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전설
라이너 침닉 지음, 장혜경 옮김 / 큰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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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무를 심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책읽기 삶읽기 44] 라이너 침닉, 《나무의 전설》


 《나무의 전설》을 쓴 독일사람 라이너 침닉 님은 “나무는 비밀도 털어놓는다. 우리가 나무와 하나라고 느끼고 있다고 가르쳐만 준다면 말이다(9쪽)” 하고 말하면서 책머리를 엽니다. 더없이 마땅한 이야기인데, 독일사람이고 한국사람이고 언제나 이 말마디를 잊습니다. 예전에는 잊었고, 이제는 아예 모르며, 앞으로는 아무도 떠올리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독일사람 라이너 침닉 님은 《나무의 전설》 책머리에서 “독일인의 정서는 예부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보다는 숲 전체를 더 좋아하였고, 그마저 그것의 이용가치가 먼저였다. 최근에 와서야 그런 태도들이 변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미 국법이 정한 경제정리와 무리할 정도로 심해진 이윤적 사고로 인해 농촌의 풍경은 모조리 망가져 버렸고,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풍경마저 환경공해로 인해 갉아먹힌 지 오래다(6쪽).” 하고도 이야기합니다. 따지고 보면, 한국사람도 독일사람하고 크게 안 다르구나 싶으며, 이 나라 사회도 독일 사회하고 엇비슷하구나 싶습니다. 나무를 아끼거나 숲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훌륭한가를 말하면서 환경사랑을 외치던 ㅊ이라는 ‘숲탐방 이야기꾼’은 ‘4대강 사업 홍보본부장’으로 탈바꿈하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환경정책은 ‘사람한테 돈이 될 만하느냐 안 될 만하느냐’에서 오락가락합니다.


.. 세월은 흐르고 또 흘렀다. 그 일을 겪었던 목동은 오래 전에 이 세상을 떠났고, 비바람에 썩은 안내판은 폭풍에 날려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래서 산 아래 계곡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날의 기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 남편은 아내에게 온갖 선물을 퍼부었고 아내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였지만 재물 못지않게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마음의 평화를 아내에게 선사해 줄 수는 없었다 ..  (26, 55쪽)


 우리한테 돈이 없다면 아이들한테 과자 한 봉지 사 줄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 돈이 있기에 식구들하고 맛나다는 바깥밥을 사서 먹습니다. 우리한테 돈이 없을 때에는 따스한 집 한 채 달삯으로든 전세로든 얻지 못합니다. 우리한테 돈이 있으니까 책을 사서 읽거나 영화관에 가서 느긋하게 한두 시간 즐깁니다.

 우리는 돈을 벌어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 삶’을 다룬 책 하나 사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돈을 안 벌어도 ‘나무 한 그루에서 내놓은 씨앗 하나를 땅에 알뜰히 심은 뒤 나무씨앗이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줄기를 올리는 기나긴 해를 곁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나무를 사랑하는 내 삶을 일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지런히 회사일을 하든 무슨 일을 해서 은행계좌에 차곡차곡 돈을 쌓은 다음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습니다. 힘껏 돈을 번 만큼 늘그막에 나라밖 여행을 다니든 전원주택을 장만하든 하면서 한갓지게 삶마무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돈벌이보다 내 오늘 하루를 알차게 가꾸면서 즐기는 데에 온삶을 바칠 수 있습니다. 아이한테 물려줄 돈은 한 푼조차 없지만, 아이 마음밭에 ‘내 어머니랑 아버지랑 즐겁게 손 잡고 논 생각과 느낌’을 아로새길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와 아버지가 그림책을 읽는 목소리를 아이 마음에 곱게 깃들일 수 있습니다.

 돈을 꽤 벌어들인다면 멋지고 빠른 자동차를 장만해서 이 나라 구석구석 골골샅샅 누비면서 ‘아이야, 애써 나라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이 나라에서 아름다운 사람과 터전과 자연을 두루 만날 수 있단다’ 하고 알려줄 수 있습니다. 돈이 없는 가난한 살림이니까, 자전거 뒷자리에 아이를 태우고 다닌다든지, 또는 함께 손을 맞잡고 길을 거닐면서, 도시에서는 골목길을 느끼고 시골에서는 숲길이나 논둑길을 맞아들이면서 ‘아이야, 천천히 길을 걸으니까 우리는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마을사람하고 사귀며 다리가 아플 때에는 햇볕 좋은 데에서 나란히 드러누워 파란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단다’ 하고 속삭일 수 있습니다.


.. 대장장이의 바람도 헛되이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대장장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대장장이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겐 이제 그와 같은 수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거대한 살육의 현장으로 끌려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  (69쪽)


 이야기책 《나무의 전설》은 열두 달에 걸쳐 열두 가지 나무하고 부대낀 사람들 이야기를 수수하게 들려줍니다. 잘나지 않으나 못나지 않은, 대단하지 않으나 대수롭지 않다 할 수 없는, 그럴싸하지 않지만 하잘것없지 않은, 이냥저냥 오순도순 옹기종기 도란도란 어울리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책이름은 “나무의 전설”이라지만, 한 꼭지 두 꼭지 찬찬히 읽다 보면, “나무에 얽힌 옛이야기”이거나 “나무하고 얽힌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멀디먼 옛날 옛적 이야기라기보다 오래도록 우뚝 서서 우리 곁에서 오백 해이고 즈믄 해이고 살아가는 키큰나무들마다 가슴에 살뜰히 담았던 “나무가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우리 보금자리 곁에 은행나무가 있으면 은행나무하고 얽힌 이야기가 있을 테고, 우리 살림집 둘레에 살구나무가 있으면 살구나무하고 맺은 이야기가 있을 테지요.

 저는 고향마을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던 때, 날마다 골목마실을 아이와 함께 즐기면서 포도나무 감나무 배나무 능금나무 오얏나무 복숭아나무 매화나무 벚나무 석류나무 앵두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탱자나무 들을 만났습니다. 어쩌면 집집마다 이토록 갖가지 다른 열매나무를 심었는가 싶어 놀라고, 아이한테 이런 나무 저런 나무를 보여주고 잎사귀를 만지라고 번쩍 들며 놀았습니다.

 나무전봇대보다 높이 자란 오동나무 오동꽃 흩날리는 밑에서 아이하고 춤을 추고, 감나무 밑에서 까치밥을 쪼아먹는 직박구리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이 숱한 나무들을 심은 골목이웃은 저마다 다 다른 꿈과 뜻과 넋을 나무 한 그루에 심었겠지요. 골목이웃이 조그마한 골목집에 처음 깃들던 때 가난한 살림이면서도 나무 한 그루를 심어 스무 해 서른 해를 돌보았고, 마흔 해를 웃도는 나무들은 어느새 골목집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새 아이를 낳는 모습까지 바라보겠지요. 이 나무들은 ‘아파트로 재개발’하는 공무원과 건설업자 돈벌이에 따라 하루아침에 싹둑싹둑 베어지겠지만, 이 나무를 심었고 이 나무와 함께 살았던 사람들 마음자리 한켠에는 해마다 마주하던 나무꽃과 나무열매 맛·내음·빛깔·무늬가 살며시 스몄으리라 생각합니다. (4344.2.26.흙.ㅎㄲㅅㄱ)


― 나무의 전설 (라이너 침닉 글·그림,장혜경 옮김,큰나무 펴냄,2007.4.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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