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혼인을 했어도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어머니’가 되지 못합니다. 혼인을 했으나 아이를 낳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버지’가 되지 못합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매한가지입니다. 당신 아이가 아이를 낳아야 비로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됩니다.
아이를 하나 낳아 기르고, 곧 둘째를 낳아 기를 어버이로 살아가면서 생각합니다. 아이 아버지로서 내가 좋아하는 글이란, 아이 아버지답게 내가 쓰는 글이란, 언제나 어린이를 살피는 글입니다. 어린이를 생각하지 않고 지식을 생각하며 쓰는 글은 예전부터 쓰기 싫었고 쓰지 않았으며 읽고 싶지도 않습니다.
흔히 인문책은 지식책인 줄 잘못 알지만, 인문책은 지식을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지식을 다루면 지식책일 뿐입니다. 지식책이란 ‘기술서’입니다.
인문책이란 삶을 다루는 책입니다. ‘삶책’을 한자말로 옮기니 ‘인문(人文)책’이 됩니다. 우리는 삶을 다루는 책인 인문책을 읽어야 하고, 앞으로는 ‘인문책’이라는 이름은 내려놓고 ‘삶책’이라는 이름을 옳고 바르며 쉽고 살가이 말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제 이름을 제대로 말하면서 제 삶을 제대로 꾸려야 비로소 내 삶이며 내 책이고 내 글인 가운데 내 꿈입니다.
어린 날부터 책을 읽을 때면 ‘어린이를 사랑하는 넋’을 담은 이야기가 깃든 책을 좋아했습니다. 동화책이든 만화책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넋을 담지 않은 책은 재미있지 않았어요. 그리 당기지 않고, 손을 뻗기 어렵습니다. 《마징가 제트》 같은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는, 어린 날에도 그리 재미있지 않았을 뿐더러, 어른이 되어 다시 보아도 따분합니다. 《우주소년 아톰》 같은 만화책이나 만화영화는, 어린 날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넘겨도 눈물을 흘립니다. 똑같은 ‘로봇’ 만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로봇이 벌이는 싸움박질과 로봇을 앞세워 싸움박질을 하는 못난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다른 하나는 로봇에 깃들이는 사랑과 로봇뿐 아니라 뭇목숨을 아끼는 사랑스러운 넋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머니가 쓰는 글처럼 살가우면서 따스한 글은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막상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머니들 가운데 글을 쓰는 분은 몹시 드뭅니다. 더구나, 애 어머니가 쓰는 글을 책으로 묶는 일은 훨씬 드물 뿐 아니라, 책으로 내야겠다고 찾아나서는 사람조차 드뭅니다. 아니, 애 어머니는 누구한테 내보이려고 글을 쓰지 않아요.
아이를 낳았어도 다른 사람 손에 맡긴 채 글을 쓰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꽤 많습니다. 이분들 또한 아이를 낳아 키우며 글을 쓰는 어버이라 할 만하지만, 그다지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못미덥습니다. 이모저모를 떠나, 이런 어버이들 글은 참 따분합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로서는, 아이하고 복닥이는 하루하루로 고되면서 즐거울 뿐, 애써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고마우면서 하루하루 잊고 새롭게 하루하루 맞이하는 나날입니다. 글까지 쓰도록 넉넉한 말미가 아니요, 그림이나 사진을 할 만큼 한갓진 겨를이 없습니다.
어린이 삶을 헤아리기 때문에 더욱 포근하면서 보드랍습니다. 어린이 삶을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딱딱하거나 거칩니다. 어린이 입맛을 살피며 밥을 하듯, 어린이 눈높이를 살피며 글을 씁니다. 어린이 살결과 몸을 돌아보며 옷을 입히듯, 어린이 살결과 몸을 돌아보는 매무새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린이 눈썰미에 맞게 손을 잡고 마실을 다니듯, 어린이 눈썰미에 맞는 자리에서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이랑 복닥이며 함께 살아가야 바야흐로 어머니나 아버지입니다. 그래, 어머니들은 글도 잘 안 써 버릇 할밖에 없도록 집살림에 바쁘며, 책을 읽을 만큼 느긋하거나 호젓하지 않아요. 책을 쓰는 사람들은 ‘어머니가 읽을 만하’게 책을 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어머니가 즐겁게 짬을 내어 읽을 수 있는 책이어야 비로소 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여깁니다. (4344.1.25.불.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