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살려쓰면 좋은 우리말 : 숲말
도시에는 빌딩숲이 있습니다. 빌딩으로 숲을 이루어 빌딩숲입니다. 시골 멧자락은 나무숲이 있습니다. 들판이 있고 나무가 자라기에 시골이에요. 파랗디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거진 풀숲에 흐드러진 꽃누리가 펼쳐졌기에 시골입니다.
도시는 사람들로 숲을 이루기도 합니다. 숱한 사람들이 온통 도시로 몰려들기에 도시는 사람숲입니다. 사람물결이요 사람바다이며 사람판입니다. 여기에, 어디를 가든 자동차가 가득하기에 자동차숲이라 할 만합니다. 이제 도시는 새로 솟는 아파트가 나무보다 키가 높은 만큼 아파트숲이기까지 합니다. 빌딩숲에 사람숲에 아파트숲에 자동차숲입니다. 더구나, 도시는 이쪽 길로든 저쪽 길로든 가게가 끊이지 않습니다. 옷가게이든 술가게이든 전화가게이든 가게들이 가득가득합니다. 도시는 가게숲까지 이룹니다.
길바닥은 아스팔트이거나 시멘트인 도시에서는 흙으로 된 맨땅을 밟기 아주 어렵습니다. 맨땅은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그나마 초·중·고등학교 운동장은 흙땅에서 인조잔디땅으로 바뀝니다. 가까스로 흙을 밟을까 싶던 학교 운동장마저 싹 사라집니다.
숲다운 숲이란 없는 도시이고, 숲에 깃드는 나무나 풀이나 꽃이 없는 도시입니다. 이런 도시에서는 숲과 얽힌 말, 이를테면 풀숲이나 나무숲이나 꽃숲 같은 말은 쓰기 어렵습니다. 아니, 이런 말을 할 일이란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맨드라미 진달래 찔레꽃을 이야기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어쩌면, 이 나라 도시에서 할 말이란 돈과 얽힌 말, 이를테면 돈숲·돈바다·돈하늘·돈땅·돈사람·돈일 따위일는지 모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는 볍씨나 풀씨나 꽃씨 같은 말을 쓸 일이 없습니다. 도시에서 일하는 기자로서는 풀베기나 나무베기나 벼베기 같은 말을 쓸 자리가 없습니다. 도시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으로서는 종달새나 골짜기나 산들바람 같은 말을 쓸 데가 없습니다.
밥을 먹어야 살고 물을 마셔야 목숨을 잇는 사람입니다. 숲이 있어 나무가 자라고, 숲에서 온갖 짐승이 함께 어우러져야 사람 또한 살가운 숨결을 사랑할 만합니다. 작은 도시는 큰 도시가 되려 하고, 시골은 작은 도시로 거듭나려 하는 마당이지만, 밥을 아끼고 물을 사랑하며 목숨을 어깨동무하고 싶은 마음으로 숲말을 하나하나 되뇌어 봅니다.
1. 숲길 :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싱그러우면서 푸른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에 따로 숲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숲이란 나무가 우거져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숲길을 걷는 사람들은 숲길을 걸으면서 숲길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수목원(樹木園)’에서 ‘삼림욕(森林浴)’을 한다고 여깁니다.
2. 산타기 : 숲에서 사는 사람은 숲길을 따로 걸을 까닭이 없고, 논밭에서 구슬땀 흘리는 사람은 논밭에서 싱그러우면서 푸른 숨을 받아먹습니다. 멧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멧자락 기운을 곱게 받아안아요. 따로 ‘등산(登山)’이라는 이름으로 ‘산타기’를 하지 않아도 즐겁습니다.
3. 멧짐승 : 멧골에는 멧쥐가 멧굴을 파고, 멧토끼가 멧집에 살며, 멧새가 멧노래를 우짖습니다. 다 함께 멧짐승이고 멧삶입니다. 멧사람은 멧골집을 마련하고 멧마을을 이룹니다.
4. 멧나물 : 들에서 얻어 들나물이고, 멧골에서 얻어 멧나물입니다. 바다에서는 바다나물이 되겠지요. 밭에서는 밭나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일본말 ‘야채(野菜)’에다가, 중국말 ‘채소(菜蔬)’만을 쓰는구나 싶습니다. 우리말 ‘나물’과 ‘남새’와 ‘푸성귀’를 가눌 줄 모릅니다. 사람이 키우면 남새이고, 절로 자랐으면 나물이요, 남새와 나물을 통틀어 푸성귀입니다.
5. 콩팥 : 우리 식구는 생협(생활협동조합)에서 먹을거리를 즐겨 장만합니다. 그런데 이곳 생협에서도 ‘콩’과 ‘팥’이라는 낱말을 잘 안 써요. 으레 ‘대두(大豆)’랑 ‘적두(赤豆)’라 합니다. 멸치를 말렸으면 마른멸치일 테지만 ‘건(乾)멸치’라 쓰기까지 해요. 하기는, 여느 자리에서도 ‘말린포도’ 아닌 ‘건포도’라고만 하니까요.
6. 누런쌀 : 모든 쌀은 맨 처음에는 ‘누런쌀’입니다. 씨눈까지 깎아내듯 하얗게 더 깎은 쌀이 되면 ‘흰쌀’입니다. 누르스름하기에 누런쌀이요, 하얗디하얗기에 흰쌀이에요.
7. 가을걷이 : 가을날 곡식을 거두기에 가을걷이라 일컫습니다. 가을에 잔치를 한다면 가을잔치가 될 테지요. 프로야구판에서 으레 ‘가을잔치’라는 말을 써요. 경기장에서 벌이는 배구나 농구나 핸드볼은 흔히 겨울잔치라 일컫습니다. 겨울날 따스한 실내에서 놀이마당을 마련하니까요. 가을날 가을볕을 받으며 구슬땀을 흘리면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씻어 주며 가을열매 넉넉히 나눕니다.
8. 고샅길 : 도시에서는 골목이고, 시골에서는 고샅입니다. 도시에서는 골목이 차츰 자취를 감추고, 시골에서는 고샅이 자꾸 스러집니다. 자동차가 너무 많이 는 탓이며, 아파트를 새로 올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9. 가랑잎 : 팔랑팔랑 하늘하늘 토옥 툭 살살 한들한들 떨어지는 잎이란 가랑잎입니다. 대롱대롱 건들건들 달린 잎이란 나뭇잎입니다.
10. 큰나무 : 숱한 싸움판을 겪은 우리나라에는 큰나무가 드뭅니다. 아름드리 나무를 좀처럼 만나기 힘듭니다. 시골이라 해서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지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더더욱 아름드리 나무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하더라도 쉰 해나 백 해를 한 자리에서 튼튼히 서도록 하지 않는 우리들입니다. 사람들 삶터 또한 한 곳에서 쉰 해나 백 해 즈음 즐거이 뿌리내리도록 놓아 주지 않는 우리 사회입니다. 큰나무 없는 터에 큰사람이란 없고, 작은나무조차 흔들거리는 두려운 곳에 작은사람 또한 힘을 잃거나 기운을 빼앗깁니다.
11. 오얏꽃 : 능금나무에는 능금꽃이, 대추나무에는 대추꽃이, 배나무에는 배꽃이 핍니다. 오얏나무에는 오얏꽃이 피겠지요. 이화여자대학교를 굳이 ‘배꽃대학교’로 이름 바꿀 까닭은 없습니다만, ‘배꽃’처럼 어여쁜 이름을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은 슬픕니다. 우리는 ‘오얏꽃’ 예쁜 봉우리 또한 잊거나 잃었습니다. 오얏은 사람 성씨 ‘이(李)’에만 남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자두 이’ 씨로 써야지 싶습니다.
12. 물놀이 : 겨울날 얼음판에서 얼음을 지치며 얼음놀이를 합니다. 여름날 물가에서 물을 가르며 물놀이를 합니다. 들에서 들판을 박차며 들놀이를 합니다. 멧자락에서 멧길을 오르내리며 멧놀이를 합니다.
13. 맹꽁이 : 맹 꽁 맹 꽁 운대서 맹꽁이입니다. 사람은 왜 사람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려나요. 요새는 사람이라는 낱말은 뒤로 밀리고 ‘인간(人間)’이라는 낱말만 흔히 들립니다. 우리는 왜 사람이라 말하지 못하고 인간이라 말하려나요. 까매서 까마귀요 하얘서 해오라기인데, 짐승한테 붙이는 이름과 사람한테 붙이는 이름에는 어떠한 느낌과 빛깔과 마음과 삶과 사랑과 믿음을 담았으려나요.
14. 함박꽃 : 함박꽃을 보면 말 그대로 함박꽃답구나 하고 느낍니다. 함박눈을 보면 그야말로 함박눈이네 하고 절로 입이 벌어집니다. 입이 함박만 해지며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