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 살려쓰면 좋은 우리말 : 삶말


 제가 살아가는 집은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습니다. 어쩌면 너무 마땅한 소리라 할 만한데, 참말 그렇습니다. 겨울에는 추워서 손이 곱습니다. 겨울이면 집에서 긴옷을 여러 벌 껴입으면서 지내고, 여름이면 집에서 거의 맨몸 차림으로 보냅니다. 봄에는 봄날대로 봄기운을 느끼는 집입니다. 여름이면 여름다움을 받아들이고, 가을에는 가을이구나 하고 헤아립니다. 겨울철은 겨울이란 어떠한 날씨인가를 새삼 깨닫습니다.

 모든 시골집이 우리 집마냥 춥거나 덥지는 않아요. 제가 집살림을 알뜰히 여미지 못하는 나머지 겨울에 제법 추운 채 지낸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살붙이들은 한데에서 자지 않아요. 오늘날 우리네 삶터 곳곳에는 내 보금자리 한 칸 없어 길바닥에서 잠을 자며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이 무척 많아요. 우리는 고맙게 보금자리를 얻었고, 제법 춥다 하지만 길바닥 아닌 멧골자락 살림집에서 따스하게 이불을 덮으며 잠들 수 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인데요, 누구나 저마다 살아가는 터전에 걸맞게 말을 배우고 나눕니다. 고운 터전에서 고운 이웃과 어버이하고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은 고운 말을 듣고 익히며 쓰는 삶을 꾸립니다. 거친 터전에서 거친 이웃이랑 어버이하고 부대껴야 하는 사람은 거친 말을 듣고 받아들이며 쓰는 삶을 꾸립니다.

 경상도에서 태어난 사람은 경상도 삶터와 사람과 자연에 걸맞는 기운을 받아들이며 내 말을 돌봅니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강원도 삶터와 사람과 자연에 들어맞는 흐름을 맞아들이며 내 말을 살찌워요. 서울에서 어린 나날을 보내면 서울이라는 터전과 사람과 흐름에 발맞추는 말을 쓰겠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살아가는 결에 따라 말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좋아하며 마주하는 사람들과 함께 말을 살피며 주고받습니다. 나는 내 동무랑 이웃한테서 말을 배우는 한편, 내 동무랑 이웃은 나한테서 말을 배웁니다. 내가 얄궂거나 짓궂거나 어설프거나 못난 말을 일삼는다면 내 동무랑 이웃은 나한테서 이런 말투에 차츰 젖어듭니다. 나부터 정갈하고 알뜰하며 넉넉한데다가 사랑스레 말을 한다면 내 동무랑 이웃은 나한테서 이런 말투에 하루하루 익숙해져요.

 이리하여 삶말입니다.

 삶말을 놓고 우리가 알차게 살찌울 만한 대목을 조곤조곤 짚어 봐요.


1. 네나라 : 학교에서는 ‘삼국시대’라고 배우지만, 가만히 살피면 고구려랑 백제랑 신라에다가 가야가 있어요. 말사랑벗도 알 만한 ‘가야금’이란 악기는 가야사람이 만들었어요. 가야는 아예 나라로 안 치며 일컫는 ‘삼국(三國)’인데, 한자말로 ‘사국’이라 할 수 있으나, 우리는 ‘네나라’라 하면 더 좋아요. 북녘에서는 ‘세나라시기’라는 낱말을 씁니다. 북녘도 ‘네나라시기’라 하면 한결 좋겠지요.
 

2. 살붙이 : ‘살붙이’하고 ‘피붙이’는 같은 낱말이에요. 두 낱말은 ‘한식구’를 가리켜요. 요사이는 일본 한자말 ‘가족(家族)’만 자꾸 써 버릇하지만, 우리한테는 우리 좋은 말 ‘살붙이’가 있습니다. 


3. 사랑놀이 : 학교나 동네 담벼락에 짓궂게 ‘sex’라고 흘겨 적는 짓궂은 동무들이 있어요. 교과서나 여느 책에는 으레 ‘성교(性交)’라는 낱말만 나오고, ‘짝짓기’는 짐승한테만 쓰는 낱말로 삼아요. 정 사람한테 ‘짝짓기’를 못 쓰겠으면 ‘사랑짓기’라 말하면 되고, ‘사랑놀이’나 ‘사랑맺기’라 할 수 있습니다. 


4. 새하늬마높 : 학교에서 ‘높새바람’이라는 바람이름 하나는 듣겠지요. 그러면 높새바람이 어떤 바람인지 아시나요? ‘높(북) + 새(동)’라서, 한자로 적을 때에 ‘北東’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랍니다. ‘하늬바람’은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에요. ‘동서남북(東西南北)’을 가리키는 우리말이 ‘새·하늬·마·높’입니다. 


5. 하나둘셋 : 자동차 다니는 길을 놓고 ‘이차선(二車線)’이나 ‘사차선(四車線)’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두찻길’이나 ‘네찻길’이에요. 전화번호를 말할 때 ‘영 셋 둘(032)에, 하나 둘 셋(123) 국, 넷 다섯 여섯 일곱(4567)이에요’ 하고 이야기하면 참으로 좋습니다. 


6. 이태 : “두 해”를 일컫는 ‘이태’예요. “지지난해”를 일컫는 ‘그러께’이고요. 이제는 어르신들도 이 같은 우리말을 쓸 줄 모르고 ‘이년(二年)’이라고만 합니다만. 


7. 밥버릇 : 좋아하는 밥을 즐겨먹을 수 있고, 먹기 싫은 반찬은 안 먹을 수 있어요. 골라먹기나 가려먹기(편식偏食)를 하면 몸에 안 좋다고 하고요. 그러니까 ‘고루먹기’를 해야겠지요. 온누리를 고루 살피고 내 마음을 고루 가꾸며 밥상에서도 고루 즐기면 아름답습니다. 


8. 살림돈 : 살림을 꾸리며 써야 할 돈이기에 살림돈입니다. 말사랑벗들은 아마 ‘생활비(生活費)’라는 낱말만 들었으리라 생각해요. 


9. 뜨개질 : 학교나 집에서 뜨개질을 배우는지 궁금하네요. 집에서 손수 옷을 지어 입는 사람은 몹시 드무니까요. 옷은 사서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우리들이 옷을 돈 주고 사 입은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길쌈을 하고 뜨개질을 하며 바느질을 하던 우리 삶입니다. 


10. 방긋웃음 : 사람마다 웃는 모양새가 달라요. 같은 사람이라도 때와 곳마다 웃음짓는 매무새가 다르고요. 방긋 웃고 싱긋 웃으며 활짝 웃다가는 살며시 웃습니다. 음전히 웃고 얌전히 웃으며 다소곳하게 웃어요. ‘미소(微笑)’는 일본말입니다. 


11. 장님 : ‘장애자’를 ‘장애인’으로 고쳐 일컫다가 ‘장애우’라는 새말까지 쓰지만, 정작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푸대접하거나 막대접하는 삶터는 달라지지 않아요. ‘장님’이란 우리말을 버리고 ‘시각장애인’이라 일컫는다 해서 복지나 문화나 사회나 교육이 달라지는지 궁금해요. 말은 바꾸지만 삶을 바꾸지 못하고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무슨 보람이나 뜻이 있는지 아리송해요. 


12. 손말 : 손으로 나누는 말이기에 손말입니다. 입으로 나누는 말이면 입말이고, 글로 적어 나눈다면 글말이에요. 입으로 소리를 내는 사람은 입말을 쓰고, 입으로 소리를 못 내는 사람은 손말을 씁니다. 


13. 쉼터 : 예전부터 ‘쉼터’란 말을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루하루 새로 거듭나는 누리에서는 ‘휴게소(休憩所)’나 ‘휴게실(休憩室)’이 아닌 ‘쉼터’로 자리잡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자리라면 ‘만남터’이고, 신나게 노는 곳은 ‘놀이터’이며, 땀흘려 일하는 곳은 ‘일터’예요. 즐거이 가르치고 배우는 곳은 ‘배움터’입니다. 


14. 씻는방 : 겨울이 되니 시골집 씻는방이 자꾸 얼어서 걱정이네요. 아파트라든지 빌라라든지 하는 곳에서는 한결같이 ‘욕실(浴室)’이라 하지만, 우리 집에는 씻는방만 있어요. 


15. 훔치기 : 걸레를 잘 빨아서 방바닥을 훔칩니다. 네살박이 딸아이는 돌쟁이였을 때부터 아빠 옆에서 ‘방바닥 훔치는 모습’을 말끄러미 지켜보았습니다. 물을 살짝 틀어 그릇을 부십니다. 우리 집 딸아이는 저도 설거지를 해 보고프지만 아직 엄마 아빠가 시키지 않습니다. 어차피 크면 알아서 다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칩니다. 날마다 집살림을 힘겹지만 즐거이 치러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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