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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 - 나도 작가 2
이현희 지음 / 나라말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요즈음 도시내기 푸름이 삶이란
[푸른 책과 함께살기 72] 이현희,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나라말,2008)
- 책이름 :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
- 글 : 이현희
- 펴낸곳 : 나라말 (2008.11.28.)
- 책값 : 8000원
요즈음 사람들은 너나없이 도시에 모여서 살아갑니다. 시골마을 작은 집에 모여서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은 무척 적습니다. 어린이와 푸름이일 때에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더라도, 스무 살이 넘으면 으레 시골마을을 벗어나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일자리를 알아보곤 합니다. 스무 살 싱그러운 나이부터 싱그러운 흙을 맨발로 디디며 푸른 들판처럼 푸른 마음이 되는 젊은이는 아주 드뭅니다.
초등학교이건 중학교이건 고등학교이건, 아이들한테 시험공부를 가르치지 ‘홀로 우뚝 서며 제 살림을 일굴 한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 학교라 하더라도 요즈음에는 ‘일제고사’라는 이름으로 성적 매기기에 휩쓸릴 뿐, 막상 시골마을 아이들이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좋을까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시골마을 아이들한테 시골사람이 되도록 가르치지 못하기만 하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시골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부터 시골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시골 어린이를 가르친다지만, 집만 시골일 뿐, 따지고 보면 읍이나 면에 있는 아파트에서 지내며 학교를 오가는 공무원 노릇만 하는 교사는 아닌가 궁금합니다. 도시에서와 똑같이 시골에서 살면서, 도시에서와 똑같이 시골 어린이를 가르치려 하지 않느냐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교사라면 으레 도시내음 묻어나는 이야기로 도시내기로 살아갈 길을 가르치겠지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교사라면 마땅히 시골내음 묻어나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골내기로 살아갈 길을 가르쳐야 할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도시에서는 도시에서대로, 시골에서는 시골에서대로 어린이와 푸름이 하나하나를 참사람으로 마주하기 힘듭니다. 똑같은 학교옷에 가두고, 똑같은 머리길이와 똑같은 지식과 똑같은 매무새와 똑같은 말씨가 되도록 꽁꽁 얽어맵니다.
저마다 다른 어린이와 푸름이가 저마다 다른 꿈과 뜻을 품으면서 살아가도록 돕지 못하는 학교입니다. 아이들이 대학교에 가야 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아이는 국문학을 하고 싶을 테고, 어떤 아이는 기계공학을 하고 싶을 테며, 어떤 아이는 사진학을 하고 싶겠지요. 그런데 국문학을 하고 싶은 아이나 기계공학을 하고 싶은 아이나 사진학을 하고 싶은 아이나 똑같은 시험문제에 똑같은 교과서에 똑같은 지식에 휘둘려야 합니다. 일찌감치 좋은 짝을 만나 사랑스러운 아이를 쑥쑥 낳아 예쁘게 키우고픈 꿈을 키울 수 있는데, 집안 살림꾼이 되겠다는 어린이나 푸름이를 ‘그렇구나, 참 좋은 꿈이구나.’ 하고 말하며 북돋울 교사는 몇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 나는 밥을 지을 줄 모른다. 쌀과 물을 얼마만큼 넣고 몇 분 간 끓여야 하는지, 약한 불, 중불, 센 불 중 어느 불에 밥을 지어야 하는지 모른다. 나는 밤에 혼자 자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언니와 같은 침실을 쓰며, 언니가 수련회에 가기라도 하면 엄마 옆에서 자곤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덜 자랐다. 혼자서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언제까지나 열 살 어린애로 남을 수는 없는데……. 엄마는 아직도 밤에 내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마음을 놓고 주무신다. 나만 남겨 두고 외출하실 때면 가스 밸브를 잠그고 나가신다. 가끔 어린아이 취급을 그만해 달라고 말씀드리면 엄마는 웃어넘기거나 서운해 하신다. 엄마, 나도 어른이 되기 싫어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요. 엄마의 작은 딸은 이번 여름에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고, 사랑니를 발견했어요 … 하지만 고등학생에게는 성적표 한 장이 전부일 때가 많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 나는 또다시 찔끔거린다. 점점 ‘기계’가 되어 가는 언니가 안쓰러워서, 그런 언니를 닮아 가는 내가 싫어져서 .. (16∼17, 38, 101쪽)
청소년이 쓴 청소년소설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나라말,2008)를 읽습니다. 이 청소년소설을 쓴 푸름이는 이제 푸름이가 아닌 대학생입니다. 푸름이 나이에 소설을 쓸 수 있다니 대단하구나 싶습니다. 앞뒤로 꽉 막힌 대한민국 학교 틀거리에서 소설쓰기에 마음을 쏟을 수 있으니 놀랍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대단하거나 놀랍다는 대목 말고는 소설로 읽을 삶과 눈길과 사랑과 사람내음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소설이든 시이든 수필이든 쓰려면 말을 잘 배우고 살펴야 합니다. 먼저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 푸름이 나이일 때에 썼기 때문에 ‘우리 말이 무엇이고, 우리 말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우리 말을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망가뜨리는가’까지 짚기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른들조차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매만지며 소설쓰기를 하지는 못하니까요. 여느 때에 쓰는 여느 말투로 소설쓰기를 하는 일도 괜찮습니다. 그러면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라는 소설을 쓴 이현희 님은 여느 때에 어떠한 여느 말을 쓰는가요. 책이름부터 “나의 열여덟”이라 말하는 모습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내 열여덟”이 아닌 “나의 열여덟”이란 얼마나 소설다운 말마디요 글이름이 될 수 있을까요.
혹시나, 역시나, 자세히, 당황, 성인용, 설명, 열여덟의 내게는, 건조, 의식적, 과학적, 별다른, 눈을 가진, 7개월, 가족, 외할아버지의 방, 거실, 민기에게로, 호기심, 미소, 앞니만큼의 가치, 영원히, 불편, 지극정성, 소외되기 시작했다, 순간, 분명, 소외당하고 계셨다, 낙엽이 떨어져, 웃고 있는, 표정, 이유, 피곤해진다, 섭리, 피한다, 민기의 재롱, 중앙, 더 이상, 엄마의 철없는 남동생, 나이를 먹는 것, STOP 버튼, 딸의 성장에 대한 두려움, 느끼신 걸까, 확인, 계속, 취급, 발견, 방황, 교화, 일부, 오전, 제한적, 평범한, 소란스레, 항상, 사실, 서서히, 대체, 충분히, 존재하는 걸까, 성장해야, 조르고 있다, 선생님들의 첫사랑 얘기, 다른 행동을 취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노트, 속한다, 고온, 세상 속에서, 일단, 장소, 완벽한, 단지, 유쾌한, 잠시, 투명하게 변해, 그때의 나도, 14년간의 색이, 연애, 사소한 순간, 색(色), 심각한 단어, 바꾸든 간에, 기억할게, 속성, 충동적, 빠른 비트의 노래, 볼륨, 진심으로, 벤치, 그의 시선, 굉장히, 정확하게, …… 이런저런 말마디는 교과서에 다 나오고 둘레 어른 누구나 쓰며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어렵잖이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마디를 문학에 넣는 일이 나쁘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을 하면서 써야 할 글이고, 생각을 가누며 빛낼 문학이며, 생각을 돌보며 꾸릴 소설입니다. 내가 문학으로 담는 낱말 하나 말씨 하나가 어떠한 얼거리와 뿌리이며 흐름인가를 짚어 말느낌과 말빛과 말결을 북돋울 수 있어야 합니다.
소설이나 시나 수필이라 해서 ‘우리 말이 아리따이 빛나는 글꽃’이 되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학은 밑바탕으로 ‘우리 말이 아리따이 빛나는 글꽃’이 되도록 다스려야 하면서 ‘글쓴이 넋과 삶을 아리따이 나누는 글선물’이 되도록 가다듬어야 하니까요. 우리 말이 아리따이 빛난대서 좋은 문학이 아니라, 우리 말이 아리따이 빛나지 않고는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프랑스문학은 프랑스말이 아리따이 빛나는 밑바탕을 깔고, 미국문학은 미국말이 아리따이 빛나는 밑바탕을 깝니다. 이 밑바탕으로 저마다 다른 삶을 저마다 다른 목소리와 숨결로 펼쳐요. 번역이 힘들면서 번역이란 새로운 창작이 되는 까닭은 ‘문학이란 말로 빚는 꽃’이기 때문에, 기계처럼 다른 나라 말로 적바림한대서 번역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말로 새롭게 펼쳐야 하는 번역이니까 번역은 새로운 창작하고 똑같은 일입니다. 번역을 잘 하는 사람은 창작을 잘 하는 셈이고, 번역을 못 하는 사람은 창작을 못 하는 꼴이에요.
어떠한 글이든 글이 글다워야 합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글은 한국사람 글다운 멋이 있어야 합니다. 껍데기만 한글이래서 우리 말이 되지 않아요. stop을 스탑이라 적는대서 우리 말일 수 없어요. “민기의 재롱”이나 “엄마의 철없는 남동생” 같은 말투를 어른들이 으레 쓴다 하더라도, 이런 말투를 쓰는 어른들 스스로 우리 말투를 제대로 살펴 올바로 쓰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니까 잘못이지, 이러한 잘못된 말투를 그대로 따르는 일이 옳다 할 수 없으며, 이러한 말마디로 문학을 하는 일은 썩 아리땁다고 느끼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보다 “나는 밥을 지을 줄 모른다”라는 이야기에 기운이 탁 빠집니다. 자랑하려고 쓴 말이 아니요,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니며, 뭔가 대단한 말이 아닙니다. 아마 요즈음 어느 어린이나 푸름이라 하더라도 밥할 줄 아는 사람은 몹시 드물겠지요.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어린이나 푸름이한테 밥을 하라고 맡기거나 시키는 어른은 없는지 모릅니다. 학교에서 배울 지식이 많으며, 남들하고 겨루는 시험공부 싸움터에서 지면 안 되니까, 아이들 스스로 밥을 해서 차리도록 이끌 어른이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아이들이 쌀을 씻어 냄비에 안치려 할 때에 ‘이 녀석아, 이럴 겨를 있으면 영어 낱말 하나라도 더 외워야지!’ 하면서 부엌에서 쫓아낼 어른만 있지 않겠습니까.
이현희 님은 내 열여덟이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한테나 열여덟은 아름답습니다. 열여덟 나이인 푸름이 스스로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제대로 모를 뿐입니다.
밥을 못하더라도 아름답고 밥을 잘하더라도 아름답습니다. 그 나이에 잘한다면 잘하는 대로 아름답고, 그 나이에 아직 못하면 앞으로 잘하면 되니까 아름답습니다.
.. 점심을 먹고 이를 닦으면서 거울을 본다. 물에서 방금 건져낸 늘어진 행주처럼 오전 시간을 보냈다. 4·5·6교시 수업을 듣고 청소를 하고, 7교시 수업을 듣고 저녁을 먹고,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집에 가면 하루가 끝날 터였다. 어제도 그랬으니까 내일도 그럴 테지 … 난 분명 성장해야 하는데, 날 성장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 많은 교과서들도, 그 두꺼운 문제집들도 날 자라게 하지는 못한다 …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올 수 있는 행복한 수요일이다. 집에 가서 공부해야지. 정석, 교과서, 문제집을 가방 가득 쑤셔넣는다. 하지만 그토록 힘들게 짊어지고 온 것들 중에 들춰 보는 책은 막상 몇 권 되지 않는다. 그 많은 책들을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은 채 다음날 고스란히 학교에 되가져가는 것이다 .. (19, 20, 36쪽)
남자이든 여자이든 똑같습니다. 남자 푸름이이든 여자 푸름이이든 부엌에 깃들 겨를이란 없습니다. 부엌뿐 아니라 빨래기계 앞에 머물 겨를은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손빨래까지 바라기는 어렵겠지요. 적어도 제 옷가지라도 빨래기계에 넣어 돌린 다음, 제 손으로 빨래기계에서 꺼내어 빨래대에 널고, 다 마른 빨래를 푸름이 스스로 개어 옷장에 차곡차곡 넣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밥을 먹는 자리에서 어버이한테 고맙다고 말할 뿐 아니라, 나한테 밥이 되어 준 모든 푸성귀와 곡식과 고기한테 고맙다고 말할 줄 아는 푸름이는 몇이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고맙게 먹은 밥그릇이기에 스스로 설거지를 하고 밥상을 행주로 닦으며 뒷일을 거드는 푸름이는 있기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쌀을 씻어 냄비에 안치는 겨를은 몇 분 안 걸립니다. 밥그릇을 설거지하는 겨를 또한 몇 분 안 걸립니다. 이 몇 분 동안 시험공부를 더 한다면 남보다 시험점수가 더 잘 나올는지 모릅니다. 집과 학교 사이를 두 다리로 천천히 걸어다니지 말고 어머니나 아버지가 태워 주는 자가용을 타야 ‘공부할 겨를’이 더 늘어날는지 모릅니다만, 천천히 내 동네를 거닐면서 내 동네를 느끼고 내 동네이웃을 마주하며 인사하는 일만큼 대단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 시간쯤 걸어서 학교를 가고, 한 시간쯤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대서 남하고 견주어 떨어질 시험성적이라면, 하루 두 시간을 더 참고서나 자습서를 파고든대서 시험성적이 더 잘 나올 수는 없다고 느낍니다.
흔히 시험공부를 공부라고 일컫지만, 시험공부는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공부란 나와 내 삶과 내 터전을 배우는 일입니다. 제대로 말하자면 배우기라 해야겠지요. 배우는 일, 곧 배우기란 시험문제를 외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학교와 학원은 모조리 ‘시험문제 외기’가 마치 공부라도 되는 양 몰아세웁니다. 참다운 공부라 할 이야기를 밝히거나 나누지 않으면서, 거짓 공부나 껍데기 공부를 참공부라도 되는 듯 밀어넣습니다.
.. 다른 사람에게 내 고민이나 슬픔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것이 언제였더라? … 나는 그들이 꺼내는 ‘사귀자’는 말의 가벼움이 너무 싫다. 그들은 그런 말을 했다. “쉽게 하는 말 아니야. 한참을 고민했어. 난 진지해.” 하고. 정말 진지하게 날 좋아했다면, 친구로 지내자는 내 부탁 아닌 부탁을 어쩜 그리 쉽게 무시할 수 있니 .. (33, 46쪽)
푸름이로 지내는 동안 푸른글, 그러니까 청소년소설을 쓴 일은 대단하거나 놀랍습니다. 오늘 이 나라에서 푸름이로 지내며 푸른글을 쓰자면 어쩔 수 없이 갑갑하거나 갇히거나 겉핥기에서 맴도는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는 아름다운 글이 되기 힘든 한국 삶터요, 즐거운 문학이 되기 힘든 한국 터전이며, 빛나는 글이 되기 어려운 한국 학교입니다.
어쩌면, 《나의 열여덟은 아름답다》가 아름다운 글이나 즐거운 문학이나 빛나는 글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잘못인지 모르겠습니다. 틀에 박히게 살아가며 틀에 박힌 삶과 이야기를 쏟아낼밖에 없는데, 틀에 박히지 않는 넋이나 말이나 이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잘못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렇게 바라는 사람이 잘못이지요.
하나도 아름답지 않은 푸름이일 뿐더러, 하나도 아름다울 수 없게끔 꽉 막힌 채, 그냥 꿈으로만 아름답겠지 하고 노래하는 푸름이인데, 이러한 삶으로 머리로 그리는 문학이란 얼마나 문학다울 수 있겠습니까.
.. 머릿속으로 엄마에게 예쁜 옷을 입혀 본다. 상상이 잘 안 된다. 옛날 사진처럼 뿌옇고 희미하다. 내가 아는 엄마는 지극히 평범한 주부 또는 아줌마이며, 앞치마를 두르고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집안일을 하는 모습만이 아주 선명하게 그려진다. 내가 아는 엄마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 (93쪽)
이현희 님은 시금털털하게 제 삶을 보여주고, 제 넋을 밝히며, 제 말을 털어놓습니다. 이래저래 꾸미면서 제 모습 아닌 모습을 보여주려 하거나 제 넋 아닌 넋을 선보이려 하거나 제 말 아닌 말을 덧붙이려 했다면 짜증스러웠으리라 봅니다. 문학이란 겉치레나 껍데기일 수 없으니까요. 문학이란 잘나도 못나도 고스란히 내 얼굴을 보여주면서 내 손으로 빚는 글꽃이니까요.
못생겼다 할 꽃이란 없습니다. 못생겼다 할 글꽃이란 없습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슬픈 꽃이고, 아프면 아픈 대로 아픈 글꽃입니다.
푸름이 이현희 한 사람은 제도권 시험지옥 울타리에서 아파하는 그대로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자락에 제 빛나는 나날을 갈무리합니다. 무엇이 빛나는지 모르고, 무엇을 빛내야 하는지조차 모르지만, 아무튼 제 빛나는 나날을 글로 적바림합니다.
열다섯에 열다섯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달아야 마땅하지만, 열다섯에 열다섯 삶을 깨닫지 못하며 스물다섯을 맞이한다면, 스물다섯에도 스물다섯은 얼마나 스물다섯답게 아름다운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부디 천천히 내 나이를 어림하며 내 삶을 사랑해 주면 좋겠습니다. 열여덟은 열여덟대로 아름답고, 열아홉은 열아홉대로 아름답습니다. 열여덟은 한 해뿐이고 열아홉도 한 해뿐입니다. 스물여덟이고 서른아홉 또한 한 해뿐입니다. 모든 나이는 그날그날 오직 나한테 딱 한 번만 주어지는 나날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로 지내는 나날은 이러한 나날대로 예쁘고, 어머니이기 앞서 아가씨였거나 푸름이였을 때에는 이러한 나날대로 예쁩니다. 어머니 지난날을 떠올릴 수 없다면, 내 오늘날 또한 헤아리지 못합니다. 나를 나 그대로 바라볼 때라야 내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 또한 내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 그대로 헤아립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넋으로 살아가며 어깨동무하는 한솥밭 길동무임을 몸으로 느껴 주면 고맙겠습니다. 스스로 삶을 넓혀야 넋이 넓어지고, 스스로 삶을 넓히며 넋이 넓어지도록 해야 말과 글과 이야기 또한 시나브로 넓어집니다. 한국땅 푸름이들이 스스로 삶을 넓히기 힘들다지만, 멀리멀리 여행을 다니거나 책을 많이 읽는대서 삶이 넓어지지는 않습니다. 삶을 넓히는 길은 바로 내 가슴에 있고 내 작은 집에 있으며 내 작은 마을에 있습니다. 바라보아야 하고 깨달아야 하며 부둥켜안아야 합니다. (4344.3.24.나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