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마음
― 조성선, 《과학의 나무를 심는 마음》
- 책이름 : 과학의 나무를 심는 마음
- 글 : 조성선
- 펴낸곳 : 전파과학사 (1985.6.20.)
내가 글을 언제부터 썼는가 곰곰이 돌아봅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91년에 처음으로 글쓰기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중학교 다니던 때까지는 따로 글쓰기를 하지 않았고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글쓰기를 온마음 기울여 붙잡은 때는 1995년부터라고 느낍니다. 내 어버이하고 살아오던 집에서 나와 혼자서 살림을 꾸리며 살아갈 때부터 비로소 내 글쓰기 첫길을 열었다고 떠올립니다.
1995년 4월 5일, 내 어버이 집을 나와 홀로 살림을 꾸리기로 한 때부터 이제까지 어설프든 어리숙하든 집살림과 책살림과 글살림을 혼자서 맡습니다. 따지고 보면 혼자서 살림을 한다 할 수 없고, 내 둘레 숱한 사람들 도움손길을 받으며 혼자서 이것저것 할 수 있다고 해야 옳지 싶습니다. 혼자 살아간다지만 밥과 옷과 집을 혼자서 마련하지는 못하니까요. 언제나 누군가한테서 도움을 받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글쓰기를 할 때에 으레 내 힘과 슬기로 글쓰기를 한다지만, 글로 쓸 수 있는 이야기란 내가 꾸린 삶이면서 내가 내 둘레 사람들과 부대끼며 꾸린 삶입니다. 내가 부대끼며 꾸린 삶이란 내 힘만으로 이룬 삶이 아니라, 둘레 사람들 사랑과 믿음으로 이룬 삶입니다. 글쓰기를 하기까지 얻는 온갖 깜냥 또한 내 마음밭이 따뜻하거나 내 머리가 뛰어나서 얻는 깜냥이 아닙니다. 나한테는 조그마한 씨앗이 하나 있을 뿐, 이 씨앗을 돌보거나 보살피는 손길이 많습니다. 게다가 내 가슴에 깃든 씨앗이란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길러서 베푼 선물입니다.
.. 수업을 참관하던 내가 보기에는 보라색이 아니라 검은색으로 보였다. 다른 분단에서 실험한 결과도 모두 검은색으로 나타났다. 나는 조금 전에 발표했던 학생 곁으로 다가갔다. “얘, 이 색이 보라색이냐?” 그 학생은 머리를 긁으며 싱긋이 웃기만 하고 말을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보라색 같지가 않은데, 너는 이 색이 무슨 색으로 보이니?” 나는 옆에 앉은 다른 학생에게 물어 보았다. “검은색 같아요.” … “그런데 왜 보라색이라고 발표했지?” “녹말가루에 요오드용액을 떨어뜨리면 보라색으로 변하니까요.” … “네가 실험한 결과는 소금이 ‘거뭇거뭇’하게 되지 않았는데 왜 ‘거뭇거뭇’하다고 발표했자?” “전과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그 학생은 거침없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 지식이란 이미 발견되었거나 밝혀진 사실을 체계있게 엮어 놓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 수업에서, 교사가 어떤 식의 덩어리를 말로만 가르친다면, 그것은 어린이들의 발견하고자 하는 왕성한 의욕을 꺾어버린 결과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 (9, 12, 39쪽)
1995년 4월부터 2011년 1월에 이르는 나날을 돌이킵니다. 갓 홀로 살아가던 때이든 멧골자락 작은 집에 깃든 오늘 내 삶이든, 글쓰기를 하는 방은 겨울이면 썰렁해서 손이 시립니다. 따끈따끈한 곳에서 글쓰기를 한 적은 한 번조차 없다고 느낍니다. 추위를 잊거나 모르면서 글쓰기를 한 일은 아직 없다고 느낍니다. 추운 날은 춥게 글을 쓰고, 더운 날은 덥게 글을 씁니다. 글을 쓸 때면 으레 날씨를 헤아리고, 날씨를 헤아리는 하루하루 그대로 글을 씁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며 잠이 모자란 나날인 오늘, 잠이 모자라 꾸벅꾸벅 졸면서 글을 씁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는 매무새 그대로 글을 쓰고, 아이를 안고 달래며 토닥여 재우는 삶자락 고스란히 글을 씁니다.
돈이 없어 더 따스한 집을 마련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내 살림집을 꾸리거나 보듬는 데에 마음을 쓰지 못하기도 합니다. 겨울날 추운 집이라면 이래저래 뚝딱뚝딱 고치거나 손질해서 찬바람이 덜 들어오도록 해야 할 텐데, 이런 데에는 제대로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책 하나를 살핀다든지, 글 하나를 여민다든지, 어리숙하나마 밥하고 빨래하는 집일에는 마음을 쓰지만, 막상 집 안팎을 다스리는 데에는 젬병입니다. 글을 쓰는 데에 마음을 바치듯, 집을 고치는 데에 마음을 바치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한 사람이 모든 삶을 다 건사할 수 없는지 모릅니다. 나 스스로 모든 삶을 다 건사한다면 글을 쓸 겨를이 없다든지, 구태여 글까지 쓰면서 살아갈 까닭이 없는지 모릅니다. 집을 손질하는 재미 하나로 넉넉할 삶일 테니까요.
.. 이렇게 볼 때 공장을 거쳐 나온 물건들은 제조되는 과정에서 연료를 소비시킨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므로 우리는 물건이나 물자의 낭비를 막음으로써 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대기오염도 줄여야 할 것이다. 즉 대기오염과 거리가 먼 것 같은 수도물도 헤프게 쓰면 쓸수록 대기를 오염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수도물 생산비의 1/3∼1/5은 전기요금이므로, 수도물의 낭비는 전기의 낭비와 같고, 전기의 낭비는 결국 석유나 석탄을 더 많이 태워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대기오염을 심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대기오염을 심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물 한 컵 연필 한 자루 도화지 한 장 양말 한 켤레라도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동안 대기가 오염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못 쓰게 된 물건이라도 마구 버리거나 태워서 또다시 대기를 오염시킬 것이 아니라 다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연구하여 재활용해야 할 것이며 .. (143∼144쪽)
글을 쓰는 마음은 하루를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기쁘든 슬프든 즐겁든 고단하든 하루를 살아가는 마음을 그대로 글로 담습니다.
《과학의 나무를 심는 마음》을 쓴 조성선 님은 과학이라는 나무 한 그루를 생각하면서 하루를 살았기에 이와 같은 책을 묶었겠지요. 과학나무가 삶나무가 되고, 삶나무가 사랑나무가 되는 길을 헤아리면서 글조각 하나하나 모았겠지요.
글이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책이란, 어느 날 한꺼번에 확 쏟아부은 글로 엮지 않습니다. 글이란, 오늘까지 살아낸 내 모든 땀과 슬기와 꿈을 실어 푼푼이 적바림합니다. 책이란, 날마다 조금씩 적바림하면서 그러모은 삶조각을 차근차근 꿰어맞추며 내놓습니다.
과학을 하는 마음이란 글을 쓰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내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면서 제대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학을 하는 마음이란 글을 쓰는 마음과 매한가지로, 내 삶을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아낌없이 돌보는 매무새를 건사해야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학문하는 과학으로만 치달을 수 없는 과학이요, ‘순수’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치달을 수 없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웃음과 울음을 담는 과학하는 마음이고, 갖은 기쁨과 슬픔을 싣는 글쓰는 마음이라고 느낍니다. (4344.1.21.쇠.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