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무 님 〈비둘기 합창〉을 다시 보면서
아빠 허벅지를 베고 잠들었던 아이가 오줌이 마려운지 깨어납니다. 오줌을 누이고 다시 눕히려 하는데 눕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이랑 함께 ‘영화’를 봅니다. 아이는 엄마랑 아빠랑 나란히 앉아서 “영화 보자!” 하고 외치며 조릅니다. 무얼 보면 좋을까 하며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까치 만화가 보여 돌리는데, 영 재미없구나 싶어 이상무 님 만화영화 《태양을 향해 던져라》를 봅니다. 그러고 나서 《비둘기 합창》이랑 《다시 찾은 마운드》를 봅니다. 《비둘기 합창》은 1970년대 달동네 사람들 삶자락 한켠을 그린 작품으로 1980년대에 만화영화로 나왔습니다. 그래도 ‘제법 살림을 꾸리는’ 사람들 삶자락이라 할 텐데, 조금 더 살림이 펴서 ‘내 집’이 있다 하더라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무렵 아이들 고무줄놀이나 구슬치기를 제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라든지, 집에서 어머니나 큰누나가 뜨개질 하는 대목이라든지, 아주 부드러이 담습니다. 다만, 어느 만화이든 “여자 = 집안일”이고 “어머니 = 희생”입니다. 참 딱하다 할 만하지만, 이때를 살아가던 사람들 삶이 이러했기에 이러한 삶을 고스란히 만화와 만화영화로 담습니다. 생각을 활짝 연다든지 꿈을 드높이 펼친다면 훨씬 훌륭하다 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1970∼80년대처럼 무시무시한 군사독재 때에는 생각을 활짝 열거나 꿈을 드높이는 만화를 그리다가는 하루아침에 이슬처럼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상무 님이 《만화광장》이라는 잡지에 그려서 나중에 낱권책으로 내놓았던 《포장마차》라는 만화책을 헤아린다면, 이상무 님으로서는 당신이 그릴 수 있는 가장 ‘마지막 벼랑’에서 살가우면서 사랑스러운 넋을 보여주었다 할 만합니다. 1970년대 만화를 2010년대 눈길로 섣불리 바라보아서는 이 만화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보여주며 무엇을 즐길 만한지를 알아챌 수 없어요. 1970년대 만화는 1970년대 눈썰미로 읽는 가운데 2010년 오늘을 톺아볼 때에, 우리 터전이 어느 만큼 나아지거나 거듭나거나 발돋움했는가를 꿰뚫어보면서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최규석 님이 ‘패러디’한다면서 그렸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아기공룡 둘리》를 아주 엉터리로 잘못 읽으며 헐뜯은 슬픈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희동이는 ‘사내아이’이거든요. 예전 사람들은 ‘형’이라 안 하고 ‘언니’라 일컬었습니다. 《꺼벙이》를 읽든 《고인돌》을 읽든 《순악질 여사》를 읽든 마찬가지예요. 그무렵 사람들과 삶과 사랑을 헤아리지 않고 ‘(겉훑은) 줄거리’만, 더구나 ‘오늘 눈썰미라는 잣대’로 섣불리 재거나 따지면 작품을 뭇칼질하고야 맙니다.
아이는 만화영화를 다 보고도 잘 생각을 않습니다. 그러나, 뜨개질하는 엄마 곁에서 스케치북을 펼칩니다. 엄마랑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림을 그려 줍니다. 아빠는 아주 살짝이지만 쉴 틈을 얻어 글조각을 조금 붙잡습니다.
이제 식구들 모두 잠들 무렵 아빠도 잠든 다음, 아빠는 새벽 서너 시에 다시 일어나서 조용하면서 호젓한 때에 마음을 가다듬어 ‘집식구 밥벌이’이자 ‘아버지가 걷는 한길’인 글쓰기를 해야겠지요.
오늘도 참 긴 하루였고, 아직 저녁밥상 설거지가 남았습니다. 이듬날에는 잠방 이불과 담요를 털어야지요. 지난주부터 음성읍내 장마당이 모두 닫히는 바람에 먹을거리 사러 읍내에 나갈 수 없이 되었는데, 참 걱정입니다. 발굽병이니 구제역이니 뭐니 한달지라도, 시골사람이랑 이런 병이 뭐라고. 이런 병은 도시에서 고기를 더 값싸게 더 많이 먹으려 드니까 생기는 병인데, 시골에서 고기를 거의 안 먹으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라고. 장마당 장사꾼들은 어찌 살림을 꾸리고, 장마당에서 먹을거리를 마련하던 우리 같은 시골사람은 어찌하라고. (4344.1.13.나무.ㅎㄲㅅㄱ)