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 한국의 사찰 14
한국불교연구원 엮음 / 일지사 / 1978년 3월
평점 :
절판




 한국문화를 사진으로 담는 외국사람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6] 에드워드 B.아담스, 《한국의 사찰 (1∼18)》(일지사,1974∼1979)



 한동안 한국 사진밭에서 ‘장승’이나 ‘절’이나 ‘시골 농삿집’이 사진감으로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요즈음은 장승이나 절이나 시골 농삿집을 사진감으로 삼는다든지 아끼려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2010년대로 접어든 요즈음으로서는 장승 하나 찾아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몇 군데 안 남은 장승마저 목아지가 잘리거나 기둥이 뽑히곤 합니다. 절을 찾아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제법 많기는 하지만, 이 나라 크고작은 절을 두루 찾아다니며 하나하나 어떻게 다르면서 아름답고, 이 절마다 어떠한 삶하고 사람하고 사랑이 눈물과 웃음으로 어우러졌는가를 깊이 톺아보는 눈썰미까지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시골에도 아파트가 들어설 뿐 아니라, 시골마다 다 다르던 시골말은 텔레비전이라는 엄청난 대중매체에 힘입어 거의 사라집니다. 시골마을을 시골마을답게 하던 두레와 품앗이는 자취를 감춥니다. 도시사람은 국산 쌀이니 콩이니 보리이니를 따지지만, 정작 스스로 농사를 짓는다든지, 똥거름을 내어 흙을 일군 곡식을 제값을 치르며 장만하여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삶자락으로 시골로 찾아가는 도시내기 사진쟁이는 시골 농삿집을 꾸밈없이 바라보지 못합니다. 있는 그대로 껴안지 못해요. 시골이 왜 시골이요, 농삿집이란 무엇을 하는 집인가를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한국에서 한국 삶이라 할 만한 사진이란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한국에서 한국 삶과 사람을 어깨동무하면서 다큐멘터리를 엮는 사진쟁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도시 골목동네 사람들 살림집이나마 살가이 들여다보며 이웃하는 사진쟁이는 몇 사람쯤 될까요. 스스로 가난한 도시 골목동네 사람으로 살아가며 ‘내 삶’인 ‘가난한 도시 골목사람’ 이야기를 적바림하는 사진쟁이는 한두 사람이나마 있기는 있을는지요.

 도시에 밀릴 뿐더러 도시한테 빼앗기거나 짓눌리는 시골마을 작은 집에서 흙을 일구면서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는 얼마나 될까요. 시골집을 전원주택처럼 꾸미는 사진쟁이가 아니라, 집은 시골이지만 대학교에 강의하러 다니거나 서울 같은 큰도시로 쏘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참말 시골자락에 마음과 몸을 깃들이고는 시골사람으로 지내며 시골마을을 수수하게 사랑하며 사진으로 만나는 사람은 얼마나 되려나요.

 한국 사진쟁이는 한국땅 곳곳에 풀집이 가득가득 하던 때에도 풀집 사진을 잘 안 찍었습니다. 한국 사진쟁이는 한국땅 어디에나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던 때에도 슬레이트지붕 사진을 잘 안 찍었습니다. 한국 사진쟁이는 도시마다 달동네 꽃동네 판잣집이건 성냥갑집이건 들어서며 올망졸망 복닥이던 때에도 이러한 삶자락을 잘 안 찍었습니다. 한국 사진쟁이는 아파트한테 밀리는 골목집 삶자락 또한 잘 안 찍습니다. 때때로 ‘출사’라는 이름으로 사진놀이를 다니는 사람들은 더러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사진쟁이는 다큐사진을 하든 상업사진을 하든 영업사진을 하든 예술사진을 하든 순수사진을 하든 보도사진을 하든 무슨무슨 만듦사진을 하든, 정작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내 땅 내 터 내 마을 내 동네하고는 동떨어진 데에서 사진기를 들 뿐입니다. 이러다가 일본이니 중국이니 미국이니 프랑스이니 독일이니 영국이니 티벳이니 인도이니 네팔이니 태평양이니 아프리카이니 쿠바이니 하고 나라밖으로 떠돌기만 합니다.

 어느덧 새책방에서는 감쪽같이 사라질 수밖에 없던 얄팍한 책 “한국의 사찰”을 생각합니다. 헌책방마실을 하다 보면 드문드문 한 권쯤 보이는 “한국의 사찰”입니다. 1974년에 1권이 나왔고, 1979년에 18권이 나왔습니다. “한국의 사찰”을 펴낸 ‘일지사’는 100쪽이 채 안 되는, 말 그대로 ‘얄팍한’ 책을 꿋꿋하게 엮었습니다. 《불국사》(1번,1974)부터 《범어사》(18번,1979)까지, 여섯 해에 걸쳐 남녘땅 절과 북녘땅 절을 샅샅이 누비면서 ‘제대로 남아나지 못한 자료’를 뒤지거나 갈무리하면서 작은 책을 한 땀 두 땀 일구었습니다.

 헌책방을 다니면서 “한국의 사찰”을 차곡차곡 모으는 동안, 이 작은 책에 사진을 넣은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책을 쓴 사람은 따로 밝히지 않고 ‘한국불교연구원’이라고만 되었습니다. 그러려니 하며 이 책들을 어느덧 열 권 모았는데, 열 권째로 《낙산사》(14번,1978)를 사서 읽던 2010년 9월, 뒷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이 놀랍니다. 책 안쪽에 “한국의 사찰”을 엮은 사람들 이름이 줄줄이 적혔기 때문인데, 맨 끝에 적힌 사진쟁이 이름은 외국사람이었습니다. 글을 쓴 사람은 때때로 바뀌기는 하지만, 사진을 찍은 사람은 오직 하나, ‘에드워드 B.아담스’라고 하는 분입니다.

 사진쟁이 이름 옆에는 묶음표를 치고 “Principal of Seoul International School”이라 적히고, “한국불교연구원 연구위원”이라는 이름도 적힙니다. 조금 더 알아보니 ‘서울국제학교’는 1973년에 문을 열었고, 에드워드 B.아담스라는 분은 이때에 서울국제학교를 함께 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B.아담스라는 사람에 얽힌 자료나 이야기는 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저, “한국의 사찰” 열여덟 권에 실린 사진을 이분이 홀로 맡아서 찍었을 뿐이라고만 알 수 있습니다. 《한국사진사 1631∼1945》(눈빛,1999) 같은 책을 뒤적이지만, 1945년까지만 다룬 《한국사진사》에서 에드워드 B.아담스 님 발자취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1945년 뒤에는 우리네 사진밭이 어떻게 나아갔는가를 다루는 책이 앞으로 나올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나중에 ‘현대 한국 사진 발자취’를 다루는 책이 나온다 한다면, 이러한 책에 에드워드 B.아담스라는 외국사람이 한국땅 절집을 담은 사진을 놓고도 한두 줄이나마 짤막히 다룰는지 궁금합니다.

 곰곰이 돌아본다면, 에드워드 B.아담스 님은 1970년대에 이 나라 절집을 두루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우리네 절집이 1970년대에 어떤 모습으로 남았는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2010년대인 오늘날 더듬어도 자그마치 마흔 해 앞선 때 모습이니, 오늘날보다 한결 잘 살아남은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 에드워드 B.아담스 님이 찍은 사진들 필름을 건사해 준다면 한결 빛나는 사진으로 나중에라도 다시 마주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1970년대에 이분이 절집 사진을 남겼기 때문에 뜻있거나 뜻깊지 않습니다. 절집을 두루 사랑하거나 아끼면서 차근차근 사진으로 찍었기 때문에 값있으며 아름답습니다. 어떤 멋이라든지 이러저러한 예술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절집이니 절집을 고스란히 찍는다’는 매무새로 “한국의 사찰” 열여덟 권이 태어나도록 밑거름 노릇을 했기 때문에 알차고 훌륭합니다.

 내가 한국사람이니까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담아야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한겨레붙이라서 한겨레붙이가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보며 사진으로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내가 불교를 믿으니 절집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내가 천주교나 개신교를 믿으니까 절집 사진은 안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스스로 발을 디딘 터전에서 스스로 좋아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사진기를 들어야 합니다. 바쁜 틈을 쪼개면서 사진기를 들어야 하고, 바쁘니까 바쁜 삶을 즐기면서 사진을 즐겨야 합니다.

 하루이틀 찍고 그치는 사진이 아닙니다. 한두 해 찍어서 되는 사진이 아닙니다. 열 해나 스무 해를 찍었으니 뭔가 그럴듯하게 태어나는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겠다 마음먹었으면, 내가 좋아하는 사진감을 온삶을 들여 차근차근 사랑하며 찍어야 비로소 사진쟁이 이름을 얻습니다. (4344.3.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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