》를 들 수 있다. 한국에는 1994년에 처음으로 옮겨졌고, 우리 집에는 2007년 29쇄가 있다. 그런데 한국판 《바바빠빠》는 빛느낌이 끔찍하도록 엉터리이다. 우리 집에는 일본에서 나온 《ベ-ベペペ》도 있는데, 일본판은 1972년에 처음 나왔고 2003년에 자그마치 203쇄를 찍는데, 바바빠빠 빛느낌이 잘 살았다. 한국판 바바빠빠는 시뻘건 빛깔인데, 바바빠빠는 빨갱이가 아니다. 분홍이이다. 그런데 내가 가진 책만 빨강이일는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쇄를 거듭할 때마다 바바빠빠 빛깔이 바뀌는지 모른다. 어느 때에는 붉음이인 바바빠빠요 어느 때에는 짙은 분홍이인 바바빠빠인 듯하다. 어쩜 이렇게 책마다 바바빠빠 빛깔이 달라질 수 있을까.
나는 한국 그림책을 그닥 믿지 못한다. 2007년에 옮겨진 《짝꿍 바꿔 주세요》는 일본에서 1991년에 나왔던 책을 옮겼는데, 우리 집에는 일본판을 퍽 일찍부터 헌책방에서 만나서 즐겁게 보다가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아이한테 자주 읽어 주곤 한다. 그렇다고 내가 일본말을 잘 하기에 일본말을 번역하며 읽어 주지는 못한다. 그림을 보면서 이 대목에서는 무슨 이야기일까 헤아리면서 읽어 주었다.
한국판 《짝꿍 바꿔 주세요》 또한 한국판 《바바빠빠》와 매한가지로 빛느낌이 썩 나쁘다. 일본 그림책 빛느낌은 매우 보드라우면서 밝다. 한국 그림책 빛느낌은 퍽 어두우면서 거칠다. 왜 이렇게 될까. 왜 이토록 달라질까.
예전에 어린이책 출판사에서 일하며 이태수 님 그림책을 일본말로 옮겨서 내던 일을 떠올려 본다. 나는 영업부 직원이니 편집일에 끼어들거나 어찌저찌 하지 않는다. 책이 나오면 신나게 책방마실 하면서 책팔이를 할 뿐이다. 일본에서 내놓은 《우리 순이 어디 가니》와 《심심해서 그랬어》를 보는데, 한국에서 나온 그림책보다 빛느낌이 훨씬 보드라우면서 해맑았을 뿐 아니라, 구석구석 더욱 또렷했다. 《심심해서 그랬어》는 주인공 모습이 책 가운데에 씹히지 않도록 0.5센티미터를 옆으로 살짝 옮겨 놓기까지 했다. 제본 또한 일본책이 훨씬 훌륭했고.
나는 우리 아이한테 나라밖 그림책을 애써 읽힐 마음이 없다. 우리 아이가 어린 나이부터 영어 그림책을 읽으며 영어를 배우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를 생각한다. 우리 아이는 그림책다운 그림책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아이는 책다운 책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좋은 책이 좋은 제본과 땀방울에 따라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 스스로 나중에 영어를 배우고 싶으면 언제라도 배우라지. 우리 집에는 수많은 한국말사전과 영어사전과 영어책이 골고루 있으니까. 아버지로서 아이한테 따로 영어를 가르칠 마음이 없다. 영어이든 뭐든 스스로 배우고 싶다고 느껴 스스로 찾아나서야 배울 수 있다. (4344.4.15.쇠.ㅎㄲㅅ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